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이 넓은 칼국수와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양념장이 고명으로 올린 각종 채소와 어우러져 아삭한 질감과 씹는 재미를 더한다.
다른 업종도 마찬가지지만 식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입지가 중요하다. 그러니 식당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장소를 찾기 위해 발품을 팔기 마련이다.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비단 개인 창업자들뿐만 아니라 유명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의 패스트푸드 업체인 M사의 경우 신규 매장의 입지를 선택하고 이를 관리하는 임원의 직급이 부사장이다. 파워도 막강하다.
 
너도나도 좋은 입지를 원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최적의 장소는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항상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다.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때문에 정착된,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관행이 바로 '권리금'이다.
 
일반적으로 권리금은 시설권리금, 영업권리금, 지역권리금(바닥권리금)으로 구분 된다. 시설권리금은 말 그대로 인테리어 비용이나 비품, 집기 등을 환산한 금액이다. 영업권리금은 고객 수, 인지도 등 무형의 가치를 환산한 금액이다. 영업 기간이 오래되고 고정 고객 수가 많은 경우, 영업권리금은 때때로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바닥권리금은 입지, 상권, 유동인구 등을 토대로 형성되는 권리금이다. 소위 '식당의 입지'를 논할 때는 바닥권리금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유동 인구와 잠재 고객의 수에 따라 바닥권리금은 적게는 수백 만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 대저 시장분식의 비빔칼국수
바닥권리금이 억대를 넘는 장소에서 식당을 하는 경우, 음식 자체는 주된 고려 사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와 시스템이다. 그래서 바닥권리금이 높은 곳일수록 아르바이트 직원으로도 운영이 가능한 유명 브랜드 혹은 프랜차이즈 외식업체가 몰린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바닥권리금은 때때로 향토음식과 지역의 독특한 식문화를 파괴하는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권리금의 위력을 보기 좋게 뒤집어 엎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자가용의 대중화와 블로그의 활성화 덕분이다. 열성적이고 부지런한 한국의 블로거들은 '어떻게 이런 곳까지…' 싶을 정도로 꼭꼭 숨은 식당까지 기어코 찾아내고야 만다.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일부러 찾아가도 좋을 맛집'으로 둔갑한다. 아이템에 목마른 언론이 이를 그냥 둘 리 없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유명세는 증폭된다. 자가용이 있으니 거리와 시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먼 길을 다녀왔으니 '인증샷'을 남기는 것은 기본. 이제는 모바일까지 가세해 소문이 퍼져간다. 가히 기호지세(騎虎之勢)의 형국이다. 일단 이런 선순환 구조에 접어들면 억대의 바닥권리금 따위는 부럽지 않은 상황이 된다.
 
물론 이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하지만 좋은 입지만이 성공을 보장한다는 업계의 오랜 관행이 깨지고, 그로 인해 외식문화가 보다 다양해질 수만 있다면, 이러한 사례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부산시 강서구 대저2동에 있는 '시장분식'이 이에 꼭 맞는 사례일 것이다. 이 식당의 입지는 한마디로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럼에도 다들 어떻게 알고 찾아 왔을까 싶을 정도로 하루 종일 붐빈다. 점심시간에는 자리가 없어 기다리기 일쑤다. 그렇다고 메뉴라도 특별하냐, 고작 칼국수다.
 
부산-김해경전철 덕두역에 내리면 대저2동 덕두마을이다. 관제탑이 눈앞에 보일 정도로 공항과 가깝다. 김해공항 개장과 함께 배후 상업지역으로 개발되면서 잠시 활기를 띠기도 했었다. 더 이전에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구포장과 맞물려 대저지역을 먹여 살렸던 덕두장으로 번성했던 동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았다. 말끔하게 정비된 덕두시장 역시 활기를 찾아보긴 어렵다. 그 시장을 끼고 돌면 맞은편에 시장분식이 보인다.
 
▲ 선지칼국수.
그럼에도 시장분식이 유명해진 것은 공항과 관계가 깊다. 한때 이 식당은 항공사 여승무원들의 단골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세련된 항공사 여승무원들이 즐겨 먹는 칼국수라니 솔깃할만 했을 것이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손님들로 꽤 붐볐다. 하지만 실제 승무원을 목격했다는 사람은 드물었다. 김해공항에서 꽤 오랫동안 근무하고 있는 지인에게 진상을 확인해 봤다. "가끔 승무원들이 가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공항에 근무하는 직원과 인근 공군부대 군인들이 더 많이 찾는 집"이라고 했다. 그래서 주변 단골들에게는 '공항칼국수'라는 별칭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소문이 과장된 것임이 분명한데도 시장분식이 여전히 붐비는 것은 아름다운 여승무원의 부재를 잊게 할만큼 특별한 비빔칼국수 덕분이다. 일단 콩나물, 무, 부추, 당근, 김 등의 고명을 가득 올리고, 그 위에 그냥 고추장이 아닌 비법 양념장을 넉넉히 뿌렸다. 생김새로만 보자면 영락없는 비빔밥이다. 그런데 이걸 비비면 실타래 마냥 엉켜있던 칼국수가 정체를 드러낸다. 여느 칼국수 보다 넓고 굵은 면이다. 올해로 79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면을 뽑고 있는 김우만 사장님의 솜씨다.
 
▲ 유일하게 밑반찬으로 곁들여지는 배추김치 맛은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다.
시장분식의 비빔칼국수는 여러모로 고민을 많이 했고 내공이 깊은 음식이다. 우선 칼국수의 폭이 넓고 양념장의 농도가 묽어 면과 양념이 잘 어울린다. 양념장은 맵고 자극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달짝지근하고 고소하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면발은 고명으로 올린 각종 채소의 아삭한 질감과 만나 씹는 재미를 더한다. 또한 이는 밀가루 면만으로는 자칫 부족해질 수 있는 영양소를 보충해 줌으로써, 아쉬움 없는 한끼 식사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거기에 비빔칼국수를 시키면 독특하게 뚝배기에 담긴 선짓국 한 그릇을 함께 내 온다. 양념이 과하지 않아 담담하면서도 개운한 선짓국 또한 비빔칼국수 못지 않게 각별한 맛이다. 결국 제각각의 완성도가 높은 칼국수와 선지국이라는 독특한 조합이 먼 길을 달려온 고객들로 하여금 '별미'라는 시장분식만의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독특한 조합은 하나 더 있다. 시장분식에서는 개운한 선짓국에 밥을 말기도 하지만 칼국수를 말아내기도 한다. 선짓국에 그냥 국수도 아닌 칼국수라니! 이 또한 예상을 뛰어 넘는 조합이다. 선지와 건더기의 양이 푸짐해 국물이 금방이라도 사발을 뛰쳐나올 기세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고민하듯, 시장분식에서는 언제나 비빔칼국수냐 선지칼국수냐를 고민하게 된다.
 
▲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저 시장분식은 외형만큼이나 맛 또한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시장분식을 처음 방문한 것이 십수년 전이다. 식당 꼴도 음식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전혀 없다. 심지어 유일하게 곁들여지는 배추김치 맛 또한 여전하다. 어쩌면 이리도 한결같을 수 있을까 싶다. 아마도 한눈 팔지 않고 한 우물만 파겠다는 원칙과 후미진 곳까지 일부러 찾아와 주는 고객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이런 원칙과 의리 앞에서 수억 원의 권리금이 붙는 최적의 입지 따위는 그저 요란한 수식어에 불과할 따름이다.
 
▶메뉴:비빔칼국수(6천 원), 선지칼국수(5천 원)
▶위치:부산시 강서구 대저2동 1934-3
▶연락처:055-973-8735





박상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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