▲ 국을 끓여 새벽녘에 도심에서 팔던 '재치국아지매들'의 모습.
첫 만남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어릴 적 나는 부산 동대신동에서 자랐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재치국 사이소~"라는 가늘고 카랑카랑한 소리가 아침잠을 깨웠다. 아마도 이 소리를 듣고 자란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아지매'들은 낙동강 하구에서 채취한 재첩으로 끓인 국을 양동이에 이고 주택가 곳곳을 누비며 그렇게들 외쳤다.
 
술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아침은 주로 재첩국이었다. 아침상에 빠지지 않고 재첩국이 올라왔건만 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 허여멀건 국 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한번은 순전히 호기심이 발동해 냉장고에 있던 국물을 들이켰다. 한마디로 '뷁!'이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맛도 흐리멍텅하고 재수 없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술맛을 알고부터 재첩국의 참맛을 알게 됐다. 허나 그때는 이미 낙동강의 재첩도 '재치국 아지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재첩국을 먹을 때면 '왜 진작에 이 맛을 몰라봤을까' 하고 후회막급이다. 그래서 재첩국 한 사발 속에는 지금은 추억이 된 많은 것들이 흥건히 젖어 있다.
 
재첩의 진미를 알고부터 늦봄이나 초여름이 되면 가끔 하동을 찾는다. 낙동강은 재첩을 잃었지만 섬진강 맑은 물은 아직도 재첩을 키워내고 있기 때문이다. 섬진강 재첩은 4월 말부터 10월까지 물때에 맞춰 한 달에 10~15일간 채취한다. 남해고속도로 하동나들목(IC)을 빠져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섬진강을 오르면 도로변에 온통 재첩국 집이다. 하동군에서만 얼추 100여 곳을 헤아릴 정도라고 한다. 화려한 건물과 간판을 앞세워 너도나도 원조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하동 읍내에 들어서면 '동흥재첩국'과 '여여식당'이 나란히 붙어 있다. 두 곳 다 재첩국이 향토음식으로 '뜨기' 전부터 장사를 해오던 집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군청, 법원, 경찰서, 세무서 등 주요 관공서가 죄다 몰려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섬진강 재첩만 쓸 수밖에 없는 입지다. 물론 맛으로도 증명된다. 바닷물이 닿는 강 하류에서 채취한 재첩으로 끓인 국에서는 푸른빛이 돈다. 은근하면서도 카랑카랑한 맛이 숨어 있다. 아릿한 갯내가 비치기도 한다. 그 느낌이 오히려 개운함과 감칠맛을 더한다. 산란을 앞둔 4~6월 사이 살이 제대로 오른 재첩은 제법 쫄깃한 육질도 자랑한다. 이 육질만큼은 도시는 물론이고 하동에서도 동흥재첩국과 여여식당에서, 그것도 제철에만 느낄 수 있다.
 
▲ 낙동강 모래를 건설용으로 마구 퍼내고 하구언이 준공돼 생태계가 교란되기 전인 1980년대 이전만 해도 낙동강 재첩은 섬진강보다 유명했다. 낙동강에서 재첩을 채취하던 모습.
지금이야 이렇듯 상황이 역전됐지만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섬진강 재첩은 낙동강 재첩 앞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강의 크기부터 다르니 서식지의 면적과 생산량도 차이가 났고, 재첩의 품질 또한 월등했다. 낙동강 하구 삼락·엄궁·하단 등지의 모래톱에는 재첩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지역에 따라 채취 방법도 조금 달랐다. 삼락 강변에서는 강물이 빠지는 때를 맞춰 뻘을 캐서 얼개미로 모래와 재첩을 분리했고, 엄궁과 하단에서는 강물에 배를 띄워 거렁개로 모래를 거둬 올려 재첩을 분리했다.
 
이렇게 거둔 재첩은 인근 재첩국 집을 비롯해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재치국 아지매'들은 재첩을 한나절 물에 담가두어 모래를 뱉게 하고 흙을 씻어낸 다음, 밤새 끓였다. 그리고는 새벽 첫차를 타고, 부산 서면과 중앙동 그리고 동대신동과 서대신동 등지로 팔러 나갔다.
 
하지만 건설용으로 낙동강 모래를 마구 퍼내고, 1987년 낙동강 하구언의 준공으로 생태계가 교란되면서 재첩도 자취를 감췄다. 이후 낙동강 하구의 재첩국 집들은 섬진강 재첩으로 명맥을 유지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재첩 수확량은 줄어드는 데 반해 주변 재첩국집은 갈수록 늘어 지역내 수요조차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중국산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부산 삼락동과 엄궁동 주변 재첩국집은 여전히 성황이다. 인간의 입맛과 손맛은 제법 생명력이 긴 탓에, 국 맛을 아는 '선수'들과 국 맛을 낼 줄 아는 '아지매'들이 여전히 건재한 까닭일 것이다.
 
▲ 김해 어방동 삼락아지매재첩국의 푸짐한 재첩국상차림.
김해 어방동에 있는 '삼락아지매재첩국' 역시 그런 곳 중 한 곳이다. 이집이 아니라도 김해에는 재첩국집이 더러 있지만, 굳이 이집으로 발길을 옮긴 까닭은 '삼락'이라는 지명이 주는 상징성 때문이다. 예로부터 삼락 강변에서 채취한 재첩이 유난히 살이 단단하고 맛이 좋아 으뜸으로 쳤다. 어차피 낙동강 것이 아닌 다음에야 상상력으로나마 그 여백을 채우는 편이 나을 듯 싶었다. 더군다나 삼락아지매재첩국은 24시간 영업한다. 술꾼들의 허허로운 속을 채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국 맛과 재첩 인심 또한 후덕한 편이다. 사실 재첩국은 조리에 별다른 비법이 없다. 재첩으로만 맛을 내고 물로 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전부다. 따라서 같은 조건이라면 재탕하지 않고 물을 많이 섞지 않을수록 맛이 깊다. 처음에는 솥에 재첩만 넣고 끓이는데 그럼에도 유백색의 국물이 넉넉하게 나온다. 이를 '진국'이라고 한다. 이 진국에 물을 더해 한소끔 더 끓이면 재첩국이다. 둘은 빛깔을 보면 대번에 차이가 난다. 그렇다고 반드시 진국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비리다 느끼는 경우도 더러 있다. 삼락아지매재첩국은 진국이든 재첩국이든 전문점답게 국 빛과 맛이 제법 진하고 감칠맛이 두드러진다. 바닥에는 재첩도 꽤 넉넉하게 깔려 있다. 이미 제 가진 것을 다 내놨기 때문에 재첩의 양이 많다고 국 맛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사람 욕심이야 적은 것 보다 많은 쪽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국물만 놓고 보면 맛깔나지만 재첩 자체가 딱히 먹을 것이 없다보니, 어딜 가나 재첩국 정식은 상차림이 푸짐하다. 특히 낙동강 하구의 재첩국 집들은 김치와 서너 가지 나물에 된장과 고등어조림 그리고 푸성귀와 달걀 프라이가 든 비빔밥 그릇을 항상 곁들인다. 그래서 재첩국집을 선택할 땐, 상차림 역시 중요한 기준이 된다.
 
▲ 재첩회.
삼락아지매재첩국은 이 점에서 특히 돋보인다. 깔리는 찬도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맛이 깊다. 특히 양념을 넉넉히 사용해 갓 담은 김치는 감미료를 넣지 않아 요즘 식당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이다. 꾸떡꾸덕 말린 납세미(갈가자미)구이 또한 별미다. 재첩 진국 정식을 시키면 두세 가지 찬이 더 곁들여 지는데, 적은 양이나마 재첩회의 맛도 볼 수 있고 미나리 전에서는 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지난 연말에는 기존의 식당 건물 뒤편에 새롭게 2층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건물 이전과 함께 '돌솥밥 정식'이 추가됐다. 공기 밥 정식보다 1천~2천 원 비싸고 20분 정도 기다려야 하지만 고슬고슬하고 기름진 밥 덕분에 재첩국도 반찬도 그 맛이 한층 살아난다. 돈과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선택이다. 전화로 미리 주문하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예전에는 공간이 음식을 받쳐주지 않아 못내 아쉬웠는데, 지금은 꽤나 그럴듯한 재첩국 전문점으로 거듭났다.
 
▶메뉴:재첩국 정식(6천 원), 재첩 진국 돌솥밥정식(1만 2천 원)
▶위치:김해시 분성로 529번길 15
▶연락처:070-7319-8064





박상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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