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은 옛 가락국의 중심이었던 현재의 동상동 지역에선 주변의 가득 찬 건물들에 가려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김수로왕의 장남이자 가락국 두 번째 왕인 거등왕(居登王:재위 199∼238)이 칠점산(七點山)에서 거문고를 타던 참시선인( 始仙人)을 불러 함께 바둑을 두고 노닐던 시기에는 지금의 건물들은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신어천이 넓디 넓은 바다와 만나는 곳에 초선대가 조각배인양, 참시선인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칠점산의 일곱 봉우리가 연꽃 송이인양 바다 위에 동동 떠있는 풍경을 보고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여기에다 아득히 펼쳐진 바다는 저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을 금치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구지봉과 봉황대가 가락국 정치와 생활의 상징이라면, 초선대와 칠점산은 가락국 정서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 일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역사·지리 자료들과, 수많은 시인들의 작품에 표현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원종(元宗)·충렬왕(忠烈王) 때의 사람인 주열(朱悅:?~1287)의 시를 소개하고 있으니,
수로왕릉 앞에 풀빛이 푸르고 | 首露陵前草色靑(수로릉전초색청) | |
1500년 5월 김해로 유배를 왔던 정희량(鄭希良:1469~?)은 초선대에 올라가 다음과 같이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초현대 오래된 바위 가야국 | 招賢老石伽倻國(초현노석가야국) | |
<정희량, 登招賢臺(등초현대)> |
김해를 두르고 있는 산은 짙은 안개에 가려 쪽빛의 자태를 뽐내고, 눈처럼 하얀 갈대꽃 속에는 기러기가 보일듯 말듯 가만가만 움직이고 있다. 저 멀리 호수처럼 잔잔한 삼차강(三叉江)은 세 갈래로 갈린 그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 또 멀리 구지봉이 있어 주변 해반천(海畔川), 호계(虎溪), 신어천의 물줄기 사이로 땅이 그곳까지 이어져 있으니, 이 모두는 신선이 사는 곳에서나 볼 만한 것이다. 시에는 초선대에서 바라본 당시 김해의 자연 풍광에 대한 시인의 감동이 참으로 짙게 배어나고 있다,
거등왕이 왕위를 이으니 흐린 기운 걷혀 | 居登嗣位混蒙開(거등사위혼몽개) | |
<윤기, 詠東史(영동사)> |
윤기는 시에다 '수로왕이 죽자 아들 거등왕이 왕위에 올랐다. 칠점산에 사는 사람 참시를 불러서 초현대를 지었다'고 하였다. 거등왕은 199년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253년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웠던 시기를 지나면서 가락국은 국가로서의 면모를 확연히 갖추었다. 거등왕은 이에 칠점산에서 지내는 참시를 불러 국가를 위한 조언을 들었다. 윤기는 다른 시인들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초선대를 읊은 것과는 달리 은둔하고 있던 현자 참시가 거등왕을 도우러 초대에 응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많은 현자들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초선대를 지은 것은 오직 참시일 뿐, 즉 거등왕의 통치에 제대로 된 도움을 주었던 것은 참시일 뿐이었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조선조 말 이학규(1770~1835)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이며 시를 읊고 있다.
건릉(健陵:정조) 22년 무오(戊午:1798)에 산청현(山淸縣)에서 가락국 마지막 구해왕(仇亥王) 및 그 왕비인 계화(桂華)의 진상(眞像)과 활과 칼과 남긴 옷을 발견하여 그것을 현의 서쪽 왕산사(王山寺)에 보관해두었다. 초선대는 부의 동쪽 7리 넓은 들 가운데 있는데, 거등왕이 칠점산 참시선인을 불러 노닐며 즐겼던 곳이다. 대에는 왕이 앉았던 연화석(蓮花石) 및 돌 받침 바둑대가 있고 서쪽에는 돌 위에 거인(巨人)의 상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거등왕의 상이라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는 왕도(王都)에서는 위어(葦魚:갈대고기, 웅어)가 난다고 하는데, 지금 김해부 및 경주에서 이 고기가 난다.
성밖에 있는 연화대 | 城外蓮花臺(성외연화대) | |
<이학규, 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금주부성고적 12수), 招仙臺(초선대)> |
계화의 옷과 신 아득하여라 티끌과 재 되었고 | 桂華衣履謾塵灰(계화의리만진회) | |
<이학규, 金官紀俗詩(금관기속시)> |
이전의 기록이나 시에서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거등왕의 연화대와 바둑판이 이학규가 이 시를 읊을 당시에 남아 있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연화대는 초선대 서쪽 금선사(金仙寺) 입구의 오른쪽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 마애석불(磨崖石佛)의 연화대일 것이고, 바둑판은 초선대 위 정자 주변의 평평한 바위일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마애석불의 모습에서 지금은 볼 수 없는 거등왕의 모습을 찾고, 주변의 바위들과 풍광 속에서 참시선인의 자취를 찾고 있다. 여기에다 현재 낙동강의 물금 주변에서 축제로 잘 알려진 웅어를 언급하여, 거등왕과 참시선인이 만나서 즐기던 그 풍류가 지금도 웅어를 먹는 풍속 속에 살아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웅어는 갈대 속에 알을 낳는 습성으로 '갈대고기'라고도 하는데, 멸치처럼 납작하게 생겼으며 회유성 어류로 맛이 좋아 조선시대부터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고 뼈째 먹을 수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