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척산 시루봉 오르는 길에 있는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본 석룡산과 금동산 줄기.
신록이 푸르다. 모든 생명들은 한창 자신들의 식솔을 거느리고, 일가를 이루며 봄을 지나고 있다. 들풀 한 잎조차도 서로 군락을 이뤄 수풀을 이루고, 나비 떼들도 나풀나풀 짝을 지어 날아다닌다. 앞산에서 새소리 울리니 뒷산 새가 화답하듯 뒤따라 지저귄다. 허리 굽혀 발치에는 개미 떼들 꼬물꼬물 줄을 지어 제 집으로 드나들고 있다.
 
이번 산행은 푸른 생명력으로 한창 봄 몸살을 앓는 무척산 지맥의 시루봉과 592m봉을 오른다. 흔히들 무척산을 식산(食山)이라 부르는데, 시루봉은 그 식산의 그릇 쯤 되는 곳이다. 생긴 것이 마치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이다.
 
생림 사촌에서 상동 여차를 잇는 여덟말 고개를 들머리로 하여 삼각점, 시루봉을 거쳐 사거리 갈림길 이정표에서 423m봉을 거쳐 592m봉에 올랐다가, 다시 사거리 갈림길 이정표로 내려와 하사촌으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여덟말 고개에서 바로 산길을 따라 오른다. 이미 산속은 푸른 풀내음으로 진동을 한다. 길도 편하고 날씨도 화창해 봄 산행으로는 안성맞춤이다. 모든 나무들이 새순을 내느라 제각각 분주하다.
 
무덤을 지나 낮은 간벌이 잘 된 언덕을 넘으니 시야가 바로 터진다. 나전농공단지가 눈 아래로 보이고, 나전고개가 길게 이어져 보인다. 멀리 작약산도 앉아 있다. 근처에 삼각점 하나 서 있다. 해발 234m.
 
삼각점 주위로는 온통 고사리밭이다. 고사리들이 세상을 향해 움켜쥔 두 손을 펴 보이며 제 운명을 가늠하고 있는 듯하다. 칡넝쿨도 뒤질세라 보드라운 순을 피워내느라 안간힘이다. 계속되는 푸른 풀밭으로 평화로운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언덕을 하나 넘으니 잘 조성된 유택 몇 개 보인다. 부드러운 풀 잔디가 잘 조성되어 있고, 그 사이로 알록달록 올망졸망 앞다투어 피어나는 야생화들로 꽃밭을 이루고 있다. 그야말로 야생화 천국이다.
 
보라색의 각시붓꽃과 제비꽃이 덤불을 이루고, 삐죽이 대를 올리며 하얀 꽃술을 올리는 옥녀꽃대, 온 풀밭을 노랗게 물들이는 양지꽃까지 색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군데군데 고사리도 통통한 줄기를 뻗고 있다. 따뜻한 햇볕에 게으름이 동해 잠시 풀밭에 눕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한가로이 지나가고, 바람이 살짝 머리칼을 스치며 간다. 다사로운 햇볕이 감미로운 시간이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배가 부른 절정의 여유로움. 그래, 이곳이 식산(食山)의 그릇, 바로 시루봉(278m)이 아닌가? 423m봉으로 오르다 보면 시루를 엎어놓은 형상이 보일 것이다.
 
한참을 시루봉 풀밭에서 봄과 함께 노닐다가 다시 길을 향한다. 잠시의 내리막. 제피향이 얼핏얼핏 나그네를 따르고, 길섶으로 원추리 군락이 풍성하니 펼쳐진다. 곧이어 둥글래 군락에는 하얀 방울 같은 꽃봉오리들이 조랑조랑 달렸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딸랑딸랑 앳된 종소리가 날 것만 같다.
 
갈림길 사거리에 도착한다. 무척산과 하사촌, 여덟말 고개 이정표가 선명하다. 423m봉으로 향하는 계단 길을 오른다. 길은 곧바로 봉우리 정상으로 향하는 듯 직선으로 뻗어 비탈을 이루고 있다. 길 주위로 연달래꽃 군락이 분홍색 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다. 철쭉꽃처럼 생겼지만 꽃잎이 연분홍빛이라 연달래라고 한다.
 
▲ 멀리서 바라본 시루봉 전경.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식산(食山)의 그릇쯤 되는 곳이다.
한 소끔 숨을 다스릴 때쯤 전망바위가 나온다. 석룡산의 느긋한 능선과 성숙한 연인의 봉긋한 가슴 마냥 부풀어 오른 시루봉이 조망된다. 시루봉은 푸른 젖이 흘러넘칠 것 같이 풍성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맘때의 자연은 모두 '대지의 어머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철탑을 개선문처럼 지나간다. 오르는 길이 편안하다. 급경사지만 시원한 바람이 등을 떠밀고, 주위의 푸근한 풍경이 지겹지 않게 계속 펼쳐지는 길이다. 한참을 오름세를 유지하며 오른다. 오를수록 길은 굵은 모래흙으로 뒤덮여 미끄럽다. 그 길을 지그재그로 오른다.
 
서서히 전망이 트이면서 산 아래의 나전공단이 널찍이 보인다. 공단 주위로 낮은 산 몇 개, 새로운 공장부지로 쓰이는지 벌겋게 제 속살 드러내며 깎여나가고 있다. 김해 사람을 닮아 넉넉한 산들이 '개발'이란 명목 하에 그렇게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현장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만다.
 
▲ 제단처럼 쌓여 있는 돌탑.
숨을 고르고 다시 오르자니 철쭉군락과 연달래 군락이 조우한다. 그 밑으로 각시붓꽃이 발걸음마다 사람을 반긴다. 좀 더 오르자 암벽이 보이고 그 앞으로 제단처럼 돌탑 군들이 서 있다. 돌탑 앞에서 갑자기 바람이 터진다. 참나무 잎사귀 사이로 바람소리가 물길 흐르듯 '쏴~쏴~' 산봉우리 쪽으로 몰려온다.
 
바위의 나이처럼 그 옆에 선 굴참나무도 오랜 세월을 견뎠는지, 나무껍질 굴피에 깊은 세월의 흔적이 패여 있다. 암벽의 검은 돌이끼와 함께 무척산 지맥의 세월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나 바람이 거셌을까? 이곳 소나무들은 온전히 뻗은 것이 하나도 없다. 거의가 가지가 휘거나 부러졌다. 모두들 세찬 바람의 발길 따라 옆으로 뒤틀리고 아래로 꺾이며 삶의 굴곡을 제 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나그네들은 거센 바람 앞에 서면 경건해진다. 제 인생의 다음을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파를 탈 것인지, 아니면 맞받을 것인지, 찰나의 결정이 제 삶의 전부를 '도박'처럼 '올인' 해버리는 순간인 것이다.
 
다시 전망바위에 선다. 눈앞이 온통 산과 산이다. 석룡산과 함께 멀리 금동산, 신어산 줄기가 보이고, 여덟말 고개의 도로도 얼핏 비친다. 온 산이 붓으로 수채화를 그린듯 연두색, 노란색, 진초록의 점들로 꾹꾹 찍어놓았다. '초록이 동색'이라지만 엄연히 제 색이 있음을 산에서나마 느끼게 된다. 이렇듯 초록의 산들은 눈이 시리게 시원하게 사람의 속을 뚫어놓는다. 오로지 시야를 가리는 것은 하늘을 향해 네 활개 펴고 뻗어 오른 소나무와 연두색 절정인 참나무 이파리뿐이다. 그 사이로 풍뎅이 한 마리 햇빛 받아 반짝이며 날아가고 있다.
 
423m봉을 지나 592m봉으로 향한다. 잠시 호젓한 오솔길을 걷는다. 길을 따라 나무들이 우거지고, 그 가지 사이로 햇살이 숲을 파고든다. 바람도 살짝 부는데 발걸음이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푸근한 길을 그저 즐겁게 만끽하면서 걷는 것이다.
 
▲ 세찬 바람과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소나무의 위용.
곧이어 무척산 오르는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크게 휘돌아 거슬러 돌아드니 592m봉 정상이다. 주위는 키만큼 자란 진달래나무들이 도열해 있고, 양지 바른 곳에 파란 소사나무들이 깊은 잎맥의 이파리로 멀리 신어산을 가리키고 있다.
 
무척산 줄기와 신어산 줄기가 만나는 곳, 구불구불 영운리 고개가 넥타이 풀어놓은 것처럼 길을 내며 아스라하다. 김해를 대표하는 산들의 만남. 그들이 악수하는 곳에서 나그네는 하염없이 앉아있는 것이다.
 
길을 내린다. 터덜터덜 봄볕 받으며 걷는 길이다. 사거리 갈림길 이정표에서 하사촌 방향으로 향한다. 짙푸름 속에 파묻혀 길을 내리는 것이다. 숲은 온통 생명의 환희로 가득 찼다. 떡갈나무는 제 큰 이파리를 흔들어 사람을 반기고, 곳곳에 고사리들이 두 팔 벌려 박수를 치고 있다. 갖은 새소리 지저귀고, 꿩 한 마리 퍼드덕~ 계곡 쪽으로 날아간다.
 
계곡의 물소리를 나무다리로 건너자 꿩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좁은 오솔길을 지나고 산죽 길을 빠져나오니, 난데없이 수탉이 홰를 치며 크게 운다. 하사촌 날머리에 도착한 것이다.
 
날머리 근처에는 몇몇 그림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평화롭게 모여 있다. 모두 정원을 아름답게들 꾸며놓았다. 함박하니 짙붉은 작약꽃이 한창이고, 그 아래로 진분홍 등불을 켜놓은 듯 지면패랭이꽃(꽃잔디)이 정원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다. 박태기 꽃이 튀밥 튀기듯 올망졸망하고 라일락꽃, 자목련도 난리가 났다.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 대궐'이다.
 
그렇게 마음 가득 꽃 한 다발 담고 오는 하산 길은, 그저 풍요롭고 기꺼운 길이다. 가벼운 발걸음 속에 온 산의 마음이 다 담겨져 있는 것이다. 멀리 하사촌 밭둑의 유채꽃들이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그네의 하산을 반가이 맞이하고 있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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