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점산의 현재 모습. 군사시설보호구역 안에 있는데다, 작전 중이어서 지난 4월 26일 공군 5전투비행단 정훈공보실에서 사진을 직접 찍어 제공했다.
칠점산은 김해 사람들과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초선대(招仙臺)와 함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함께 준 최고의 경관이었기에 읊은 시도 무척 많다. 지난 호에 이어서 시대별로 시들을 감상하면서 옛 칠점산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도록 하자.
 
허적(1563~1641)은 40구절이나 되는 장시를 지어 당시의 칠점산을 상세히 읊고 있다. 그는 시의 서문에 '(칠점산은) 양산 황산강(黃山江) 대저도(大渚島) 안에 있다. 봉래주인(蓬萊主人)은 바로 동래부사(東萊府使) 윤수겸(尹守謙:1573∼1624)으로 자는 명익(鳴益)인데, 그와 함께 노닐었다'라고 적었다. 윤수겸은 1614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으니, 이 시에서 묘사되고 있는 칠점산은 바로 1614년의 모습이며, 시 내용에서 보면 가을임을 알 수 있다. 시가 워낙 긴지라 여기서는 칠점산과 주변의 풍광을 묘사한 부분만 보기로 하자. 전편을 다 보지 못하여 아쉬운 독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메일로 보내줄 생각이 있으니 연락해주시기 바란다.
 

큰 모래톱 넓은 물에 이어지기 삼십 리
저 밖으론 큰 강물이 둘렀네
숯돌처럼 바다로 이어진 가락지 같은 강
갈대와 물억새가 푸르고 아득한 가운데
기이한 봉우리 일곱 점을 늘어놓았으니
이어진 듯 우뚝 선 듯 깍아낸 듯도 하네
뒤는 기복 없고 앞은 벋은 데 없고
우뚝 끊기고 솟아 산세가 이어지지 않네
<이하 생략>
 

大渚瀰迤三十里(대저미이삼십리)
其外回環大江水(기외회환대강수)
環江接海平如砥(환강접해평여지)
葭菼荻葦蒼茫裏(가담적위창망리)
中有奇峯列七點(중유기봉열칠점)
或迤或豎或如剡(혹이혹수혹여섬)
後無起伏前無奔(후무기복전무분)
峭截竦擢勢非漸(초절송탁세비점)

 

   
<허적, 遊七點山歌(유칠점산가)>  


지난 호에서 소개했던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칠점산의 모습을 비취빛 쪽찐 머리나 푸른 소라 같다고 하였고, 조명채(曺命采:1700~1764)는 석탑이 항구 안에 흩어져 떠 있는 것 같고, 소나무와 삼나무의 비취색 그늘이 물에 거꾸로 서 있다고 하였다. 이 둘의 묘사와 허적의 묘사를 종합해보면, 칠점산은 비취빛의 삐죽삐죽한 봉우리 일곱 개가 쪽찐 머리나 푸른 소라처럼 이어진 듯 떨어져 섰으며, 위에는 소나무 삼나무 등이 울창하게 섰고, 이것이 바다에 비취빛의 석탑처럼 비쳐있던 모습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 또다른 측면에서 촬영한 칠점산. 사진제공=5전투비행단
다음은 강대수(姜大遂:1591∼1658)의 시로, 칠점산의 풍광보다는 그곳에서의 놀이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가을 물굽이에 고깃배 타고 흥에 이끌려
바다 산에 노니는 늙은이 마음 한창 즐겁다
아름다운 배 잠깐 모래톱 안에 머물렀더니
웅어가 때마침 갈대 사이로 뛰어오른다
몇 년 새 큰 뜻이 모두 허망해지더니
난 후엔 세속 떠난 놀이로 등한하지 못했지
한창 술에 돌아갈 길 어두운 줄 몰랐더니
숲과 물에 잠자는 새 나그네 함께 돌아간다
 

漁舟牽興落秋灣(어주견흥낙추만)
霜意方酣海上山(상의방감해상산)
蘭棹乍留洲渚裏(난도사유주저리)
銀刀時擲荻蘆間(은도시척적로간)
年來壯志渾蕭瑟(연래장지혼소슬)
亂後淸遊未等閒(난후청유미등한)
細酌不知歸路暝(세작부지귀로명)
林臯宿鳥客俱還(임고숙조객구환)
 

   
<강대수, 七點山(칠점산)>  


갈대 사이로 웅어가 뛰어오른다는 묘사로 보아 시인이 칠점산에서 노닐던 계절은 바로 지금쯤이다. 따뜻한 봄빛에 그동안 벼슬아치로서의 책무를 등한히 할 수 없었던 시인은 모든 것을 풀어헤치고 마음껏 노닐어 본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술에 취해 돌아가는 길이 어두워지는 줄 몰랐다는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강대수는 수많은 관직을 거치고 1641년 잠시 낙향하여 진주에서 살다가, 1652년 전주부윤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가 칠점산에서 노닐었던 것은 이 두 시기 가운데 하나일 터인데, 스스로 늙은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 1652년 이후라고 할 것이나, 늙은이라는 스스로의 표현은 한시에서는 일반적으로 세속의 근심을 잔뜩 겪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어느 시기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벼슬아치로서 겪어야 했던 많은 고민을 모두 풀어버릴 수 있는 놀이 공간으로서 칠점산을 택한 것은 최선이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는 강대수보다 70~80년 뒤 시기 신익황(申益愰:1672~1722)의 시를 보자.
 

나루터에 말을 매고 사공을 불렀더니
아낙네가 바람 두려워 않고 배 저어오네
어촌 포구 돛대는 갈대 잎 밖에 있고
주막 촌 울타리가 살구 꽃 속에 있네
산은 일곱 점 별 모양 벌여 섰고
물은 셋으로 갈려 글자 획과 한가지로다
봉래가 그리 멀지 않은 줄 알겠네
취량 동쪽 가로 바다가 하늘에 이어졌네
 

渡頭停馬喚蒿工(도두정마환호공)
江女操舟不畏風(강녀조주불외풍)
漁浦帆檣蘆葉外(어포범장노엽외)
酒村籬落杏花中(주촌이락행화중)
山排七點星形列(산배칠점성형열)
水作三叉字畫同(수작삼차자화동)
卻望蓬萊知不遠(각망봉래지불원)
鷲梁東畔海連空(취량동반해연공)
 

   
<신익황, 七點山(칠점산)>  


시의 제목은 정확히 '칠점산'이라고 하였으면서도 신익황은 묘사의 초점을 일곱 봉우리에 두지 않고, 주변에 많이 할애하고 있다. 이는 마을에서 배를 타고 칠점산으로 향해가는 그의 시각이 주변에서 점차 칠점산으로 집중되어가서는 다시 주변으로 이동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영상과 같은 효과가 있다. 풍광의 중심에는 칠점산이 있고, 주변 풍광은 이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배경일 뿐이니, 칠점산을 중심으로 배경과 시인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제 조선조 후기의 칠점산으로 가보자.
 

큰 강에는 모래톱도 없구나 
흐릿한 속에 혼돈을 담았네
이어진 일곱 봉우리 떠 있고
멀고 멀구나 황산이 멀구나
외로운 언덕 서쪽 기슭에 솟았으니
마늘이 돋는 동산 같기도 하구나
대나무가 그 꼭대기 덮고 있나니
그윽한 가지가 그 위에 무성하구나
신선이 거문고를 타고 있는지
아득하여라 구름 밖 봉우리 
맑은 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아름다운 경관은 참으로 부드럽네
벼슬아치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히 바위굴로 달아나고 싶어라
어찌 헛된 영예를 탐내려 하겠는가
내 성령의 근본을 다듬어보리라  

大江無洲渚(대강무주저)
晦冥函混沌(회명함혼돈)
連綿七峰浮(연면칠봉부)
迢遰黃山遠(초체황산원)
孤丘擢西岸(고구탁서안)
忽如䔉生苑(홀여산생원)
篁竹被其頂(황죽피기정)
幽枝上偃蹇(유지상언건)
羽人彈瑤琴(우인탄요금)
杳杳隔雲巘(묘묘격운헌)
淸音不可聞(청음불가문)
芳景正婉娩(방경정완만)
願脫簪組累(원탈잠조루)
永從巖穴遁(영종암혈둔)
何必貪虗榮(하필탐허영)
斲我性靈本(착아성령본)
 

   
<황경원, 涉䔉山江 夕陽西眺七點山 世傳旵始彈琴處
(섭산산강 석양서조칠점산 세전참시탄금처)>
 


▲ 평강리(平江里) 들판에서 본 하나 남은 칠점산 봉우리(점선 내). 시의 표현처럼 일곱 봉우리가 물 위에 떠 있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사진/ 엄경흠
시의 제목을 보면 시인은 산산강(䔉山江)을 건너가면서 해질녘에 서쪽으로 칠점산을 바라보았다. 산산강은 김해 대동의 동쪽과 부산시 북구의 서쪽인 삼차하에서 갈린 물줄기가 대동 앞으로 흘러나가는 서낙동강의 입구로, 과거 대동 예안(禮安)에는 칠점산 아래쪽 명지도(鳴旨島)에서 생산한 소금을 보관하던 산산창(䔉山倉)이 있었다. 황경원(黃景源:1709∼1787)은 대동 앞쪽의 산산강을 건너 부산의 구포·화명동 쪽 삼차하로 배를 타고 가면서 서쪽으로 칠점산을 바라본 것이다. 해질녘이라 모랫벌인지 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으니 멀리 떠있는 칠점산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제목에서 보듯 시인은 이곳이 참시 선인이 거문고를 타며 지냈던 곳이라는 전설을 듣고 있었다. 그는 칠점산을 경치로서보다는 참시선인의 전설에서 보듯 모든 것을 버리고 은둔할 수 있는 은자의 세계로 생각하고, 이곳에서 스스로를 수양하며 지냈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의 시를 감상하고 칠점산을 떠나기로 하자.
 

강 위 푸른 빛 점점이 기이하고
흘러가는 검은 구름 서로 어울리네
봉래산에 어젯밤 높은 바람 일더니
신선의 바둑판에 흩어져 떨어졌구나
 

江上靑蒼點點奇(강상청창점점기)
流雲螺黛兩相宜(유운나대양상의)
蓬壺昨夜天風起(봉호작야천풍기)
散落仙枰一角棊(산락선평일각기)
 

   
<허훈, 七點仙臺(칠점산대)>  


허훈은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친일 성향의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공포하자 항일운동에 나섰다. 1896년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경상북도 안동(安東)·영해(寧海)·영양(英陽)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세력을 응징하는 등 무장항일투쟁을 벌이다가 1907년 세상을 떠났다.
 
일곱 점의 푸른 점들이 늘어서 있고, 그 위로 검은 구름이 머물러 있더니 밤새 부는 바람에 모두 떨어지고, 칠점산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치열하면서도 아름다운 시인의 삶인 양 칠점산은 검은 구름 속에서도 그와 어울려, 구름이 걷힌 뒤에는 신선의 고향인 양 더욱 아름답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칠점산은 이제 부산시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초선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고, 가락국 거등왕과 참시선인의 전설을 지금까지도 세상에 남기고 있는 칠점산은 가락국 수도인 김해의 서정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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