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인 고위화(33) 씨가 최근 김해중부경찰서 앞에서 외국인 인권보장을 위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 지났다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봄은 아직 먼 얘기로만 들린다. 김해이주민인권센터. 10평 남짓한 사무실 한켠에 놓인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어딘가에서 '억울한' 상황을 겪은 외국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가운데 좁은 사무실을 분주히 누비는 한 남성이 눈에 띈다. 바로 중국인 고위화(33·내동)씨다.

그가 이 곳에서 일한 지는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초짜 활동가'인 셈이다. 그러니 아직 배울 게 많다. 외국인들을 위해 통역을 하려면 한국어는 기본이고 외국인노동자 관련법도 줄줄이 꿰고 있어야 한다. 부인 훈정(37) 씨와 결혼 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위화 씨의 한국말은 유창하지 않다. 그런 위화 씨에겐 모든 게 산 넘어 산이다.

그래도 위화 씨는 늘 의욕에 차 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외국인들을 보면 그는 몸보다 마음이 앞섰다. "도와주고 싶은데, 아직 제 능력이 모자라는 걸 느낄 때마다 진짜 속상해요." 김해이주민인권센터에는 한달 평균 상담건수는 60~70여건에 달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인권보호'는 유독 외국인들에게만 사치스러운 일로 여겨진 탓이다. 이럴 때마다 위화 씨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현재 이곳에 밀려드는 외국인 민원은 갈수록 늘어가지만 김형진 대표 혼자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도 얼마 전까진 생림면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였다. 하지만 그가 김해이주민인권센터 활동가로 나서게 된 데는 아내 훈정 씨의 영향이 컸다.

훈정 씨도 이곳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다. 절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들이 다니던 교회에서 2008년 중국인들이 폭행 시비에 휘말리자 김 대표가 도움을 준 게 인연이 됐다. 그 후 2009년부터 훈정 씨는 간사로 활동했고, 위화 씨는 그런 아내를 보며 생각했다. "인생은 짧다는데 기계적으로 돈만 버는 건 어느 순간 의미 없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나이가 들었을 때 정말 부끄럽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지난 7일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릴레이 1인 시위에도 참가했다. 지난 달 15일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둔기로 폭행당했음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출입국사무소에 넘겨진 데 대한 것이다. 그는 김해중부경찰서 정문에서 "SHOW 하지 말고 기본만 하자 제발! 인권말로만 NO! 제발 기본만 부탁이다." 라는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조금이나마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아직 '초짜 활동가'에겐 서툴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위화 씨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졌다.

그런 위화 씨 뒤에는 아내가 큰 힘이 됐다. 인터뷰 도중 아내의 사진을 보고 "우리 부인 진짜 예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엔 아내 사랑이 가득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툰 그에게 훈정 씨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일러줬다. 위화 씨에게 아내 훈정 씨는 큰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그는 꿈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가장 먼저 '아내와 함께 여행가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 위화 씨가 훈정 씨도 밉지 않은 눈치다. 하지만 위화 씨의 꿈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더 많은 외국인들의 인권을 찾아 주기 위해 더 많이 공부하고 경험을 쌓을 거예요. 그게 저의 또 다른 꿈이에요."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