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선대 전경. 안으로 들어가면 주변을 산책할 만한 오솔길이 있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 또한 고즈넉하다.
대성동(大成洞), 서상동(西上洞), 동상동(東上洞), 회현동(會峴洞), 부원동(府院洞)에 걸쳐 있던 가락국의 옛 성과 궁궐을 뒤로 하고 부원 경전철역까지 내려가다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길의 왼편으로는 김해 행정의 중심 김해시청이 있다. 여기에서 경전철을 따라 부산 방향으로 나아간다. 김해시청역, 인제대학역을 지나고 김해대학역 못 미쳐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바로 신어산(神魚山)에서 흘러내리는 신어천(神魚川)이 흘러흘러 김해공항 쪽으로 흐르는 곳이다. 주변은 안동(安洞)공단 지역으로, 공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여기에 초선대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 이곳은 옛 가락국의 중심이었던 현재의 동상동 지역에선 주변의 가득 찬 건물들에 가려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김수로왕의 장남이자 가락국 두 번째 왕인 거등왕(居登王:재위 199∼238)이 칠점산(七點山)에서 거문고를 타던 참시선인( 始仙人)을 불러 함께 바둑을 두고 노닐던 시기에는 지금의 건물들은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신어천이 넓디 넓은 바다와 만나는 곳에 초선대가 조각배인양, 참시선인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칠점산의 일곱 봉우리가 연꽃 송이인양 바다 위에 동동 떠있는 풍경을 보고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여기에다 아득히 펼쳐진 바다는 저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을 금치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 초선대에 조성한 정자와 중첩된 바위. 여기에서 거등왕과 참시선인이 웅어를 안주로 술을 즐기고, 바둑을 두었다면 참으로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인(仙人)을 초대했다는 뜻의 초선대는 현인(賢人)을 부른다는 뜻의 초현대(招賢臺)라고도 한다. 신선이라고 알려진 참시가 어질고도 총명한 사람이기도 했다면, 참시는 단순한 거등왕의 놀이 상대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조언자의 역할도 함께 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지봉과 봉황대가 가락국 정치와 생활의 상징이라면, 초선대와 칠점산은 가락국 정서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 일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역사·지리 자료들과, 수많은 시인들의 작품에 표현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원종(元宗)·충렬왕(忠烈王) 때의 사람인 주열(朱悅:?~1287)의 시를 소개하고 있으니,
 

수로왕릉 앞에 풀빛이 푸르고
초현대 밑엔 바다 물결 반짝이네
봄바람은 사람 떠난 집에도 고루 들며
매화를 피워 나그네 마음 위로해주네
 

首露陵前草色靑(수로릉전초색청)
招賢臺下海波明(초현대하해파명)
春風遍入流亡戶(춘풍편입유망호)
開徧梅花慰客情(개편매화위객정)
 

   
 
이 시를 지을 당시인 1276년, 주열은 경상도 계점사(計點使)로 김해 지역의 호구와 토지 조사, 과세 조정 및 부역 업무를 담당하였다. 원(元)은 1270년 합포(合浦: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합포동)를 기지로 하고 김해 등지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한 후 일본 정벌을 준비하고, 1274년에 1차 원정, 1281년에 2차 원정을 단행하였으며, 그 와중에 왜구의 침입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김해를 떠난 사람은 대단히 많았다. 주열은 당시 이러한 상황을 조사하고, 이들을 평상의 생활로 돌려놓기 위해 김해에 왔던 것이다. 수로왕릉 앞으로 펼쳐진 봉황대와 그 주변은 푸릇푸릇 풀이 돋고, 저 멀리 바라보이는 초선대 아래로는 바다 물결이 반짝거린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풍경의 이쪽에는 전란으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백성들의 빈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가슴 아프다. 사람이 떠나 아픈 나그네의 가슴을 매화 피는 봄이 찾아와 달래주니 이 무슨 조화 속인가?
 
1500년 5월 김해로 유배를 왔던 정희량(鄭希良:1469~?)은 초선대에 올라가 다음과 같이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초현대 오래된 바위 가야국
해질녘 오르니 가슴을 깨끗이 씻겠네
쪽빛 같은 산은 안개에 짙게 물들었고
눈 같은 갈대꽃이 교묘히도 기러기 감췄네
아득한 저 밖에 제비 꼬리처럼 나뉜 호수
멀고 먼 저 가운데엔 자라 머리에 닿은 땅
물 거슬러 봉래섬으로 가고 싶긴 하건만
강의 신이 돛단배에 바람 빌려주려 할런지
 

招賢老石伽倻國(초현노석가야국)
落日登臨許盪胸(낙일등임허탕흉)
嶽色似藍深染霧(악색사람심염무)
蘆花如雪巧藏鴻(노화여설교장홍)
湖分燕尾蒼茫外(호분연미창망외)
地迫鰲頭縹緲中(지박오두표묘중)
我欲泝洄蓬島去(아욕소회봉도거)
江神肯借半帆風(강신긍차반범풍)
 

   
<정희량, 登招賢臺(등초현대)>  

 
김해를 두르고 있는 산은 짙은 안개에 가려 쪽빛의 자태를 뽐내고, 눈처럼 하얀 갈대꽃 속에는 기러기가 보일듯 말듯 가만가만 움직이고 있다. 저 멀리 호수처럼 잔잔한 삼차강(三叉江)은 세 갈래로 갈린 그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 또 멀리 구지봉이 있어 주변 해반천(海畔川), 호계(虎溪), 신어천의 물줄기 사이로 땅이 그곳까지 이어져 있으니, 이 모두는 신선이 사는 곳에서나 볼 만한 것이다. 시에는 초선대에서 바라본 당시 김해의 자연 풍광에 대한 시인의 감동이 참으로 짙게 배어나고 있다,
 

▲ 초선대 금선사 옆으로 흐르는 신어천. 한시를 보면 그 옛날 이 주변은 바다와 신어천이 만나 물결이 반짝거렸다고 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다음은 조선 후기의 시인 윤기(尹 :1741∼1826)의 시다. 그는 초선대의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역사에 더 시상을 집중하고 있다.
 

거등왕이 왕위를 이으니 흐린 기운 걷혀
칠점산의 선인이 초대에 응했지
몇몇의 참된 현자 함께 도왔던가
참시가 초현대 지었다는 말 들었을 뿐
 

居登嗣位混蒙開(거등사위혼몽개)
七點山人應召來(칠점산인응소래)
幾箇眞賢同贊化(기개진현동찬화)
只聞始作招賢臺(지문시작초현대)
 

   
<윤기, 詠東史(영동사)>  


윤기는 시에다 '수로왕이 죽자 아들 거등왕이 왕위에 올랐다. 칠점산에 사는 사람 참시를 불러서 초현대를 지었다'고 하였다. 거등왕은 199년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253년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웠던 시기를 지나면서 가락국은 국가로서의 면모를 확연히 갖추었다. 거등왕은 이에 칠점산에서 지내는 참시를 불러 국가를 위한 조언을 들었다. 윤기는 다른 시인들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초선대를 읊은 것과는 달리 은둔하고 있던 현자 참시가 거등왕을 도우러 초대에 응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많은 현자들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초선대를 지은 것은 오직 참시일 뿐, 즉 거등왕의 통치에 제대로 된 도움을 주었던 것은 참시일 뿐이었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조선조 말 이학규(1770~1835)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이며 시를 읊고 있다.

건릉(健陵:정조) 22년 무오(戊午:1798)에 산청현(山淸縣)에서 가락국 마지막 구해왕(仇亥王) 및 그 왕비인 계화(桂華)의 진상(眞像)과 활과 칼과 남긴 옷을 발견하여 그것을 현의 서쪽 왕산사(王山寺)에 보관해두었다. 초선대는 부의 동쪽 7리 넓은 들 가운데 있는데, 거등왕이 칠점산 참시선인을 불러 노닐며 즐겼던 곳이다. 대에는 왕이 앉았던 연화석(蓮花石) 및 돌 받침 바둑대가 있고 서쪽에는 돌 위에 거인(巨人)의 상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거등왕의 상이라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는 왕도(王都)에서는 위어(葦魚:갈대고기, 웅어)가 난다고 하는데, 지금 김해부 및 경주에서 이 고기가 난다.
 

성밖에 있는 연화대
그때 신선을 불렀던 곳
참시의 뼈는 서리가 되어버렸고
거등왕 흔적은 어디로 갔는가
아직도 남았느니 바둑 두던 판
노니는 사람이 걸터앉을 수도 있네
 

城外蓮花臺(성외연화대)
當時招仙處(당시초선처)
旵始骨已霜(참시골이상)
居登迹何遽(거등적하거)
猶存石碁盤(유존석기반)
遊人得夷踞(유인득이거)
 

   
<이학규, 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금주부성고적 12수), 招仙臺(초선대)>  

 

계화의 옷과 신 아득하여라 티끌과 재 되었고
참시가 남긴 자취 조각조각 돌로 쌓였구나
천년 왕도의 풍속이 남아 있구나
보리 거두는 시절 웅어가 오네
 

桂華衣履謾塵灰(계화의리만진회)
旵始遺踪片石堆(참시유종편석퇴)
千古王京風氣在(천고왕경풍기재)
麥秋時節葦魚來(맥추시절위어래)
 

   
<이학규, 金官紀俗詩(금관기속시)>  


 이전의 기록이나 시에서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거등왕의 연화대와 바둑판이 이학규가 이 시를 읊을 당시에 남아 있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연화대는 초선대 서쪽 금선사(金仙寺) 입구의 오른쪽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 마애석불(磨崖石佛)의 연화대일 것이고, 바둑판은 초선대 위 정자 주변의 평평한 바위일 것이다.
 

▲ 초선대 마애석불. 이 불상에서 옛 사람들은 거등왕의 모습을 찾곤 했다.
마애석불은 민머리에 아주 낮은 육계(肉 :부처의 정수리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를 하고 있다. 얼굴은 직사각형에 이마는 좁고 백호(白毫:부처 눈썹 사이의 희고 빛나는 터럭)는 매우 크게 표현되었다. 눈은 옆으로 길고 코는 작으며 입술은 두툼하고 크다. 귀는 턱까지 내려오며 목에는 삼도(三道:불상의 목에 가로로 표현된 세 줄기 주름)를 간단하게 새겨 놓았다. 직사각형으로 넓은 어깨에는 법의(法衣)를 걸쳤으며, 법의의 주름은 양어깨로부터 세로로 4~5줄 표현되었다. 수인(手印:모든 부처와 보살의 맹세와 발원을 나타내는 손 모양)은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서 모은 듯하지만 표면이 떨어져 나가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다. 무릎은 손상이 심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옆으로 긴 편이며 상하 폭은 그다지 넓지 않다. 광배(光背:머리나 등 뒤에 표현되어 있는 둥근 빛)는 원형의 두광(頭光: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상체의 윤곽을 따라 표현된 신광(身光: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구성하였다. 여기에 불상의 오른쪽 반만 남은 연화대가 있다. 전문가들은 이 마애불을 고려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본다.
 
시인은 이러한 마애석불의 모습에서 지금은 볼 수 없는 거등왕의 모습을 찾고, 주변의 바위들과 풍광 속에서 참시선인의 자취를 찾고 있다. 여기에다 현재 낙동강의 물금 주변에서 축제로 잘 알려진 웅어를 언급하여, 거등왕과 참시선인이 만나서 즐기던 그 풍류가 지금도 웅어를 먹는 풍속 속에 살아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웅어는 갈대 속에 알을 낳는 습성으로 '갈대고기'라고도 하는데, 멸치처럼 납작하게 생겼으며 회유성 어류로 맛이 좋아 조선시대부터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고 뼈째 먹을 수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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