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읍지의 칠점산 주변. 대동여지도에서 보이던 칠점산 앞의 두 섬이 사라지고 없다. 또한 칠점산은 양산의 땅 '양산지(梁山地)'라고 적혀 있다.
초선대(招仙臺)에서 거등왕(居登王)과 만나 음악을 즐기고 바둑을 두었던 참시선인( 始仙人)은 바다 건너 초선대의 동남쪽에 있던 칠점산(七點山)에서 거문고를 타며 살았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옛날 거등왕 시대에 참시선인이 배를 타고 건넜던 초선대와 칠점산 사이에 큰 모래섬이 형성되어 이제는 걸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이상 걸어갈 각오는 해야 한다.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1866)의 <대동여지도>에는 칠점산이 있는 대저도 앞에 두 개의 섬이 따로 떨어져 있으나, 1929년에 간행된 <김해읍지>의 지도에는 두 개의 섬이 대저도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100년이 되지 않은 사이에 상류의 모래가 밀려와 원래는 세 개의 섬이었던 대저도(大渚島)를 하나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낙동강 하류의 지형이 계속 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인공이 거의 가해지지 않았던 당시의 낙동강 하류가 세월과 물의 흐름에 따라 변하였던 것은 당연한 이치다.
 
조선이 개창할 때 태어난 문인 안숭선(安崇善:1392~1452)은 당시의 김해를 "산천이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인물이 번성하다. 세 갈래 물이 빙 둘렀고, 칠점산(七點山)이 얼기설기하다"라고 하였다. 안숭선이 김해의 대표적인 경관으로 꼽은 것은 세 갈래 물, 즉 삼차하(三叉河)와 칠점산이다. 삼차하는 양산에서 흘러내려온 낙동강(황산강)이 부산시 북구 화명동과 건너편인 김해시 대동면을 기점으로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에서 김해 쪽으로 흘러가는 서낙동강과, 부산시 사상구로 흘러가는 동낙동강으로 나뉘면서 세 갈래 물줄기를 형성한 곳이다. 삼차하 아래쪽의 대저동은 공단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시설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김해국제공항이다. 공항은 국제선·국내선 청사, 관제탑, 활주로 등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으니, 그 넓이는 공항 입구에서 끝을 바라보았을 때 가물가물할 정도다. 그 가물가물한 끝부분에 흐릿하게 숲을 인 봉우리가 하나 보인다. 이곳이 칠점산이다. 현재 칠점산은 봉우리 하나만 더벅머리를 풀어헤친 것처럼 남아 있고, 주변에는 모두 공항과 공군부대 시설이 들어서 있다. 공군 부대 주변에는 수로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이름은 칠점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칠점마을이라 새겨진 입석(立石)이 있고, 입석으로부터 수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공항의 담이 이어진다. 수로를 따라가다 공항 담벼락으로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면 담 너머로 칠점산의 마지막 봉우리가 보이고, 그 앞에는 칠점산의 모양을 머리에 인 비석이 있다.
 
그 내용은 "소백산맥을 타고 낙동정맥의 정기가 동쪽으로 내닫다가 낙동강 하류에서 꼬리를 드리우면서 점을 찍은 듯 바다위에 일곱의 독배섬을 남겼고, 이 섬들이 하류로 흘러내려온 토사를 막아 모래톱을 형성했으니 평야의 시작이었다. 하늘을 나는 봉황이 가락국 봉림산을 거쳐 대해(大海)로 향하다가 산과 바다와 강이 함께 어울리는 장관에 취하여 그 나래를 접고 둥지를 틀어 김해국제공항을 낳았고 제 살을 깎아 새끼를 치는 어미 마냥 일곱의 산을 허물어 나라의 관문을 이루었다. 지금은 작은 돌산만의 흔적을 남겼으니 칠점산 아래 이 터를 닦은 선인들의 얼을 기리어 이곳에 푯말을 세우도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김해도호부 조에는 "황산강 물이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바다로 들어갔으므로 삼분수(三分水) 또는 삼차수라 하였다고 한다. 양산군 칠점산이 두 갈래 사이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양산군 조에는 "칠점산은 고을 남쪽 44리 되는 곳 바닷가에 있다.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가락국 때 참시선인이 놀던 곳이라 한다"고 적고 있으니 당시에는 칠점산이 양산군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해에 속했던 칠점산은 이제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이다. 아무리 행정 구획상 지명이 변한다 하더라도 이곳이 가락국의 정기를 간직한 곳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할 수 없다.
 
▲ 칠점산의 모양을 이고 서 있는 칠점산비. 칠점건강장수쉼터라는 명패가 붙어 있고, 뒤편으로는 김해국제공항 및 공군부대의 담이 가려져 있다. 이 담 너머가 칠점산이고 앞으로는 수로가 있다.
조선조 중기의 시인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칠점산의 모습을 "나뉘어 세 갈래로 바다에 들어가니 삼분수라 하였는데 달리는 삼차수라고도 한다. 그 물줄기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취량(鷲梁)이며 산에는 일곱 봉우리가 있으니 비취빛 쪽찐 머리나 푸른 소라 같았다. 강물은 넓고 아득하며 흰 모래가 신기루처럼 펼쳐졌다. 그 밖은 푸른 바다로서 남으로 북으로 배가 출몰하며 엇갈려 지나갔다. 하군(河君) 회일(會一)이 전에 세 물줄기와 칠점의 빼어난 경치에 대해 대단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조선조 후기의 시인 조명채(曺命采:1700~1764)는 1748년 일본 통신사로 가면서 김해에 잠시 머무는 동안 다음과 같이 칠점산의 모습과 당시의 사정을 적고 있으니, "옮겨 정박한 곳은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7개의 작은 섬이 있는데 마치 석탑이 항구 안에 흩어져 떠 있는 것 같고, 좌우의 소나무와 삼나무의 비취색 그늘이 물에 거꾸로 서 있었다. 작은 배에 옮겨 타고 7개 섬 사이를 돌아다니니 돌아올 근심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사와 부사가 쪽지를 보내어 뒷산 봉우리에 올라가자고 하였는데, 피차 모두 배를 정박한 뒷산이다. 드디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니, 산봉우리의 형세가 차츰 험준하고 시계(視界)도 널찍하였다. 세 사신이 소나무 밑에 모여 앉아 함께 칠언율시를 지었다. 제술관과 서기 등은 시 지으라는 말을 듣자, '일 났다'고 하였다. 길에서 시를 주고받느라 시를 지을 마음이 이미 싫증났기 때문이다."
 
이만부와 조명채의 묘사를 보면 필자의 설명이 필요 없이 그 옛날 칠점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바다 위에 신선의 고향 삼신산(三神山)인 듯 자리 잡고 있던 칠점산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마지막 한 봉우리가 남아 이곳이 그렇게도 많은 시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칠점산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어 탄식과 함께 옛 칠점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았다는 위안을 준다. 비록 칠점산은 그 모습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우리는 그 옛날 칠점산의 모습을 바라보고 읊었던 많은 시들을 통해 그 감동을 느껴볼 수 있다. 우선 고려 시대부터 조선조 전기까지의 시를 통해 당시 칠점산의 풍광을 상상하여 보자.
 
고려 말 시인 안축(安軸:1282~1348)은 칠점산의 모습과 감동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바다 문 천리에 물이 하늘에 떠 있으니
일곱 점 푸른 봉우리 안개 속에 아득하네
이곳이 바로 금선이 살던 곳
배타고 가는 길 총총히 하지 말게 

海門千里水浮空(해문천리수부공)
七點靑峯杳靄中(칠점청봉묘애중)
此是琴仙捿息處(차시금선서식처)
乘舟且莫過蔥蔥(승주차막과총총) 

   
<안축, 金海七點山(김해칠점산)>  


황산강이 삼차하에서 갈리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너무나 넓어 마치 물이 하늘 위로 떠올라 있는 듯하다. 그 하늘로 떠오른 듯 신비로운 배경 속에 푸른 봉우리 일곱 개가 떠 있다. 시인은 참시선인이 살았다던 이곳의 아름다움에 온 마음을 빼앗겨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 제발 배를 빨리 저어가지 말라고…. 참으로 대단한 찬사다.
 
다음은 고려 말 정이오(鄭以吾:1347∼1434)의 시다.

 

삼분수 가 갈대꽃 흰 눈과 같고
칠점산 앞 단풍잎 가을이로다
그림 같은 배 떴고 퉁소와 북 목이 멘다
여기에 신선 오니 이곳이 김해로구나
 

三分水畔蘆花雪(삼분수반노화설)
七點山前楓葉秋(칠점산전풍엽추)
畵舸中流簫鼓咽(화가중류소고열)
一區仙致是金州(일구선치시금주)
 

   
<안축, 金海七點山(김해칠점산)>  

 
가을이다. 물줄기가 갈리면서 점점이 떠있는 섬들과 만난 시인의 눈에 뜨인 것은 눈처럼 하얗게 핀 갈대꽃과 일곱 개의 점을 물들인 색색의 단풍잎이다. 여기에 아름다운 색으로 치장한 배가 강에 떠있고, 울음인 듯 탄식인 듯 퉁소 소리에 북 장단이 섞이니 그야말로 신선이 오지 않을 수 있으랴? 마지막 구절의 '이곳이 김해다'라는 표현은 칠점산에서 받은 시인의 감동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알 수 있도록 한다.
태종·세종대의 시인 우균(禹均)은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칠점산은 그림 같고 七點山如畵(칠점산여화)/삼차수는 허공에 닿았네 三叉水拍空(삼차수박공)'라고 읊었는데, 그 어떤 시적 장식도 없어 오히려 칠점산의 아름다움에는 더 이상 장식을 가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다음은 허적(1563∼1641)의 시다.

 

칠점이라 올라본지 오래되었고
삼차라 배 띄운지 아득하구나
떠가던 배 풀 돋은 강 언덕에 기대었다가
밧줄로 끌듯 바람 부는 물결 거슬러간다
넓은 들판 차가운 기운에 쓸쓸하구나
가을 하늘 저 먼 허공 고요하여라
강과 바다의 뜻을 따르려 하나
거룩하고 밝은 조정 어찌할 수 없네
 

七點躋攀久(칠점제반구)
三叉臨泛遙(삼차림범요)
行舟依草岸(행주의초안)
牽纜泝風潮(견람소풍조)
曠野寒蕭瑟(광야한소슬)
秋天迥泬寥(추천형혈요)
且從江海志(차종강해지)
無奈聖明朝(무내성명조)
 

   
<허적, 自七點山還 泛舟泝黃山江(자칠점산환 범주소황산강)>  

 
시인은 칠점산에 올라가 풍광을 감상한 뒤 다시 배를 타고 황산강을 거슬러 양산 쪽으로 가면서 시를 읊고 있다. 그는 마지막 두 구절에서 '강과 바다의 뜻을 따르려 하나, 거룩하고 밝은 조정 어찌할 수 없네'라고 읊어 칠점산과 주변의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 떠나고 싶지 않으나 벼슬아치로서 조정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떠나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안타까움의 표현이야말로 칠점산에 대한 지극한 칭송이 아닐 수 없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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