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 주촌면 천곡리 이팝나무와 마을풍경.
지킨다는 것. 살다보면 꼭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나 아름다운 것들, 정의로운 것이나 믿음의 것, 진리나 약속 같은 것들…. 이러한 것들을 상처나게 하고, 저버리게 하고, 깨고 어기게 하는 것들로부터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지킨다는 것은 결연한 것이다. 지켜야 할 존재를 위해 제 목숨까지 버려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킨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지킴으로써 지켜내야 할 것들의 행복을 함께 할 수 있기에 그렇다. 지킨다는 것은 눈물겨운 것이다. 지켜야 할 것들을 빼앗으려는 것들에게서 지켜내는 일은, 모든 방법의 노력을 다해야 하기에 그렇다.

이번 산행은 주촌면 천곡리에 있는 천곡산성(139m)을 오른다. 천곡산성은 철기시대 초기에 축성된 산성. 철기시대 초기라면 '철의 왕국' 가락국이 융성하던 시대이다. 하여 이 천곡산성은 가락국을 지키고, 가락사람들을 지키던 산성. 돌무더기와 흙더미로 한 땀 한 땀, 나라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쌓아올렸던 눈물겨운 수성(守城)의 성이다.
 
천곡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천곡마을회관이나 황용사, 주촌초등학교 맞은편 길 등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이번 산행은 천곡마을회관 옆 이팝나무를 기점으로 산을 오른다.
 

▲ 이팝나무 옆으로 난 길이 천곡산성을 오르는 들머리이다.
천곡마을회관 이팝나무 뒤로 난 길을 들머리로 하여, 마을저수시설을 거쳐 된비알을 오르다, 능선 따라 체육시설이 있는 천곡산성에 오른 후, 계속 봉우리를 두어 개 타고 송전탑을 거쳐 남해고속도로로 떨어지는 종주코스이다.
 
천곡마을회관 옆에 차를 댄다. 이팝나무 한 그루, 큰 팔을 벌리고 나그네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천곡리 마을 수호목(守護木)이자, 마을 어른으로 모시며 매년 마을동제를 지내고 있는 이팝나무다. 500년 세월을 이겨내며 오늘에 이른 이 노거수는, 1982년 천연기념물 제307호로 지정된 국가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팝나무는 풍년을 예언하는 신령스런 나무. 나무에 하얀 꽃이 쌀 튀밥과 같이 풍성하게 달리면 풍년이 온다고 했다. 이팝나무는 물을 좋아하는 수종으로 물이 많은 곳에 번성을 한다. 해서 수량이 넉넉하면 하얀 쌀밥 꽃이 주렁주렁 열리고, 그 해는 풍년이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 예지목(叡智木). 벼농사의 계절인 입하(立夏)에 꽃이 핀다고 입하목(立夏木)이라 불리기도 한다. 망종(芒種)을 지나는 즈음의 이팝나무는, 출렁출렁 제 이파리 물결 이루며 바람에 여유롭게 몸을 맡기고 있다.
 
이팝나무 뒤로 난 산길을 오른다.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를 훌쩍 지난 터라, 여름 꽃들이 한창이다. 꿀풀, 엉겅퀴, 뱀딸기, 개망초 등등 각양각색의 꽃들이 지천이다. 칡넝쿨도 무섭게 덩굴손을 뻗어 주위 나무의 발목을 감아대고 있다.
 
산 속은 여름이 시작이다. 온통 녹음으로 짙을 대로 짙었다. 숲이 짙어 햇살 한 점 들어오기가 힘들 정도이다. 습기 먹은 이파리들이 툭툭 어깨를 치는 경사진 길을 오르다 보니 마을저수시설이 나온다. 지하수를 끌어서 모으는지 저수조에 물 흐르는 소리가 시원하다.
 
▲ 신록이 푸른 여름의 숲길은 하늘을 쉽사리 열어주지 않을 만큼 짙푸르다.
그리고 보니 천곡마을은 샘 천(泉), 골 곡(谷)을 쓰는 마을, 바로 새미실이 아니던가? 청량하고 깨끗한 물이 사시사철 풍부하게 솟아나던 마을. 지금은 각종 난개발로 샘이 말라 저수시설에 의존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길은 계속 짙은 숲길. 어두울 정도로 숲은 빛을 차단시키고 있다. 발 아래로는 산죽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머리 위로는 밤나무, 굴참나무 등 참나무들이 넉넉한 가지 위에 바람 둥지를 치고 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직박구리가 따라다니며 시끄럽게 짖어댄다. 멀리 뻐꾸기와 산꿩 울음도 들린다.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도 선명하게 울린다. 모두들 새로운 가정을 알콩달콩 꾸리기 위해 심신이 바쁘다.
 
비탈이 심해진다. 작은 마을 뒷산 치고는 경사가 급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100여m의 산이지만, 산성을 축성할 정도였다면 지형지세가 만만치는 않았을 터. 외부에서 산으로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야 하겠기에 더욱 그렇겠다.
 
천곡산성은 학봉산(지금의 소황새봉, 주주봉) 끝자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줄기. 마치 여뀌잎처럼 좁다랗고 길쭉해, 수로왕이 김해를 도읍지로 정할 때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수로왕이 김해를 도읍지로 정하면서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십육 나한이 살 만한 곳"이라 했듯이, 천곡산성은 '협소하기가 여뀌잎과 같지만' 외적을 조망하고 침략으로부터 수성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지세인 것이다.
 
희미한 산길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아직도 숲은 산 밖의 전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산 밑의 풍문은 나무숲으로 차단하고, 산 속의 내밀한 이야기는 새나가지 않게 숨기고 있는 모양새다.
 
숨을 한 꼭지 몰아쉴 때쯤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확연한 능선길이 남북으로 진하게 그어져 있다. 능선에 서자 바람소리가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파도소리를 내며 술렁이고 있다. 능선 바깥쪽으로는 심한 경사의 비탈이 능선 따라 이어져 있다.
 
왼쪽 능선 길을 탄다. 곧이어 내리막길이 급하게 떨어진다. 길이 다 떨어질 때쯤 천곡산성 봉우리가 보인다. 터덜터덜 걷다보니 전방 30여m 수풀 속에서, '후다닥' 하고 고라니 새끼가 박차고 나와 줄행랑을 친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면서도 은근히 반갑다.
 
사거리 갈림길이 나오고 계속 가던 길로 직진한다. 작은 비탈을 한 고비 오르니 체육시설이 나온다. 체육시설 맞은 편 끝에서 또 한 마리의 고라니와 눈이 마주친다. 맑은 눈망울로 나그네를 쳐다보다가 산성 봉우리로 치달려 오른다. 천곡산성은 고라니 천국이다.
 
▲ 산봉우리 정상 부근에 흔적만 남은 천곡산성 터.
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땀을 닦는다. 나무들 때문에 현재 조망은 없지만, 예전에는 선천들판을 비롯해 주위의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졌을 것이다. 이곳에서 가락의 병사들은 칠산 쪽으로 배가 들고나는 것을 예의 주시했을 터이다.
 
쉼터 앞에 돌복숭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다. 작은 돌복숭 열매가 꽤나 조랑조랑 열렸다. 깨물어보니 아직 덜 익어 시고 쓰다. 과즙이 풍부하고 달고 부드러운 수밀도(水蜜桃)도 영글지 않으면 제 맛을 못내는 법. 사람도 성숙기간을 두어야만 제 맛을 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산봉우리에 오르니 그 부근에 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돌무더기와 흙더미가 서로 섞여 흐릿하지만, 성곽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날 수 있을 정도로 허물어진 상태다.
 
산성은 언제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었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방치되어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그 흔적마저 스러져버린 것일까? 홀연히 사라져 신화로 존재하는 가락국의 역사처럼, 가락국의 성터도 지금에 와서 애달프기는 매한가지이다.
 
▲ 산봉우리 부근의 송전탑. 산을 파헤친 흔적과 함께 능선 길 바로 옆으로 위태롭게 서 있다.
오솔길 따라 계속 길을 내린다. 길섶 나무들이 짙어 오솔길이 호젓하고 편안하다. 그렇게 편한 기분으로 산길을 즐기는데 갑자기, 거대한 철 구조물이 나그네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선다. 천곡산성을 관통하는 문제의 송전탑이다.
 
능선 길 바로 옆으로 위태하게 서 있는 송전탑은, 아직 지반이 안정되지 않았는지 나무에 펜스를 치고 '위험 낙하물 주의' 팻말을 달아놓았다. 송전탑 주위에는 산을 파헤친 상흔의 붉은 흙이 아직도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김해를 지키고자 했던 산을, 오히려 도려내는 현실이 아프기만 하다.
 
모롱이를 한 바퀴 크게 돌아드니 세 번째 봉우리가 나온다. 간단한 체육시설도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하산길에 접어든다. 유택들이 하나 둘씩 보이더니 언덕 하나가 유택으로 둘러싸였다.
 
유택 주위로 갖가지 꽃들이 자지러지게 피어들 있다. 파묘한 곳에는 하얀 찔레꽃 군락이 소담하게 피었고, 개망초 꽃, 하고초, 금계국, 인동 꽃, 삘기 꽃…. 노랗고 빨갛고 흰 꽃들이 무덤가를 장식하고는, 잠들어 있는 이들의 마음을 화사하게 달래주고 있다. 참 착한 마음을 가진 산이다.
 
▲ 금계국.
조금 더 내리니 김해 동서대로가 보이고, 도로 위로 달리는 자동차 소리도 크게 들려온다. 망덕육교 쪽으로 내려 농원 하나를 지나니, 동서대로와 남해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과 만난다. 이곳이 이번 산행의 날머리이다.
 
남해고속도로 진영방면 쪽으로 걷다보니 공단이 나오고, 부산일보의 주촌 인쇄공장도 눈에 들어온다. 개가 짖는 논둑을 따라 보리수 열매, 오디열매, 산딸기 등속을 심심찮게 훑어 먹으며 길을 걷는다. 손과 입이 온통 빨갛고 꺼멓다. 하늘도 서서히 빨갛다가 꺼매진다. 어스름의 시골길을 그렇게 걷는다. 지켜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손 꼽아보며 가는 길이다.






최원준 시인/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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