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아버지는 스탠드를 켜놓고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앉아계신 책상 주변을 비추고 있는 스탠드 불빛은 따뜻해 보였다. 무슨 일엔가 열중하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어린 나조차도 숨죽이게 했다. 침을 꼴깍 삼키며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엿본 책상 위의 세계는 신기했다. 아버지는 섬세한 손길로 무언가를 그리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무얼 하는 중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뭔가 아주 근사한 일을 하고 계신다!' 아버지를 향한 존경심도 어린 내 가슴을 적셨다. 나는 밤이 이슥하도록 스탠드를 켜놓고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아버지를 존경했고,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이 좋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처럼 짧은 동화 같은 추억을 간직한 화가가 있다. 수채화가 정원조(49) 씨다.

정원조의 화실은 내동 1097의 10 건물 2층 '정원조 수채화 아카데미' 안에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슬 머금은 장미, 시원한 파도, 언덕을 지키고 선 늙은 소나무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실물 같은데, 그러나 수채화 그림들이다.
 
수채화를 배우러 오는 수강생들의 이젤이 놓인 공간, 그가 그림을 그리는 공간,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오밀조밀하게 나누어져 있다. 그 사이사이마다, 벽면마다 수채화 액자들이 걸려있다. 그림들이 대부분 자연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어, 향기롭고 비밀스러운 화원에 소풍 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그리는 동안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
수채화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죠
재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차경복·조경옥 화백에게 그림 배워
사물·자연 사실적으로 그리는 게 좋죠
번짐과의 싸움은 그림인생의 화둡니다

정원조는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진구 가야동에서 나고 자랐다. 여러 제품의 상표디자인을 하며 인쇄소에서 일했던 아버지 정복근(85) 씨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는 동종업계 후배들 사이에서는 '부산 인쇄업계의 전설'로 불리고 있죠. 아버지가 만든 상표디자인, 아마 들으면 아실 겁니다. 동산유지의 다이알 비누 포장 디자인과, 대선주조의 소주 '선(鮮)'시리즈가 아버지의 작품입니다."
 
정원조는 그림이 너무 좋아서 만화도 열심히 봤다. 어머니가 가게에 심부름을 보내면, 그 돈으로 곧장 만화방으로 달려가 새로 나온 만화책을 보곤 했다.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에게 혼도 참 많이 났단다.
 
▲ 수채화가 정원조의 이젤과 팔레트.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미술실기대회에 '선수'로 뽑혀나갔고, 대회에 나가서는 상도 많이 탔다. 교실 뒤 게시판에는 그의 그림이 늘 붙어 있었고, 미화부장을 도맡아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정원조는 '그림 그리는 친구'로 통했다.
 
부산 동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대학입시 외에는 관심 없는 교사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갈등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림은 그의 운명 같은 것. 부모 몰래 미술부에 들어가 그림을 계속 그렸다. "1학년 때, 제가 생각해도 미술부 1학년 중에서 제가 제일 잘 그렸어요. 그런데 2학년이 됐을 때, 저보다 못 그리던 친구가 방학 사이에 실력이 부쩍 늘어 저보다 잘 그리는 겁니다. 겨울방학동안 미술학원을 열심히 다닌 거예요. 미대 가려는 학생들은 미술입시학원을 다녔거든요."
 
미술부에 들었다는 말도 못했는데 학원에 보내달라는 말을 부모에게 할 수는 없었다. 학원을 보낼만큼 가정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지만, 정원조는 친구를 따라 학원에 갔다. "몸이 저절로 학원으로 가더라구요." 학원에서 그림을 일주일쯤 그렸을까, 원장이 학원비를 가지고 오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정원조는 이 봉투를 부모에게 보이지 못하고 가방 속에 넣고만 다녔다. 한 달이 지났다. 왜 학원비를 가져오지 않느냐는 원장의 질문에 사춘기 소년 정원조는 얼굴만 붉혔다. 결국 그 학원에는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또 다른 학원을 찾아갔다. 그때 만난 첫 스승이 서양화가 차경복(69·제3회 송혜수미술상 수상자)이다. 차경복 화백은 당시 부산 대연동 못골시장 근처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원조는 또 학원비를 내지 못한 채 봉투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의 가방에서 이 봉투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아들 몰래 학원을 찾아가 차 화백에게 "아들에게 학원에 오지 말라고 이야기해 달라. 학원비를 낼 형편이 안된다"며 사정을 했다. 그때 차 화백은 "정원조 학생은 공부도, 그림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다. 그림에 대한 재능이 뛰어난데, 그만두기에는 너무 아깝다. 학원비는 신경 쓰지 말고 학원에 계속 보내라"고 오히려 어머니를 설득했다.
 
이런 연유로 정원조는 차 화백의 화실에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무료로 학원을 다니는 것이 눈치 보여, 학원 청소를 하면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공부도 했다. 디자인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이 많은 학원이어서 학원 분위기는 디자인 수업 중심이었다. 그는 수채화 공부를 독학하다시피 하며 노력했지만 대학입시에서 좌절을 겪었다. 서울대 미대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던 것이다. 다음해에 부산대 미대에 진학했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구포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1993년, 대학 4학년 봄에 결혼했어요. 아내는 동아대 미대에서 도자기를 전공했어요. 일찍 가정을 이루었으니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했죠. 그래서 학원을 운영했는데, 몇 년간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동안 건강이 많이 나빠졌어요."
 
그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왜 미술학원 원장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고 한다. 그는 학원 문을 닫고 2년 정도 쉬었다. 그리고 1996년 3월 김해로 왔다. "2년 쉬면서 그동안 벌어놨던 돈을 쓰기만 했으니, 다시 삼방동에 미술학원을 열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2000년에 학원을 정말, 문을 닫았습니다. 아내에게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두말 않고 동의해줬습니다. 두 딸아이도 키우고 가르쳐야 할 시기였는데…. 아내가 그렇게 나를 지지해 주어서 큰 힘이 됐죠."
 
그는 김해에서 두 번째 스승을 만났다. 서양화가 조경옥 화백이다. (본지 2012년 12월 18일자 10면 '공간&' 참조) "조경옥 선생님은 소나무를 비롯해 자연을 화폭에 담는 화가입니다. 제 작품과 통하는 점이 많았죠. 선생님은 저의 멘토이고, 제2의 스승입니다. 영향을 많이 받았죠."
 
▲ 신어산 은하사 담장의 가을풍경을 담은 <추광>. 1998년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작이다.

그는 대학시절, 현대미술과 실험적인 작품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별종 취급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사물을, 눈앞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대상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에는 수채화 기법이 가장 알맞았기에, 그는 줄곧 수채화를 고집해 왔다. 그 노력은 1998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서양화(유화·수채화) 구상 부문에서 특선을 받으면서 빛이 났다. <추광>이라는 제목을 단 이 그림은, 신어산 은하사로 올라가는 길의 가을 풍경을 담고 있다. 은하사 입구 돌계단 옆의 담장과 나무, 낙엽, 불사를 하면서 나온 폐목 더미에 골고루 내려진 가을햇살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는 수채화가 쉬운 분야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수채화를 유화의 전 단계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작업이 훨씬 까다롭습니다. 물 사용량에 따라 같은 색이라도 느낌이 달라요. 물감이 잘못 번지기라도 하면 기껏 그려놓은 작품을 망칩니다. 수정이 불가능해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실패를 줄이고 기법이 손에 익기까지는 많은 시간 연습해야 합니다. 저도 아직 부족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더 고민이 많아지네요. 수채화를 그리는 작업이 까다로운 까닭은 '번짐' 때문입니다. 번짐이라는 부분은 제가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하는 화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까다로운 작업을 계속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에는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죠. 그것이 수채화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 정원조
개인전 4회(서울/부산/김해). 한·중 아트페어, 남부워터칼라 페스티벌전, 김해문화의전당 개관기념전, 부산 롯데화랑 기획 초대전 외 단체전 150여 회. 부산미술대전·김해미술대전·성산미술대전·대한민국 수채화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2010년 김해수채화협회 창립. 현 김해수채화협회 회장. 한국미협수채화분과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13 남부워터칼라 페스티벌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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