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스름 뽀얀 국물에 도톰하고 폭신한 황태 살이 더할 나위 없는 깊은 맛을 자아내는 안채의 황태진국. 사진/ 박정훈 객원기자 poonglyu@naver.com
하나의 음식 혹은 식재료가 얼마나 흔하고 발달하였는지는 명칭을 보면 안다. 고도화된 음식일수록 다양한 명칭을 가진다. 명태가 그 중 대표적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생태, 동태, 북어, 노가리로 나뉜다. 날것은 생태, 얼린 것은 동태, 말린 것은 북어, 새끼는 노가리라 한다. 생태는 다시 시기에 따라 봄에 잡힌 춘태, 가을에 잡힌 추태, 겨울에 잡힌 동태, 산란 후에 잡힌 꺽태, 맨 끝물에 잡힌 막물태로 나뉜다. 잡은 방법에 따라서는 낚시로 잡은 것은 낚시태, 그물로 건져 올리면 망태라 하는데 이를 다시 근해에서 잡으면 지방태, 먼 바다에서 잡으면 원양태라 한다. 말린 것도 북어로 그치지 않는다. 물기가 약간 있게 꾸덕꾸덕 말린 것은 코다리, 겨울 찬바람에 노랑노랑하게 말린 것은 황태 또는 노랑태, 기계 건조기에 말린 것은 에프태, 덕장에 걸 때 날씨가 따뜻해 물러지면 찐태, 말리는 도중에 건조대에서 떨어지면 낙태, 하얗게 마른 것은 백태, 검게 마른 것은 먹태, 딱딱하게 마른 것은 깡태, 대가리를 떼고 말린 것은 무두태, 손상된 것은 파태라고 한다. 이밖에도 애기태, 강태, 왜태, 조태, 진태 등 수십 가지 명칭이 더 있다. 하나의 생선에 이처럼 다양한 명칭이 존재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드문 경우에 속할 것이다.
 
이렇게 이름이 다양하고 많이 잡히던 명태가 지금은 씨가 말랐다. 지구 온난화로 바닷물 온도가 급격히 올라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한류성 어종인 명태는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 해에 십수만t씩 잡혔으나 1990년대부터 어획량이 급감, 2006년 60t을 끝으로 2008년부터는 아예 통계에서 잡히지도 않는다. 이러니 국내에서 소비되는 명태는 대부분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 그리고 일본 북해도 등지에서 잡아온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먹는 명태는 '원양태'인 셈이다. 이렇게 수입된 원양태 중에서 많은 양이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와 평창군 횡계리에서 황태로 만들어진다.
 
▲ 본 메뉴가 나오기 전 식욕을 돋우는 콩쌀죽과 다진 마늘·고추 양념.
같은 명태를 말렸어도 북어와 황태는 다르다. 북어는 명태를 '그냥' 말린 것이다. 그냥 말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햇볕과 바람만으로도 족하다. 이렇게 말린 북어는 수분이 빠져나가 부피가 줄어들고 살이 딱딱해진다. 이를 먹기 위해서는 물에 불리거나 홍두깨 따위로 두들겨야 했다. '마누라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두들겨 패야 한다'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담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황태는 밤이면 꽁꽁 얼었다가 낮이면 햇볕에 살짝 녹고, 다시 꽁꽁 얼고, 다시 녹기를 2개월 이상 반복한다. 이러면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에 공간이 생겨 몸이 두툼하면서도 살은 노랗게 변한다. 그래서 황태를 노랑태라 하기도 한다.
 
황태는 함경도 원산의 특산물로 196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없는 '물건'이었다. 함경도나 강원도나 명태가 많이 잡히긴 했지만 강원도는 북어로 만들었고, 함경도 원산에서는 독특한 지형을 이용해 황태를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원산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 원산과 비슷한 자연조건을 찾아 나섰다. 황태를 말리기 위해서는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씨가 두 달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발견한 곳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계곡 입구였다. 이렇게 시작된 용대리 황태의 역사는 60년 남짓 됐다. 지금은 국산 황태의 70% 이상을 생산하며 '황태마을'로 거듭났다.
 
한 마리의 명태가 황태가 되기 위해서는 3개월 이상의 시간과 50명의 손이라는 고단한 작업을 거쳐야 한다. 먼저 원양에서 잡은 명태가 주문진이나 속초, 거진항에 부려지면 배를 갈라 알과 내장을 걷어낸다. 알은 명란젓으로, 창자는 창난젓으로 만들어진다. 손질한 명태는 한계령과 대관령을 넘어 곧장 용대리 덕장으로 옮겨진다. 덕장에 도착한 명태는 현장에서 바로 씻어 '덕'이라는 거치대에 건다. 명태가 덕에 걸리자 말자 꽁꽁 얼어야 하므로 낮 기온이 적어도 영하 15도는 되어야 작업이 가능하다. 지금은 손질한 명태를 얼려서 덕장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작업이 그나마 수월해졌다. 이렇게 2개월 남짓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면서 황태가 만들어진다. 행여 겨울 날씨가 따뜻하거나 늦은 겨울에 비라도 내리면 크게 망친다. 그래서 용대리 사람들은 황태 말리는 일을 하늘과 사람이 '7 대 3'으로 하는 동업이라고 한다.
 
태백산에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3월 초에 거둔 황태가 이제 슬슬 시장에 나올 시기가 되었다. 황태의 노릇노릇하고 폭신폭신한 속살 맛을 느끼기에는 갖은 양념을 발라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굽거나 찜통에서 쪄낸 찜이 제격이다. 하지만 겨우내 매서운 바람과 폭설을 맞으며 깊어진 맛을 봄날에 즐기자면 황태국 만한 것이 없다.
 
<김해뉴스> 창간과 동시에 이 연재를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김해에는 꽤 깊은 맛을 내는 황태국전문점이 있었다. 때를 맞춰 소개해야지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막상 취재를 하자니 문을 닫은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아끼다 낭패를 본 것이다.
 
하지만 그 집 못지 않은 황태국을 맛볼 수 있는 곳이 한 곳 더 있다. 추어탕전문점으로 유명한 구산동의 '안채'가 그곳이다. 안채는 김해에서 김밥전문점으로 유명한 '김밥일번지'의 구윤회 대표가 운영하는 곳이다. 1998년 김밥 노점상으로 시작한 구 대표는 지금은 여러 음식점을 거느린 외식업의 성공신화가 된 인물이다. 안채만 하더라도 삼계점, 구산점, 장유점 등이 있다. 사실 안채는 단순한 식당이라기보다는 외식업의 모범이라 할 만한 곳이다. 메뉴 구성, 원가 관리, 위생 관리, 서비스 등에서 확실히 남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식당을 운영해야 하는지 궁금하신 분은 꼭 한번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
 
▲ 추가 메뉴인 잡채.
안채의 대표 메뉴는 추어탕이지만 안채의 숨은 주연은 황태진국이다. 김해가 추어탕으로 워낙 유명한 동네라 추어탕을 두고 최고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지지만, 황태진국 만큼은 김해에서 최고라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
 
안채의 황태진국은 우선 황태의 품질과 크기부터 예사롭지 않다. 노란 빛깔과 두툼한 살점이 이를 증명한다. 게다가 양도 넉넉하다. 진하게 우려낸 기본 육수가 뽀얀 듯하면서 약간 노르스름한 빛을 띤다. 국 빛을 보고 있노라면 일단 정서적으로 속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른 살점을 들기름에 볶았는지 참기름에 볶았는지는 몰라도 은근히 비치는 기름내도 황태에서 우러난 육수와 궁합이 좋다. 황태에 콩나물과 파 정도가 쓰였고 간도 질 좋은 천일염을 사용해 황태 본연의 깊은 맛을 느끼기에 제격이다.
 
이렇게 기본에 충실하게 만든 황태진국은 말 그대로 '진국'이다. 보드라우면서도 달보드레한가 싶더니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하기까지 하다. 혹한을 견디고 만들어진 황태가 아니라면 뉘라서 이 맛을 낼까 싶다. 흔히들 황태국은 술 마신 다음날 해장용으로 좋다고들 생각하는데 이는 절반만 옳다. 황태진국은 전날 쌓인 술독뿐만 아니라 며칠째 몸속에 잠복해 있던 술기운까지 모조리 해독해주는 신통한 음식이다. 그러니 굳이 해장이고 말고 따질 것 없이 수시로 먹어도 좋은 음식이다.
 
▲ 추어탕 전문점으로 유명한 안채의 진맛은 황태진국이다.
굳이 황태진국을 찾아 안채까지 갈 형편이 안된다면 집이나 사무실에 황태포 한 봉지 정도는 비치해 두는 것이 좋다. 컵라면을 먹을 때 황태포를 잘게 찢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예상치 못한, 기막히게 개운한 황태라면을 경험할 수 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최근에는 중국에서 말린 황태도 상당량 유통된다. 원산지 표기법상 러시아산 명태라고만 표기하면 되기 때문에 구분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황태포를 구입할 때는 원산지뿐만 아니라, 강원도에서 말린 것인지 아닌지도 꼼꼼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메뉴:황태진국(7천 원)
▶위치:김해시 구산동 280-10
▶연락처:055-327-4406





박상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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