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를 좋아합니다. 찻집을 열어볼까 했을 만큼…. 이토록 좋아하는 차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다 나무를 떠올렸습니다. 그것이 서각, 목공예로 이어졌지요."
서각가이며 목공예가인 장용호(51) 씨는, 조각도를 잡기 전에는 자신이 이 길을 가게 될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서각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었고, 지금도 꾸준히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는 나무를 쓰다듬을 때, 나무의 결을 알아본다. 그리하여 자연을 닮은 작품을 빚어낸다.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제게 타고난 재능과 소질은 없습니다. 다만 열심히 노력할 뿐이지요."

▲ 차가 좋아, 차와 어울리는 나무를 만지며 살게 됐다는 장용호 씨가 달여내는 차는, 그 맛 또한 일품이다. 박정훈 객원기자 poonglyu@naver.com

지리산에서 만난 다인 문상희 씨로부터 차의 진정한 매력 알게 돼 차도구에 관심
나무 이용해 차도구 등 만들며 서각 심취

장용호의 공방 '학고방(學古房. 전통을 배우고 가르치는 집이라는 의미)은 장유면 장유리 706-2에 있다. 학고방 입구에는 그가 만든 솟대가 있고, 그 아래에 그가 새긴 서각 현판이 있다. 손님과 담소를 나누는 작은 방, 작품을 모아 둔 창고, 각종 기계와 도구가 즐비한 작업장 등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 앞에는 크고 작은 목재들이 쌓여 있거나 세워져 있다. 언젠가는 장용호의 손끝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작업 재료들이다.
 
작업 공간에는 여러가지 용도의 도구들이 있는데, 벽에 걸린 조각도 수가 얼핏 보아도 족히 몇 백 자루는 돼 보인다. "이것 말고도 더 있어요. 작업하다 필요한 조각도가 있어서 찾아봤는데 없으면 다시 만들기도 하거든요. 새 조각도를 만들고 난 뒤, 그 조각도가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도 많지요."
 
작업도구 외에, 작품들과 목재까지 학고방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의 수량이 만만찮아 보였다. 그는 "안 그래도 이 부근이 택지개발지역이라 내년에는 이사를 가야 하는데, 저 짐들을 옮길 게 걱정입니다. 학고방으로 들어오는 길이 좁아 큰 트럭은 못 들어오는데…. 이사업체 직원이 와서 보더니 1t 트럭 200대 분량은 된다고 견적을 내더군요"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기자는 보는 것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 고려, 조선시대에 고급 제본장정을 위해 사용하던 능화문을 장용호 씨가 목판에 새겼다. 탁본 체험 프로그램 때도 활용한다.
장용호는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5세 때 가족과 함께 진주 신안동으로 이사했다. 진주에서 쭉 살았고, 삼천포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김해로 온 지는 18년째, 이제는 김해사람이다.
 
"학창시절에는 미술시간을 제일 싫어했어요. 혼자서 뭔가를 만드는 건 좋아했지만, 그래도 내가 서각과 목공예를 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장용호는 의외의 고백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왠지 나무가 좋았다, 이런 식의 근사한 대사를 내심 기다리고 있던 터라, 기자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일렀다. 그가 서각을 하게 된 계기는 더 극적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1986년이었다. 산을 좋아해 지리산을 한참 오르내리던 그때, 다인(茶人) 문상희 씨를 만났다. 경상대 산악동아리 대장으로서 산악인이며 다인이었던 문상희 씨는 효당 최범술로부터 차를 배웠고, 추전 김화수와 더불어 차를 보급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다인이다. 문상희 씨가 하동에서 차도구점을 할 때 들러서 차를 마셨던 일을 장용호는 아직도 기억한다. "술을 좀 많이 마신 날이었는데, 문 선생이 달여 준 차를 마신 뒤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 차를 마셨을 때는 이게 무슨 맛인가 싶었는데, 한 30분쯤 지난 뒤 술이 깨는 걸 느꼈습니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산길을 혼자 내려오는데, 밤하늘 별빛은 또 얼마나 좋았던지…. 단전에서 차향이 온 몸으로 퍼지면서 입안도 개운해지고, 정신이 맑아져 오는 게… 그만 차에 매료돼 버렸죠."
 
▲ 서각인 장용호 씨의 공방 '학고방'. 하늘 높이 솟은 솟대가 먼저 손님을 반겨준다.
그러면서 그는 찻집을 낼 생각까지 했단다. 그리고 차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나무로 각종 차도구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공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목공예를 하면서 개인유통업을 했는데, IMF를 겪느라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때 과도한 음주 탓에 건강이 많이 상했어요. 대수술을 받아야 했을 정도였죠. 그렇게 큰일을 겪고 난 뒤, 본격적으로 나무를 만져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아니면 죽겠구나 하는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고생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아내가 '가정경제는 내가 맡을 테니,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손을 잡아준 데 대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부인 홍승자 씨는 무형문화재 14호 강산제 심청가 이수자로서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김해뉴스 3월 6일자 10면 참조)
 
"서각의 경우 실력 있는 장인들을 찾아가 여러 분께 배웠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후배라 해도, 배울 게 있으면 자존심을 제쳐두고 달려가 배웠지요." 그는 서각을 배우면서 마음 속에 새긴 가르침이 두 개 있다고 했다. 하나는 순자(荀子·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의 가르침인 '막신일호(莫神一好)'이다. 한 가지 일을 좋아하고, 거기에 미치고 미쳐서 통달하는 것보다 더 신명나고 완전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는 논어에 들어있는 공자의 가르침 '불치하문(不恥下問)'이다. 지위·학식·나이 등이 자기보다 낮다고 해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공간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조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조각도는 공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다.

그렇게 열심히 '나무'에 매달려 오는 동안 건강도 회복됐고, 그의 작업 또한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는 차도구 대한명인(사단법인 대한명인회)이 되었고,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회원과 한국미술협회 전통공예분과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립이천호국원 현충문·현충관 현판 제작
김해향교 현판 보수 때 중수기문도 만들어
향꽂이 '향원익청' 올 김해공예품대전 대상
고려목판 '화엄경변상도' 재현이 꿈

그의 작품은 김해는 물론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중 현충문 작업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국가보훈처가 국가유공자와 참전유공자를 안장하기 위해 2008년 새롭게 단장한 국립이천호국원 현충문과 현충관의 현판이 장용호의 작품이다. 한메 조현판(한국한글서예학회 회장)의 글을 서각한 것이다. 현충문 현판은 폭 1m40㎝, 길이 3m40㎝로, 우리나라 역대 현충문 현판 중 제일 크며, 글과 서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이후 김해향교 현판 보수 때 중수기문 제작을 맡기도 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기자는 그와 함께 계속 차를 마시고, 향을 즐겼다. 향? "향은 제 몸을 태워, 공기를 정화하고 좋은 향기와 기운을 사방에 전해줍니다. 그래서 향을 좋아합니다." 향을 좋아하는 그가 만든 향꽂이 작품 '향원익청'은 올해 김해시공예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향원익청'은 여러가지 모양의 향꽂이 18점으로 구성됐다. 통 모양 향꽂이의 경우 통 안에 향을 피우면 새와 오리모양의 두껑에 난 구멍을 통해 향을 즐길 수 있다. 또 접시 모양의 향꽂이에서는 향이 천천히 타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많은 작품을 했지만, 그가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 하나 있다.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화엄경변상도(보물 제 734-13호)를 재현하는 것이다. 화엄경변상도는 화엄경의 내용을 요약해서 표현한 불화이다. 보물인 고려목판으로는 다시 인쇄를 할 수도 없고, 남아있는 인쇄본의 그림 선들도 선명하지 않아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장용호는 인쇄 복사본을 들여다보며 작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전통 책의 표지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목판인 능화판 제작과 함께, 화엄경변상도 목판 제작은 서각인 장용호가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 장용호
한국미술협회 전통공예분과이사.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회원. 김해공예협회 회장. 차도구 대한명인. 경상남도 미술대전대상 동초대작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한양예술협회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경상남도 공예품대전 대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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