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지리서들에서 황산강은 양산에 속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앞서 보았던 칠점산 또한 양산의 땅(梁山地)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칠점산은 거등왕과 참시선인, 초선대와 함께 가락국의 대표적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황산강 또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락국의 경계는 동쪽으로 황산강, 서남쪽으로는 푸른 바다,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쪽으로는 가야산, 남쪽으로는 나라의 끝이다'라고 하였듯이 가락국의 동쪽 기슭을 감싸안고 2천 년을 흘렀다. 따라서 기왕 김해를 다루는 이 글에서는 황산강을 가락국의 추억 속에 편입시키고자 한다. 이제 시를 통해 황산강의 정서를 읽어보자. 처음 감상할 것은 최치원의 시다.
안개 낀 봉우리 옹긋쫑긋 강물은 넘실넘실 | 煙巒簇簇水溶溶(연만족족수용용) | |
<최치원, 황산강 임경대(黃山江臨鏡臺)> |
작중 화자의 위치를 보면 이 시는 임경대에서 황산강 주변으로 시각을 옮기면서 읊은 것이다. 마치 신선의 세계인 양 아른아른 안개 사이로 비치는 봉우리 아래로 강물이 넘실거린다. 저 앞으로 보이는 강물 속에는 인가 몇 채가 강물에 비치고, 그 위로 세찬 바람을 받은 돛단배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임경대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여러가지 추측들이 있다. 사실을 밝힌다면 좋은 일이겠으나, 지금도 물금에서 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위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황산강과 그 주변을 바라보면, 1천년 전 최치원이 황산강을 왜 이렇게 읊었는지 분명히 알게 될 터이니 이로 만족한다 해도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은 최치원보다 약 300년 뒤인 고려 명종(明宗:1170~1197 재위) 때의 대문호 김극기(金克己:?~?)가 노래한 황산강이다.
여관에서 새벽 밥 먹고 강을 건너니 | 起餐傳舍曉度江(기찬전사효도강) | |
<김극기, 황산강(黃山江)> |
황산강은 낙동강의 하류로서 엄청나게 넓다. 넓기는 하여도 평소에는 호수처럼 잔잔하며 대단히 느리게 흘러간다. 그런데 김극기가 이 강을 건너던 당시는 시에서 보듯 검푸른 하늘에 모래 먼지를 안은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으니, 배가 아래 위로 요동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그 동네 사람들과 뱃사공은 워낙 배를 자주 타고 이런 일을 많이 당한 터라, 평지에 서있듯 자연스럽게 뱃노래가 흥겨우니 감탄스러우면서도 얄밉기 그지없다. 겨우 배에서 내린 시인 앞에 맞닥뜨린 것은 편안한 길이 아닌 숲이 깊고 거친 시골 길이다. 시에서 보면 당시 김극기가 겪었던 공포감과 고통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다음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결코 김극기에게 '문호'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었던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시다.
푸른 강 맑디맑고 물결도 잔잔한데 | 碧江澄淨不生波(벽강징정부생파) | |
<이규보, 동박시어장향양주 범주황산강구점(同朴侍御將向梁州 泛舟黃山江口占)> |
시에는 '밀성(密城)의 기녀가 따라오려는 것을 공이 꾸짖어 보냈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라는 주가 달려 있어 이 시의 내용을 더욱 잘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박시어(朴侍御)는 당시 보문각시어(寶文閣侍御)를 지낸 박순(朴純)으로 보이는데, 이규보는 박순과 함께 배를 타고 밀양에서 양산으로 가며 황산강을 지나고 있다. 맑고 아름다운 강을 지나면서 풍경에 도취한 그들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풍경에 어울리는 기생의 노래다. 그러나 박순이 따라오려는 기생을 쫓아버렸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제 조선조의 시인들을 만나보자. 다음은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1556~1618)과의 우정과 장난으로 우리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의 시다.
아름다운 곳 풀만 그득 싸움터로 변하니 | 草滿名區變戰場(초만명구변전장) | |
<이덕형, 황산강유감(黃山江有感)> |
이덕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사신 겐소와 단 둘이 배를 타고 교섭을 하는가 하면, 왕을 모시고 피난을 가기도 하였다. 그 혼란 중에 부인 한산(韓山) 이씨(李氏)는 왜적을 피하려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1년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된 그는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애를 썼으니, 이 시는 이때 썼던 것으로 보인다. '요학(遼鶴)'은 중국 전설 속의 도사 정영위(丁令威)가 도술을 배워 학으로 변한 뒤 천 년 만에 고향 요동(遼東) 땅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다. 전쟁은 아름다운 황산강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곳을 다시 찾은 시인의 마음에는 상처만 가득하다. 시인의 가슴에 가득한 한 따위야 아랑곳 없이 오늘도 아름다운 황산강에 놀이 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선조 중기 유계(兪棨:1607~1664)와 김익희(金益熙:1610~1656)가 서로 운을 주고받은 차운시(次韻詩)를 보자.
서로 만나 손을 잡고 고깃배에 오르니 | 相逢携手上漁舟(상봉휴수상어주) | |
<유계, 황산강상 동김중문 익희범주구호(黃山江上 同金仲文益熙泛舟口呼)> |
맑은 술 항아리 아름다운 촛불 켠 작은 배 | 淸樽華燭木蘭舟(청준화촉목란주) | |
<김익희, 여유무중범주황산강 지야심 무중유절구 차기운(與兪武仲泛舟黃山江 至夜深 武仲有絕句 次其韻)> |
두 사람은 놀이 질녘부터 황산강에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다가 밤이 깊어지자 촛불을 켠다. 취흥이 도도해지자 유계는 먼저 칠언절구를 읊었고 김익희가 '주(舟)', '류(流)', '주(洲)'의 '우(尤)'자 운을 빌어 답하였다. 고요한 물결과 붉게 물든 노을에 비치던 서로의 얼굴이, 밤이 되자 촛불과 달빛에 비친다. 달빛과 촛불에 비쳐 황산강에 그림자 진 배와, 술을 마셔 불콰해진 얼굴로 시를 읊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생생히 떠오른다.
황산강을 읊은 시는 여기에 소개한 것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 소개한 것은 황산강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것이긴 하여도 시대를 안배하였고, 독특한 상황의 것들을 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혹 독자들께서 다른 시들도 참으로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지 연락주시면 소개해 드릴 의향이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