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전문미술학교 졸업 후 부산 정착
미군 부대 취직해 '아티스트'라 불려
화장품·비누·소주·타이어 등 망라
평생 상품 디자인과 홍보 포스터 제작


달력에는 표기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2일은 '디자인의 날'이다. 우리나라에 디자인 교육이 태동하고 산업디자인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다. 1966년에 한국디자인센터(현재 한국디자인진흥원)가 설립되고, 다음 해에 제1회 대한민국상공전람회(현재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가 개최됐다. 산업디자인 활용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한 정부에서는 1994년부터 매년 5월 2일을 '디자인의 날'로 선포했다. 이번 주는 한 세대 전에 디자인 일을 했던 정복근(85·내동) 씨를 만났다.
 
정 씨는 김해의 수채화가 정원조 씨의 부친이다. 평생 상표와 홍보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일로 살아왔다. 그는 한 세대 전 인쇄업계 종사자들에게 전설로 기억되고 있는 부산·경남 최고의 도안사였다. 당시에는 디자이너를 도안사로 불렀다고 한다.
 
정 씨는 일본 교토전문미술학교를 졸업했다. 6·25 전쟁이 난 직후인 1950년 10월에 귀국해 부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스물 한 살 청년이었던 그는 당시 부산 서면 근처에 있던 하야리야 미군 부대에 취직을 했다. "미군이 주문하는 포스터도 그리고, 부대 안 시설에 페인트로 벽화도 그렸어. 나 말고도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미군들이 우리를 아티스트라고 불렀지. 예술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다른 민간인들보다는 좀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던 거야."
 

▲ 부산·경남 최고의 도안사였던 정복근 씨가 수채화가인 아들 정원조 씨의 그림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며 껄껄 웃고 있다.
미군부대로 출근하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조방(일제강점기 때 부산 부산진구 범일동에 있던 '조선방직'을 줄인 말로 지금까지 지명으로 쓰인다) 앞에서 국군에 징집됐다.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인근 한 초등학교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나갔다. 2008년에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제대 후, 다시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그는 부산 중구 대청동 거리에 있던 인쇄소 '아카데미'에서 도안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전처럼 전성기를 누리지는 못하지만, 중구 대청동, 중앙동 ,동광동 일대는 부산과 경남의 주요 인쇄물들이 밀려들던 '인쇄의 메카'였다. 당연히 도안사를 구하고자 하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디자인을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은 드물었다. 정 씨는 그들이 찾던 사람이었다. "아카데미에 입사시험을 치르고 합격해 도안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 실력도 인정받았고, 스카우트 제의도 여러 번 받았고, 회사도 옮기고, 평생 재미있게 일했지."
 
예나 지금이나 상품 디자인과 홍보 포스터를 제작하고 그 중 하나를 회사 대표가 최종 결정하는 방식은 비슷했다. 대신 예전에는 큰 회사에서 의뢰를 받아 도안사에게 일을 맡기고 도안비를 지불하는 중개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개인이 앞다투어 찾아오는 도안사가 정 씨였다. 그가 작업한 도안은 어김없이 회사 사장들의 마음에 들었다.
 
중년 이상 세대들이라면 정 씨가 도안한 작품이 인쇄된 물건을 한 번쯤은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평화유지라는 회사에서 만든 화장품과 비누의 포장 도안을 했고, 금박인쇄를 한 인삼케이스 도안도 해 봤어. 무학과 대선, 두 회사의 소주병 앞에 부착된 상표 디자인도 내 작품이었지. 국제, 동양 등 부산의 큰 고무공장에서 사용한 홍보 포스터 작업도 많이 했고. 지금까지 기억나는 건 흥아타이어 홍보 포스터야. 요즘처럼 성능 좋은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라, 그림으로 타이어를 실제와 똑같이 그려냈지."
 
정 씨가 한창 일하던 시기, 그가 받은 도안비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가 작업한 2절 크기의 포스터 한 장의 도안비는 3만 원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2천 700원이었다. "남들과는 차별되는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걸 인정받았던 거지. 그런데 어느 날 도안 중개인이 도안비도 안 주고 도안부터 가져가겠다고 엉터리 같은 제안을 해서, 며칠 작업한 도안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린 적이 있어. 중개인이 찢어진 조각을 들고 뒤늦게 안타까워하더군. 내가 노력해 만든 작품을 이용해 못된 궁리를 하는 게 뻔히 보여서 화도 났고, 그 때는 내가 최고로 잘 나갔으니까 자신도 좀 있었고…."
 
인터뷰를 마칠 즈음 <김해뉴스>의 제호 디자인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85세의 전직 도안사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같으면, 김해라는 글자보다 뉴스를 작게 하겠어. 대신 뉴스 글자 두께는 더 두껍게 하고 싶어. 김해는 김해대로, 뉴스는 뉴스대로 돋보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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