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화는 재미없는 예술 장르일 수 있다. 팝아트만큼 유머가 있는 것도 아니요, 추상화처럼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한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해다. 목판화는 그 모든 것들을 쉽게, '한 눈'에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그 결을 오래도록, 세세히 지켜보는 사람에게만 진가를 보여주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30년 이상의 세월을 목판화에만 매달려온 판화가 주정이(67). 하얀 눈썹과 머리카락, 형형한 눈빛은 언뜻 '괴벽스런 예술가'의 인상으로 다가올 법하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과 자연, 순수예술에 대한 애정이 무한한 사람."
 
주정이는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의 한 산 속에서 살고 있다. 신어산 자락을 굽이굽이 돌다 보면 문득 모과향이 은은히 배어 있는 마당 깊은 집이 나온다.
 
▲ 언덕
지난 1944년 김해시 부원동에서 태어나 17년을 살다가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 작품활동을 했다. 이곳으로 돌아온 지는 햇수로 13년째다. 그러니, 김해에서 보낸 세월이 30여년을 헤아리는 셈이다.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더니,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해서 온 거죠. 작업할 시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사람 안만나는 거? 불편한 점 전혀 없습니다. 얼굴 안보고 이야기 할 때 더 세세하게,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죠. 사람이 만나다 보면 탈이 날 수도 있거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주정이는 문화예술계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후배 미술인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작품을 선뜻 경매에 내놓기도 한다. 오히려 사회와의 소통에 적극적이란 말이다. 지난달 4일에는 '김해 문화예술의 현재와 미래'라는 포럼에 발제자로 나서 나태하고 불공정한 행정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비판을 입에 달고 사는 편이다. 좋게 본다면, 아직 감성이 살아 있어서 그럴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감성이 죽으면 비판 정신도 죽어 버릴 테니.
 
어떤 이들은 그래서 정식으로 시민단체 활동을 하라고 부추키기도 한다. 여기에 대한 답은 단호하다. '그럴 겨를이 없다'고 일축한다.
 
"나는 지금도 대학입시를 앞둔 고3 학생의 심정으로 살아요. 작가로서, 내 작업하는 것만 해도 버겁고, 어디로 가야하나 하는 데 대해 답도 못구했는데 그런 일에 정신을 팔 겨를이 어디있습니까. 그런 건 문화운동가들이 해야지요."
 
▲ 빈 하늘
사실 그는 여전히 갈 길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이는 작품에 대한 그의 확고한 철학 때문이기도 하다. 누리기 위한 것 즉, '향유'만을 위한 작품을 만들지 말 것, 고정된 철학이 아니라 매일 새로워지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작업할 것…. '대중화'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고, '상투성'은 그가 가장 경계하는 언어이다.
 
"창작하는 사람이 누리는 사람을 생각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작품을 만들 수는 없는 겁니다. 대중은,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훈련을 받아야 해요. 그런 과정도 없이 작품을 보고 깨달음을 바로 얻는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이런 예술가적 고집이 지금의 주정이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지난 1973년부터 2009년까지 개인전을 총 6회 개최했고, 부산시립미술관 개관전과 김해문화의전당 개관전 등 총 9번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지난 2005년에는 부산 최초의 민간 주도 미술상인 제1회 '송혜수미술상'을 수상했다.
 
주정이는 요즘 오는 18일부터 내년 2월 중순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부산의 발견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 50점 정도의 작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분량을 모두 완성할 수 있을까? 그는 작품 쪽에 늘 신경이 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영감은 내가 평소에 딛고 사는 땅, 바라보는 하늘 이런 것들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메모를 해두었다가, 시간을 봐서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내가 산 만큼, 딱 나(의 깜냥)만큼 나오는 것이지."
 
▲ 산수유
지난해 5월. 그는 각종 매체에 기고했던 토막글들을 모아 산문집 <적막>을 펴냈다. 책을 보니,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곡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의 목판화에 흐르는 '결'의 내공을, 그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작업실을 둘러보니 한 켠에 책들이 가득하다. 새삼스럽게 책에 대해 물었더니, 좋아하는 작가와 이유가 줄줄 꿰어져 나온다.
 
"얼마전에 어떤 책을 읽는데 작고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은 항상 체험하지 않았거나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쓸 수가 없다고 하셨죠. 거짓 없는 작업을 한 작가라 늘 이를 본보기로 삼고 있어요."
 
어떤 분야든 '원로'의 위치에 다다르면,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듬으며 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껏 자신이 만들어 놓은 어떤 것에 발목이 잡혀 더 나은 길을 찾아 걸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주정이는 그러나 그렇지 않아 보인다. 철학에 관한 그의 '철학'을 듣고 있자니, 주정이는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 그런 거 없어요. 교과서적인 철학은 특히 필요가 없지. 기존의 철학 위에서 다음 단계를 모색해 나갈 때 비로소 나의 존재가치가 있는 거죠. 이것이 현존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고." 



▲ <주정이> 서양화가 김정호가 주정이를 모델로 제작한 판화작품이다.

주정이는..

주정이는 1944년생이다. 17살때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에 네칸짜리 시사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월남전 참전 이후에는 사진의 기록성에 매료돼 사진가로 활동하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70년대 중반부터는 목판화 작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신문 사상 처음으로 부산일보에 목판화로 제작한 연재소설 삽화를 1천40여회 선보였다.
 
2005년에는 20년을 한결같이 한 장르에 매진해온 점과 그 예술적 성취가 매우 높다는 점을 인정받아 제1회 송혜수미술상을 수상했다.
 
2009년 5월에는 각종 신문에 투고했던 글들을 모아 첫 산문집 '적막'을 펴냈다. 현재는 오는 12월 18일부터 내년 2월 중순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부산의 발견전'에 선보일 작품 50여 점을 준비하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작품으로는 <빈 하늘><신어동천> 등이 있다.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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