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신선의 산 칠점이 푸르고/거문고 속 희고 둥근 달 밝게 빛나네
세상에 옥섬섬의 손이 없었다면/누가 태고의 정을 타보려 하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초선대와 칠점산의 전설과 풍광을 읊은 시들을 감상하였다. 마지막으로 김해 제일의 풍광을 떠나는 아쉬움을 칠점산과 관련된 기생(妓生) 이야기로 풀어보자
고려 말 전녹생(田祿生:1318~1375)은 계림(鷄林:경주)의 판관으로 있을 때 김해 기생 옥섬섬과 사랑을 나누었다. 뒤에 원수가 되어 합포(合浦:창원시 마산구 합포)에 와서 다시 옥섬섬을 찾았을 때 그녀는 많이 늙어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 동안 옛 연인과의 만남이 아쉬웠던 그는 그 옛날을 생각하며 가까이에서 거문고를 타게 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바다 위 신선의 산 칠점이 푸르고 | 海上仙山七點靑(해상선산칠점청) | |
이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전녹생의 문집뿐만 아니라 정몽주(1337~1392)의 문집, 조선조 세종 2년(1420)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는 길에 김해에 머물렀던 송희경의 기록에도 있다. 정몽주는 그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이 생애 어느 날에나 반가운 얼굴 보려나 | 此生何日眼還靑(차생하일안환청) | |
다음은 송희경의 시다.
뭇 산들이 남으로 달려 바다 속에 푸르른데 | 衆峀南驅入海靑(중수남구입해청) | |
전녹생의 사랑 이야기는 이쯤에서 거두고 이제는 이름에 칠점(七點)이 들어간 기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에 칠점선(七點仙)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우왕 11년(1385) 조에는 '기생 칠점선을 영선옹주(寧善翁主)로 삼았다. 사가의 종과 관가의 종을 옹주로 봉한 것은 예로부터 없던 일이므로, 나라 사람들이 놀라고 해괴하게 여겼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우왕 14년(1388) 조와 안정복(1712~1791)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우왕 14년 3월 조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칠점선 등 세 옹주의 궁에 공급하려는 물품 창고가 모두 비었다. 3년 동안의 세금을 미리 징수하였으나 부족하자 다시 더 거두었다. 그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기생의 옹주 책봉과 도에 넘친 대우는 조선조 초기에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1월 7일 조에는 '김씨를 화의옹주(和義翁主)로 삼았다. 김씨는 김해 기생 칠점선이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태종 7년(1407) 11월 2일 조에는 '태상왕(태조 이성계)의 궁인인 화의 옹주의 사위 홍귀해를 우군부사직으로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어떻게 왕이 기생과 사랑을 나누며, 더구나 첩으로 삼고 사위에게 벼슬을 내려주기까지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전통 시대의 기생에 대해 이해하신다면 의아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기생은 국가 주도의 종합 문화 축제인 팔관회나 불교 행사인 연등회 등에서 가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고려 시대의 기생들은 조선조에 들어 관청 소속의 관기인 창기희(唱技戱)로 발전하였으니,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서울로 수도를 옮길 때 많은 관기가 따라갔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는 기생을 일패(一牌)·이패(二牌)·삼패(三牌)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이 가운데 일패기생은 관기를 말하는 것으로 남편이 없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남편이 있는 기생으로 몸을 내맡기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전문적인 가무의 전승자이며 뛰어난 예술인들이었다. 그러나 이패기생은 '은근짜'라 불리는 밀매음녀(密賣淫女)에 가까웠고, 삼패기생은 바로 몸을 파는 창녀였다. 따라서 우왕이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가까이 하였던 칠점선은 굳이 말하자면 일패기생이라고 할 것이며, 칠점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속에 참시선인이 있었다면, 우왕이나 조선조 태조에게 있어서 그녀들은 재물이나 옹주의 직첩이 아니라 더한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선녀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인물들과 기생 칠점생(七點生)과의 사랑 이야기 등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자는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즉, 칠점산은 봉우리가 일곱 개였고, 분위기가 몽환적이었으며, 가락국 시대 거등왕과 참시선인의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시인·풍류객·기생들과 관련을 맺었던 것일까? 이제 이에 대한 답을 구해보기로 하자.
조선조 초기의 김시습(1435~ 1493)은 '북두(北斗)는 천극(天極)의 가로서 일곱 점의 빛인데, 그 모양은 국자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북두칠성을 말하는 것이다. 많은 시에서도 일곱 점은 대부분 북두칠성의 뜻으로 쓰이는데, 조선조 중기의 시인 이민구(1589~1670)는,
어둠침침한 운무 사이로 | 冥濛雲霧間(명몽운무간) | |
<이민구, 동유록(東游錄) 고성사영(高城四詠)> |
라고 읊었고, 조선조 후기의 시인 이현조(1654~?)는 이민구의 시에서 운을 빌어 아래와 같이 읊었다.
높이 솟은 일곱 점 별 | 森森七點星(삼삼칠점성) | |
<이현조, 동유록(東遊錄) 차고성이영(次高城二詠)> |
조선조 말의 시인 정범조(1723~1801)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일곱 점 북두칠성이 온 몸에 서리고 | 七點斗星蟠九竅(칠점두성반구규) | |
<정범조, 遷都丹圃 建白瑤宮 召李長吉 作新宮記 (천도단포 건백요궁 소이장길 작신궁기)> |
이상에서 인용한 시에서 보는 칠점은 모두 북두칠성이다. 사실은 여기에 모두 제시하지 못해서 그렇지 이 밖의 많은 시문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들의 탄생에서도 일곱 개의 점은 북두칠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김수년(2007) 선생은 "북두칠성은 동양천문에서 '하늘 공간의 기준방위'가 된다. 24절기 등을 표시하는 '지상 시간의 기준지표'가 된다. 점성술적 차원에서 '인간행위의 기준근거'가 된다. 불교나 도교 및 민속신앙에서 종교 습합의 기본주체가 된다. 음양오행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등 '역학 해석의 기본도구'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박성의(1980) 선생의 말을 빌자면, 도교는 다신교로서 원시천존(元始天尊:옥황상제를 비롯한 여러 신)을 모시고 있는데, 이 가운데 중요한 신의 하나가 현천상제(玄天上帝:북극성 또는 북두칠성)이다. 칠점산과 기생 칠점산·칠점생 등은 모두 이와 관련시켜 생각하여야, 그것이 고려와 조선 시대의 임금, 양반 사대부들에게까지 파급된 연유를 설명할 수 있다.
칠점산은 인간의 운명과 도덕적 기준인 북두칠성의 이미지를 가진 이상향으로서, 참시선인과 관련하여서는 도교 및 민속신앙의 중심으로서, 기생 칠점선 및 칠점생과 관련하여서는 김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풍광인 칠점산의 이름과 의미 및 도교적 상징성을 차용한 당대 최고의 기생으로서의 의미를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칠점산은 김해 자연 경관의 중심이고, 김해 역사와 종교의 중심이며, 이러한 칠점의 상징성은 김해 기생 칠점선·칠점생과 함께 많은 김해 사람들 뿐만 아니라 외지 사람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