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추수가 끝나면 부지런한 농부들은 나락 갈무리를 끝낸 뒤, 햇볏짚으로 초가지붕을 새로 이었다. 새끼줄도 미리미리 꼬아두었다. 굵기도 여러 종류였다. 그 새끼줄로 짚신을 만들고, 맷방석을 엮고, 멍석을 짜고, 곡물 씨앗 보관용 씨오쟁이를 만들었다.
이처럼 벼농사를 지었던 우리 민족에게 추수가 끝난 뒤의 짚이나 산과 들에서 구할 수 있는 풀들은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소중한 재료였다. 현대화의 물결에 따라 짚과 풀을 이용한 생활용품은 거의 사라졌지만, 짚과 풀을 이용한 작업은 민속공예의 한 분야로서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김해의 짚·풀공예가 윤귀숙(51) 씨. 그는 짚·풀공예를 후대에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안고 26년째 활동 중이다.

짚공예 작품에 인두·화로·숯다리미 등
작업공간인 거실을 가득 메운 전통물품
"민속박물관이나 체험관 운영하고 싶어"


윤귀숙 씨는 어른들이 짚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걸 보며 자랐다. 윤귀숙의 고향은 경남 함안군 대산면 부목리 신촌이다. 농사를 크게 지은 큰댁 옆에서 그의 부모들도 농사를 지었다. 그는 마을에서 어른들이 짚으로 가마니나 멍석을 짜는 걸 보았고, 큰댁 머슴들이 모여 새끼줄을 '엄청나게 꼬아두는 것'을 지켜봤다. 추수가 끝나면 초가의 용마루를 잇는 대공사도 진행됐다.
 

▲ 아파트 베란다의 한 쪽을 장식하고 있는 윤귀숙 씨의 짚공예품. 짚신, 멍석, 동구미, 초가를 올린 정자 지붕 등이 미니어처를 연상케 한다.

"우리 조상들은 살림에 쓰이는 물건들을 전부 직접 만들어 썼잖아요. 제 부모님도 손재주가 좋아서 집에서 쓰는 물건의 대부분을 손수 만드셨어요. 그 덕분에 저도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머슴들은 농한기가 아니더라도 새끼줄을 늘 꼬곤 했지요. 예전에는 끈 하나도 모두 새끼줄로 꼬아서 만들어 썼잖아요." 윤귀숙은 짚·풀공예를 '생활 속에서 발전해 온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녀시절에는 등공예를 했다. 마산에서 직장생활을 했을 때, 등공예 자격증도 땄다. 1987년에 결혼을 하면서 김해로 왔는데, 그때는 등공예방을 열었다. 어머니들이 등공예를 배우러 많이 왔다. 지금은 공방을 열지 않고 있다.
 
윤귀숙은 현재 삼계동 부영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파트 거실이 그의 작업공간이다. 가야문화축제 때 민속 짚·풀공예 체험 행사를 맡아온 윤귀숙은 지금이 축제 준비로 한창 바쁠 때다. 하도 바빠서 어렵사리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파트로 들어서니 거실 장식장과 바닥, 베란다까지 짚공예작품과 틈틈이 모아둔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했다. 인두, 화로, 숯다리미 등등. 사설 민속박물관이 따로 없었다. "언젠가는 민속박물·체험관 같은 걸 운영하고 싶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주말마다 남편과 함께 전국을 돌며 골동품들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그 물건들을 함안에다 보관 중이에요. 아마 웬만한 민속박물관보다는 제가 보관 중인 물건들이 더 많을 걸요." 그는 짚·풀공예뿐만 아니라 민속문화 전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 윤귀숙 씨가 짚으로 계란 꾸러미를 만드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잘 따라 하면 계란 꾸러미는 미취학 아동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계란은 실제와 똑같이 만든 모형이다. 박정훈 객원기자 poonglyu@naver.com
등공예 배우다 우연히 본 새끼줄에 반해
제1회 강사시험 때 수준 높은 실력 과시
탈곡기며 풍구 싣고 다니며 강의해 유명

등공예를 하던 그가 짚·풀공예에 주목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등공예를 가르치던 어느 날 정말 우연히 버려진 새끼줄 묶음이 눈에 띄었어요. 등공예 실력을 믿고 새끼줄로 바구니를 엮어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때부터 짚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답니다." 글쎄, 이런 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등공예 실력이 바탕이 되었던지, 짚·풀공예는 쉽게 익힐 수 있었다. "1회 짚·풀공예강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에 갔을 때, 심사위원들이 '짚하고 풀이 손에 착착 감긴다. 전직이 뭐냐,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났느냐'고 하더군요. 시험과제를 뛰어넘는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냈다며 놀라워하더라구요."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강사시험을 통과했고, 짚·풀공예강사가 됐다. 김해의 짚·풀공예강사 1호.
 
그는 김해는 물론 타도시에도 초빙돼 체험 활동을 지도했다. 짚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탈곡기와 풍구(곡물의 쭉정이·겨·먼지 등을 가려내는 농기구)도 싣고 다녔다. 부산, 통영, 하동 등 부산·경남 일대에서는 '윤귀숙 강사의 체험'이 열리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방학 때면 학교 교사들도 앞다투어 그에게서 기법을 배웠고,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학교로 초청을 받아 간 적도 헤일 수 없이 많다.
 
"다른 도시에 초청받아 가면 '짚·풀공예라고 해서 할아버지가 올 줄 알았는데, 웬 젊은 여자냐'며 놀라기 일쑤였죠. 체험장을 방문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제 두 손을 붙잡고 수고한다,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그분들은 옛 추억에 젖기도 하지요. 중년세대들도 좋아해요. 어릴 적 기억이 나는 거지요. 청소년들과 어린이들도 신기해 하고 즐거워해요. 저는 어린이들이 재미있어 할 때 너무 좋아요. 우리 것을 배우겠다니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지만 체험현장에서는 피곤한 줄을 모릅니다."
 
문득, 26년간 볏짚과 풀을 만져왔다니, 손이 얼마나 거칠까 싶어 손을 한 번 만져보자고 했다. "제 손 만지면 다들 깜짝 놀라는데요"하면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실제로 깜짝 놀랐다. 손이 너무 부드러워서였다.
 
"볏짚, 풀, 모두 자연에서 나온 친환경 재료잖아요. 아마 제가 다른 인공적인 재료로 26년간 공예를 했다면 정말 손이 거칠어졌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볏짚은 그렇게 딱딱한 재료가 아니에요. 부드럽답니다."
 
그는 진영이나 밀양의 농가에서 짚을 구한다. 이들 농가에서는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잘 추려내 보내준다. 이걸 다시 추려내 다발로 묶은 뒤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한다. 일 년 정도 묵히면 짚은 더 부드러워진다. 짚으로 공예품을 만들 때는 접기도 해야 하는데, 딱딱해서 부러지면 안 되니 사전 준비 작업을 하는 셈이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들이 볏짚을 물에 담갔다가 꺼낸 뒤 물기가 빠질 때까지 세워두는 걸 봤어요. 그 다음에는 나무방망이 같은 걸로 두들겨 주죠. 그러면 한결 더 부드러워져요."
 
윤귀숙은 둥구미(짚으로 둥글게 엮어 만든 그릇) 만드는 법을 설명했다. 완성 상태의 둥구미의 크기를 가늠한 뒤, 필요한 만큼 새끼줄을 준비한다. 그릇바닥을 만들 때는 4가닥의 새끼줄을 걸어 우물 정자를 먼저 만든다. 이후 새끼줄을 반으로 접어 끼운 뒤 감아엮기로 바닥을 만든다. 바닥에서 기둥을 이어 세우는 과정에서는 무늬를 넣기도 한다. 이때, 염색한 새끼줄을 이용해 무늬를 짜넣는다. 지름 0.5㎝의 새끼줄로 지름 20㎝, 높이 8㎝ 정도의 둥구미를 만드는 데는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이제 윤귀숙의 시범을 볼 시간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체험장에서 가장 먼저 보여주는 풀벌레 만들기. 그런데, 그의 손이 너무 빨라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여치 한 마리, 사마귀 한 마리, 메뚜기 한 마리를 만드는 데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짚으로 계란꾸러미를 만드는 것도 금방이었다. "어린이들의 체험 때는 계란꾸러미 만들기가 많이 활용돼요. 계란 모형만 천 개쯤 만들어 뒀어요." 기자는 계란 모형이 천 개라는 말에 한 번 놀랐고, 아이들이 손으로 만지기 때문에 친환경 안료로 계란과 같은 색을 배합하느라 고심했다는 말에 두 번 놀랐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색칠을 하며 완성한다는 말에 또 놀랐다.
 
"짚·풀공예는 우리의 민속문화입니다. 누군가는 이 분야를 전승해야 하는데 제가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시골마을에 계신 어르신들이 다 돌아가신 뒤, 젊은이들이 관심을 이어가지 않으면 잊혀질지도 모르죠. 봉
하마을에 있는 고 노무현대통령 생가, 초가지붕 용마루, 이런 걸 할 수 있는 어르신들이 대체 언제까지 살 아계시겠어요. 그런 기술은 후대에 전해져야죠. 선조들이 남긴 생활 속의 예술, 제가 꼭 지켜가고 싶습니다." 

>> 윤귀숙
아산 전국짚·풀공예품 및 문화상품공모전 은상(2009), 개천미술대상전 특선(2009), 제40회 경상남도 공예품대전 동상·제40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장려상(2010), 제7회 김해공예대전 은상(2011), 제15회 경상남도관광기념품 공모전 은상(2012), 경남도지정업체 선정(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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