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사군자(四君子)'이다.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십군자(十君子)'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사군자나 십군자는 생태적 속성이 고결한 식물을 덕과 학식을 갖춘 군자에 비유한 것이다. 사군자 즉, 이른 봄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 멀리까지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난초, 늦은 가을 첫 추위를 이겨내며 피는 국화, 추운 겨울 푸른 잎을 틔우는 대나무 등은 군자의 덕과 절개를 상징한다. 여기에 연꽃, 모란, 목련, 파초, 포도, 소나무 등 육군자를 더해 십군자라 한다. 연꽃은 진흙 속의 깨끗함을, 모란은 화려한 행복감을, 꽃봉오리가 늘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는 목련은 충성을 의미한다. 파초는 한 여름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열매를 내어주는 덕을, 포도는 다산과 풍요로움을, 소나무는 북풍한설에도 꺾이지 않는 꿋꿋한 절개를 뜻한다. 옛 문인들은 이 열 가지 식물의 특징을 닮고자 했고, 그런 까닭에 동양화 특히 남종문인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사군자와 달리, 십군자를 그리는 화가는 점점 줄어들어 그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상태다.

동상동에 있는 자그마한 절 화응선사의 주지 묘각 스님(67)은 십군자를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불화단청 이수자로서, 국내 최초로 한국식 불화를 발표했다. 부처가 성불한 모습을 그린 '고행도'로도 유명한 화가이다. 오는 17일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화응선사를 찾아가 봤다.

화응선사는, 잘 살피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갈 정도로 작고 소박한 절이다. 불당 옆 생활공간인 요사채의 작은 방은, 스님이 그림을 그리거나 불자 혹은 손님을 맞는 곳이다. 가까이 두고 읽는 책들과 화구들로 꽉 차 있다.
 
만봉스님·박익준에 불화·남도묵화 배워
선암사 말사 대각암 주지 시절
우리나라 최초 '한국식 불화' 그려 화제
부처 성불 모습 그린 '고행도'도 유명
"십군자 익히면 모든 그림 필법 생겨"


묘각 스님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6세 무렵 아버지에게 그림책을 갖고 싶다고 졸라댔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6·25 전쟁이 막 끝난 뒤라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어린이용 그림책이 없었다. 하도 졸라댔더니 아버지는 그냥 가지고 놀라며 화투를 구해주었다. 그에게 화투는 48장의 작은 그림책이었다. 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며 애지중지 아꼈는데, 어느 날 한 장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화투장 대신 두꺼운 종이를 구해 그림을 그려서 48장을 맞춰 놓았어요. 그걸 본 형이 '나도 부모님도 깜짝 놀랐다'고 말하더군요. 6세 짜리가 어떻게 그렇게 기억을 되살려 똑같이 그려 놓았는지 놀랐다고 하더군요. 보고 그린 것도 아닌데 똑같이 그렸다고…."
 

▲ 화응선사 요사채의 작은 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묘각스님이 십군자와 불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나래 skfoqkr@
일찌감치 재능을 보였지만, 부모는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탐탁잖아 했다. 돈 안 되는 그림 그려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순천은 물론 호남 전역을 대상으로 한 사생대회나 반공포스터대회에서 1등상을 밥먹듯 탄 그였지만, 부모의 반대 때문에 상을 받아도 집에 가져가질 못했다. 그는 부모 몰래 그림을 그려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크레용이나 도화지 등은 담임 교사 서랍에 보관돼 있다가 미술시간에 사용됐다.
 
그의 그림 솜씨는 미술 교사들도 감탄케 했다. 중학교 때는 한 미술 교사가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의 부모에게 "아들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니 미술지도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 집에서 조금만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급기야 "나에게 양자로 달라"고까지 말했으나, 부모는 끝내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결국 이렇게 승려화가가 된 걸 보면 전생에 그림과 인연이 있었던 게지요." 옛 일을 추억하던 묘각 스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지나간 전시회 팸플릿을 보니,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에 전시회 축하 글을 보내 온 게 눈에 띄었다. "공수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지요. 당시 태권도가 군에 보급됐는데, 공수부대원들이 각 부대에 시범을 다녔습니다. 제가 22세였는데,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발탁돼 박근혜 대통령과 근영, 지만 형제의 경호요원이 됐습니다. 박 대통령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경호를 맡았던 인연이 있지요."
 
그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들어섰을 때, 뜻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호원 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출가를 한 것이다. 선무도 고수인 부산 범어사 청련암의 고 양익 스님, 경주 골굴사의 적운 스님 등의 문하에서 무술과 불도를 배웠다. 그는 순천 선암사에 승적을 두고 있다.
 
▲ 묘각스님이 늘 곁에 두고 사용하는 붓에서도 묵화의 향기가 느껴진다.

묘각 스님은 출가한 뒤 불화와 십군자를 본격적으로 익히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불화의 거장인 금어 만봉스님(1910~2006)에게 불화를, 시경 박익준 선생에게 남도 묵화를 사사했다. 박익준 선생은 조선 말기 문관으로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1808~1893)와 그의 손자인 남농 허건(1907~1987)의 맥을 잇는 사람이다. 묘각 스님은 나아가 무형문화재 제48호인 불화단청도 이수했다.
 
묘각 스님은 선암사의 말사인 대각암 주지 시절,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식 불화를 그렸다. 대부분의 절에서 우리가 보는 그림 속의 인물들은 중국식 의상을 입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 전통의상으로 바꾸어 그린 것이다. "동남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각 나라의 불화를 보았는데, 모두 그 나라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더군요. 불교가 전파됐을 때 각 나라와 민족의 특색을 억누르지 않았던 거지요. 우리나라만 중국 불화를 천년이 넘도록 모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전통과 문화의 우수성을 불화에 적용했지요."
 
▲ 하동군 칠불암 아자방에 소장돼 있는 묘각스님의 '고행도'.
그가 그린 한국식 불화에서는 신장(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한복을 입고 있다. 부처 앞에 바친 꽃도 무궁화이고, 배경에는 태극기가 보인다. 한국식 불화가 처음 발표됐을 때의 파장이 궁금했다. "불화를 그리는 젊은 화가들로부터는 '진즉 이렇게 시도되었어야 한다'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반면 원로 스님들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큰 야단을 치지는 않았고…. 제 그림이 일단 한국식 불화의 문을 연 셈이 되었는지 그 이후에는 여러 화가들이 한국식 불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묘각 스님의 그림 중 또 하나 유명한 것이 부처의 성불한 모습을 그린 '고행도'이다. 이 그림은 부처의 정신세계와 자비로움을 담아낸 그림이다. 한지에 아크릴 물감과 석채(광물질 채색안료)를 사용해 그렸다. 작품 크기는 가로, 세로 73㎝×143㎝이다. 이 그림은 현재 경남 하동군 칠불암 아자방(시도유형문화재 제144호)에 소장돼 있다.
 
그는 십군자의 매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십군자를 익히고 나면, 모든 그림을 소화할 수 있는 필법이 생깁니다. 옛 문인들은 사군자를 먼저 익혔죠. 매화는 곡선과 직선을, 난초는 부드럽고 유연한 선을, 대나무는 직선을, 국화는 직선과 곡선 가운데의 필법을 익히는 그림의 기본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6가지를 익히게 되면 자신만의 과감한 필법을 펼칠 수 있죠."
 
묘각스님이 김해로 온 까닭이 궁금했다. "3년 정도 됐어요. 그림 그리러 왔지요. 전라도의 절에 있으면 남도 묵화를 배우거나 그림을 보려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요. 그림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조용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을 찾아왔습니다. 연꽃 시리즈를 계속 그리고 있는데, 작품 수가 갖춰지면 전시회를 열 계획입니다."
 
그의 배웅을 받으며 나오는 길, 문득 걱정이 들었다. 기사를 통해 소개가 되고 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와 그림 그리는 데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 묘각스님
금어 만봉스님, 시경 박익준 사사.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제48호 불화단청 이수. 대한민국 미술대전 동양화부 최우수상,
대한민국 최초 한국식 불화 발표.
원불교 성화 제작.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강사. 한·중·일 국제미술전 외
초대·개인전 26회, 동남아 7개국 순회전 등
다수. 대한민국 미술대전 선묵화 심사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공예분과 심사위원장.
현재 김해시 화응선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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