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촌면 농소리 농소마을 입구에서 마을 안쪽을 바라보면 연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멀리서 보았는데도, 그 품새가 넉넉한 것이 마음까지 푸근해진다. 그 나무에 반해, 수필가 박경용(74) 씨는 농소마을에 집을 구했다. 하루에 한번쯤 들러 책도 읽고, 생각도 정리하는 공간이다. 그가 이끌고 있는 '벨라회(vella, 2001년 9월 창단된 문학·예술 동호회.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12281228)' 회원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넓은 마당은 여름밤이면 무용수들의 야외공연장이 되고, 마당 한쪽에 있는 큰 창고는 여차하면 공연장으로 변한다. 박경용과 벨라회 회원들은 이곳을 '가인정'이라 부른다.

▲ 농소마을의 가인정에 들어서면 포구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넓은 마당과 집 뒤의 대숲이 잠시 시름을 잊게 한다. 이곳에서 수필가 박경용은 가야의 꿈을 꾼다. 박정훈 객원기자 poonglyu@naver.com

농소마을 입구 위풍당당 큰 나무에 반해
6년 전 집 사들여 막걸리 한 말 '헌주'
문학·예술동호회 '벨라회' 아지트 활용
책 읽는 공간과 야외공연장으로 인기

농소마을 앞 버스정류장 맞은편으로 난 골목길을 걸어가노라면 가인정의 포구나무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온다. 수령은 알 수 없지만, 근처에 이만한 나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위풍당당하다. "저 나무에 반해서 6년 전에 이 집을 샀습니다.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았던 임 씨네 종가집이라고 하더군요." 박경용이 농소마을 소망길 111의 24 철대문을 열어주었다. 넓은 마당이 나타났다. 마당놀이 공연 정도는 넉넉히 하고도 남겠다. 그 넓은 마당에 포구나무의 연한 잎새가 절반이나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무 잘 자라라고, 헌주(獻酒·술을 바침)를 한번 했죠. 무용수들이 마당에서 공연을 하고, 막걸리 한 말을 나무 밑둥에 부었습니다. 그땐 마을 사람들이 이 집 마당 가득 찾아왔었습니다. 나무에 헌주하는 광경도 장관이었지요."
 
박경용이 흐뭇한 표정으로 막걸리 한 말을 다 마셨다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대문과 마주보고 있는 살림채 뒤로는 대숲이 있다. 봄날 오후의 바람에 댓잎이 서걱거렸다. 살림채 왼쪽으로 작은 창고가 하나 보였다. "여기 재미있는 게 있다"며 박경용은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옛날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집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누대로 이 우물물을 먹고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마을 아낙들이 이 집에 우물물을 길러 왔을지도 모른다.
 
살림채 안으로 들어서니 큰 방 하나, 작은 방 둘, 마루, 주방이 있다. 큰 방은 박경용이 책을 읽고 글도 쓰는 공간인 듯, 책상이 놓여 있다. 작은 방에는 적지 않은 이불과, 마당에 펴는 자리가 몇 개 보인다. 주방에는 그릇들이 많이 쌓여 있다. 벨라회 회원들이 이 집에서 '일을 한 판' 벌일 때마다 소용되는 물건들인가 보다.
 
박경용은 1939년 서상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김해에서 살고 있는 김해 토박이다. 광복이 되고 6·25 전쟁이 나기 전까지 5년 여 동안 어른들은 좌우 대립으로 시끄러웠겠지만, 그가 기억하는 유년시절은 평화로웠다. 그는 일제가 끝내 말살시키지 못한 조선시대의 정서와 풍습이 김해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합성초등학교 5학년 때 전쟁이 났다. 학교를 미군에게 내어 준 학생들은 동사무소나 수로왕릉에서 수업을 했다. 김해중학교 시절에도 학교는 미군들 차지였다. 중학교 교실은 구지봉 정상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그 무거운 칠판을 구지봉까지 들고 가서 소나무 사이에 걸쳐두면, 그게 교실이었지요. 비가 오면 수업 파하고 집에 가는 겁니다. 얼마나 철이 없었던지, 우리는 비가 오면 좋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2학년이 돼서야 정식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는 부산 동아고등학교 6회로 입학했다. 임수생 시인(국제신문 전 논설위원)이 동기였고, 강남주 시인(전 부경대총장)이 한 해 후배였다. "점심시간이면 후배인 강남주와 학교 담벼락에 나란히 붙어서서, 바이칼 호수며 시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강남주가 2학년 때, 동아고등학교 신문 편집장이 됐는데 나한테 원고 청탁을 했어요." 박경용은 자신에게 처음으로 원고 청탁을 한 사람이 강남주 시인이라며 옛 일을 들려주었다.
 
대학은 서울 경희대 법학과로 진학했다. 소속은 법학과였지만, 그는 영문학과 학생들과 훨씬 친하게 지냈다. 대학 재학 중에 연극반에서도 활동했다. 이런 경험은 그가 후일 수필가로 활동하고, 김해에서 '가인소극장'을 설립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92년 '문학세계'로 등단해 수필가 길
2011년 에세이집 '아, 가야' 펴내
수필가 하길남 "박경용 글은 역사수필"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국제신문 기자로 입사했으나 얼마 안 가 그만두고, 영어교사 생활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하루에도 두어 권 씩 소설책이나 시집을 읽었어요. 그렇게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내가 문인이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습니다. 그런데 작고한 소설가 김성홍 선생과, 지금도 가끔 만나는 김해의 이현우 시인이 나를 볼 때마다 '글 쓰면 되겠다, 왜 글을 안 쓰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던 중 내가 김해로터리클럽에서 만드는 기관지 편집장을 덜컥 맡게 됐어요."
 
편집장 직함을 맡긴 했으나 회원 중 아무도 원고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정해진 발간 일자는 다가오고, 급기야 그는 잡지를 혼자서 메꾸느라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슬슬 쓰다 보니, 이렇게 된 겁니다. 무엇을 쓸 것인지, 장르는 무엇인지 하는 고민도 딱히 없었구요. 문학의 핵심은 시인데, 시를 썼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죠." 그는 1992년 <문학세계>로 등단해 수필가가 됐다.
 
그는 자신이 쓰는 수필을 경수필(미셀러니)이 아니라 중수필(에세이)이라고 설명했다. "에세이는 지적이고 중후한 느낌이 드는 글인데 비해, 미셀러니는 정서적이고 시적인 서정성을 띠고 있죠. 에세이는 신변잡기 식으로 감정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관찰과 통찰력으로 쓰는 글입니다. 글로벌 시대인 지금 선진국의 대학과 사회는 교육과정에서도 에세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경향으로 가고 있어요. 말하자면 논술이 에세이 쓰기라고 할 수 있죠."
 
그의 글을 두고 시인이자 수필가인 하길남 씨는 '역사수필'이라 칭한다. 박경용은 2011년 6월 에세이집 <아, 가야>를 펴냈다. 하길남은 <경남문학 98집>에서 "박경용 수필가가 가야의 전설을 중심으로 무려 21편의 수필을 엮은 것은 나름대로 거기에 따른 적잖은 연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경용은 가야의 조상들이 가진 혼을 오색무지개에 비유한다. "가야의 국제성, 예술성, 고도기술성, 민주성, 배려성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가야는 오늘날 김해에서 살아갈 우리를 위해 이미 오래전에 미래를 준비해두었던 것입니다."
 
<아, 가야>는 그런 가야의 정신을 전하고 싶어 쓴 책이다. "가야사 학자와 향토 사학자들의 연구자료를 토대로 해 짧은 이야기들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삶과 애환과 그 지혜가 담긴 조상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가야 사랑은 끝이 없다. "김해는 우리 민족의 예술이 태어난 땅입니다. '구지가'라는 고대문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음악, 무용, 연극이 함께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 김해에서 살면서, 늘 예술적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 책 읽는 아지트 '가인정'의 방 한 켠에 놓인 책상에 앉은 수필가 박경용.
그는 자신의 이야기보다 가야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가야인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 길, 다시 한번 더 넓은 마당과 포구나무에 눈길이 갔다. 이번 여름에는 박경용과 벨라회 회원들이 가인정의 넓은 마당에서 또 얼마나 재미난 공연과 이야기를 만들어갈까. 부러우면 벨라회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할 일이다.

>> 박경용
수필가. 1992년 <문학세계>로 등단. 1990년 가인소극장 설립. 1995년 김해문협 회장. 1997년 <김해시보> 상임편집위원. 1998년 경남문협 이사. 1999년 경남 예술인상 수상. 2001년 국제 펜클럽 본부 회원. 2001년 벨라회 설립. 2010년 김해시 문화상 수상. 2011년 <아, 가야> 출간. 2011년 김해문학상 수상. 2012년 경상남도 문인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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