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적(1563~1641)은 40구절이나 되는 장시를 지어 당시의 칠점산을 상세히 읊고 있다. 그는 시의 서문에 '(칠점산은) 양산 황산강(黃山江) 대저도(大渚島) 안에 있다. 봉래주인(蓬萊主人)은 바로 동래부사(東萊府使) 윤수겸(尹守謙:1573∼1624)으로 자는 명익(鳴益)인데, 그와 함께 노닐었다'라고 적었다. 윤수겸은 1614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으니, 이 시에서 묘사되고 있는 칠점산은 바로 1614년의 모습이며, 시 내용에서 보면 가을임을 알 수 있다. 시가 워낙 긴지라 여기서는 칠점산과 주변의 풍광을 묘사한 부분만 보기로 하자. 전편을 다 보지 못하여 아쉬운 독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메일로 보내줄 생각이 있으니 연락해주시기 바란다.
큰 모래톱 넓은 물에 이어지기 삼십 리 | 大渚瀰迤三十里(대저미이삼십리) | |
<허적, 遊七點山歌(유칠점산가)> |
지난 호에서 소개했던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칠점산의 모습을 비취빛 쪽찐 머리나 푸른 소라 같다고 하였고, 조명채(曺命采:1700~1764)는 석탑이 항구 안에 흩어져 떠 있는 것 같고, 소나무와 삼나무의 비취색 그늘이 물에 거꾸로 서 있다고 하였다. 이 둘의 묘사와 허적의 묘사를 종합해보면, 칠점산은 비취빛의 삐죽삐죽한 봉우리 일곱 개가 쪽찐 머리나 푸른 소라처럼 이어진 듯 떨어져 섰으며, 위에는 소나무 삼나무 등이 울창하게 섰고, 이것이 바다에 비취빛의 석탑처럼 비쳐있던 모습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가을 물굽이에 고깃배 타고 흥에 이끌려 | 漁舟牽興落秋灣(어주견흥낙추만) | |
<강대수, 七點山(칠점산)> |
갈대 사이로 웅어가 뛰어오른다는 묘사로 보아 시인이 칠점산에서 노닐던 계절은 바로 지금쯤이다. 따뜻한 봄빛에 그동안 벼슬아치로서의 책무를 등한히 할 수 없었던 시인은 모든 것을 풀어헤치고 마음껏 노닐어 본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술에 취해 돌아가는 길이 어두워지는 줄 몰랐다는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강대수는 수많은 관직을 거치고 1641년 잠시 낙향하여 진주에서 살다가, 1652년 전주부윤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가 칠점산에서 노닐었던 것은 이 두 시기 가운데 하나일 터인데, 스스로 늙은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 1652년 이후라고 할 것이나, 늙은이라는 스스로의 표현은 한시에서는 일반적으로 세속의 근심을 잔뜩 겪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어느 시기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벼슬아치로서 겪어야 했던 많은 고민을 모두 풀어버릴 수 있는 놀이 공간으로서 칠점산을 택한 것은 최선이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는 강대수보다 70~80년 뒤 시기 신익황(申益愰:1672~1722)의 시를 보자.
나루터에 말을 매고 사공을 불렀더니 | 渡頭停馬喚蒿工(도두정마환호공) | |
<신익황, 七點山(칠점산)> |
시의 제목은 정확히 '칠점산'이라고 하였으면서도 신익황은 묘사의 초점을 일곱 봉우리에 두지 않고, 주변에 많이 할애하고 있다. 이는 마을에서 배를 타고 칠점산으로 향해가는 그의 시각이 주변에서 점차 칠점산으로 집중되어가서는 다시 주변으로 이동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영상과 같은 효과가 있다. 풍광의 중심에는 칠점산이 있고, 주변 풍광은 이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배경일 뿐이니, 칠점산을 중심으로 배경과 시인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제 조선조 후기의 칠점산으로 가보자.
큰 강에는 모래톱도 없구나 | 大江無洲渚(대강무주저) | |
<황경원, 涉䔉山江 夕陽西眺七點山 世傳旵始彈琴處 (섭산산강 석양서조칠점산 세전참시탄금처)> |
이제 마지막으로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의 시를 감상하고 칠점산을 떠나기로 하자.
강 위 푸른 빛 점점이 기이하고 | 江上靑蒼點點奇(강상청창점점기) | |
<허훈, 七點仙臺(칠점산대)> |
허훈은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친일 성향의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공포하자 항일운동에 나섰다. 1896년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경상북도 안동(安東)·영해(寧海)·영양(英陽)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세력을 응징하는 등 무장항일투쟁을 벌이다가 1907년 세상을 떠났다.
일곱 점의 푸른 점들이 늘어서 있고, 그 위로 검은 구름이 머물러 있더니 밤새 부는 바람에 모두 떨어지고, 칠점산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치열하면서도 아름다운 시인의 삶인 양 칠점산은 검은 구름 속에서도 그와 어울려, 구름이 걷힌 뒤에는 신선의 고향인 양 더욱 아름답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칠점산은 이제 부산시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초선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고, 가락국 거등왕과 참시선인의 전설을 지금까지도 세상에 남기고 있는 칠점산은 가락국 수도인 김해의 서정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