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그림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받았던 학생. 덕분에 매주 전체 조례 때마다 단상에 올라갔던 학생. 그 학생, 한정수는 설치미술가가 됐다. 어린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김해의 친구들은 말한다. "너는 당연히 이 길을 갈 줄 알았다"고. 한정수(45)의 작업장은 봉황동 백조아파트 6동 7라인 지하에 있다. 최근 전시회를 위해 작품을 모두 서울로 옮겨간 뒤라 작업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한정수의 전시회가 열린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갤러리 옵시스아트의 전시장 모습과 함께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갤러리 옵시스아트에서 열린 한정수 작가의 전시회 '새빨간 교란'. 사진제공=스톤 김(사진작가)

김해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종 예술가
취직 후 묵혀뒀던 '끼' 되살려
미술학원 다니며 유학 포트폴리오 작업
뉴욕 명문 디자인대학교서 공부
미니멀리즘 바탕 작품활동
동양적 사유 혼재 특징

한정수는 1968년, 김해 동상동에서 태어났다.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를 잘 썼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던지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 전, 당시 금보극장에서 김청기 감독의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브이'를 보았고, 영화를 보고 난 뒤 곧바로 태권브이를 그렸다. 태권 브이만 그린 전용 공책이 따로 있었다. 동광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친구들이 줄을 서서 그림을 한 장씩 받아갔다.
 
최초의 스승은 윤소남(1942~2007) 화백이다. 윤 화백은 구산동에서 동심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김해 최고의 미술학원이었다. 한정수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그를 윤 화백에게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학교를 대표해 수많은 대회에 나갔다.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상을 받아왔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월요일 아침마다 학교 운동장에 한정수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고 기억한다. 그가 학창시절 받은 그림대회 상장만 대략 200여 장이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김해지역의 미술교사들이 중고교생들을 회원으로 하는 그림 동아리 '미우회'를 만들었다. 중학생이 되어야 가입할 수 있었는데, 한정수는 윤 화백의 주선으로 미우회 전시회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초등학생이 김해의 내로라 하는 중고교 화가들의 전시회 때 떡하니 그림을 걸었으니, 최연소 화가로 참여한 셈이었다.
 
김해중·김해고 시절에는 학교 미술반 과 미우회 7기 회원으로 활동했다. 미우회는 김해문화원, 농협, 은행 등에서 마련해준 공간에서 매년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기간 동안에는 김해지역 학생들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미우회 회원들은 다른 학생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 아크릴로 제작한 큐브(위)와 발로 눌러 두껑을 여는 휴지통을 응용한 작품. 작품에 물을 부으면 표면장력이 주는 착시효과로 물인지, 타일인지, 또는 특수물질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전시회가 열리면 집으로 여학생들한테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죠. 겨울에는 회원들이 다 함께 일주일 정도 모여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들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이라 손으로 직접 카드를 그리고 그걸 또 직접 팔았어요. 인기가 많았죠."
 
김해중학교 시절에는 교장선생님이 직접 교장실로 데리고 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는 등 한정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해고등학교 시절에는 담임교사와 미술교사가 그를 두고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담임교사는 그가 공부에 몰두하기를 바랐고, 미술교사는 그를 자주 대회에 내보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부산대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그림만 그려서는 밥 먹고 살기 힘들 거란 주위의 염려도 있었지만, 평생 그림을 친구처럼 여기며 취미로 그려도 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에는 미술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미술의 이해' 등 미술학과의 이론 강의는 꼬박꼬박 들었다. 졸업 논문을 쓸 때에도 '미술과 경제'를 주제로 논문을 써보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졸업 후에는 석유화학회사에 취직을 했다. 28세 때 입사해 서울의 회사 기숙사에서 머물며 4년 정도 근무했는데, 그는 어느 날 "부모 형제 친구들을 떠나 와, 이곳에서 나 홀로 뭘 하고 있는가"라는 회의감을 느꼈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아트필'이라는 미술학원의 취미반에 등록했다. 아트필은 1990년에 국내 최초로 설립된 유학전문 미술학원이다. 한정수는 회사 일을 마치고 나면 취미반에서 그림을 그렸고, 밤에는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과 어울려 그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던 중 친하게 지내던 학생들이 하나 둘 씩 유학을 떠났다. 그의 마음 속에서도 '다시 미술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아트필 권혁복 원장의 도움이 컸다. 학원비를 할인해주고 학교를 알아봐주는 등 한정수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한정수는 9개월 정도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며 유학 준비에 전념한 끝에 2000년,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대학원에 합격했다.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이 학교는, 1887년에 설립된 명문 사립 디자인 대학교이다. 2000년에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프랫  인스티튜트를 마치고 창작활동과 포스터 복원 일을 하던 중, 그는 '이대로 미국에서 살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결정을 내리고 김해로 왔다. 귀국한 그는 삼계동에서 학원을 열고 영어미술수업을 1년 반 정도 했다. 학부모들과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창작에 집중하기 위해 현재는 학원을 닫은 상태다.
 
김해로 돌아온 그가 첫 전시회를 연 것은 2012년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다. '2012 뉴 페이스 인 김해전'에서 신진작가로 선정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리즘(Minimalism. 최소한의 수단을 사용하여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는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설치작품 중 2007년에 제작된 큐브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자. 몬드리안(1872~1944)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어 여러 개의 사각 공간으로 나뉜 직육면체를 아크릴로 제작했다. 위는 뚫려 있다.
 
몬드리안의 평면회화를 그대로 위로 잡아당긴 것처럼, 몇 개의 사각 공간으로 나뉘어진 커다란 용기를 연상하면 된다. 각각의 공간을 나누는 윗면을 똑같은 높이로 맞추어 사포로 갈고 난 뒤, 이 용기에 물을 붓는다. 최대한의 표면장력을 끌어올린 작품들인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용기 안에 담긴 게 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윤슬미술관에서도 그랬지만, 서울 옵시스아트에서도 관람객들은 그의 작품 앞에서 토론을 벌였다. "저게 뭐지?" "타일 아냐? 반들거리잖아!" "특수물질 아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관람객들은 급기야 용기 속의 물질에 손을 대어본다. "뭐야, 그냥 물이잖아!" 옵시스아트에서는 착시효과에 속고, 짐작하던 소재가 아니라서 놀라는 관람객들의 반응을 예상했던지, 전시회의 제목을 '새빨간 교란'이라고 붙였다.
 
한정수는 자신의 작품을 '꿈과 현실의 복합'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익히 보는 평면회화에서는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해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걸 마음껏 표현할 수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꿈이죠. 그에 비해 입체는 평면회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보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 작품은 드로잉, 페인팅, 조각의 요소에 물을 붓는 퍼포먼스가 더해집니다. 물이 계속 증발하기 때문에 용기에 계속 물을 부어줘야 합니다. 최대한의 표면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조심해서 부어야 하죠."
 
그는 '새빨간 교란'전에서 믹서기, 휴지통, 양동이 등을 사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 작품 소재로 사용돼 더 흥미를 끈다.
 
그의 작품 안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표면장력을 지탱하는 물을 보고 있으니, 어느 정도까지 물을 부어야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정수는 "적당히 부어야 한다"고 말했다. "적당히는 '대충 한다'는 부정적 의미와, '딱 맞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께 갖고 있지요. 적당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이런 그의 작품을 두고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 이영준 팀장은 "한정수 작가는 미니멀리즘 계열의 작가이면서 동시에 작품에서 동양적 사유를 느끼게 한다"고 평가했다.
 
한정수의 '새빨간 교란'전은 오는 8월 중순 서울 압구정동의 갤러리 '프로젝트 부름'에서, 가을에는 광주에서 각각 열릴 예정이다. 

>> 한정수
2004 석사(M.F.A.)/순수미술(Fine Arts),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미국. 개인전/ 2013 새빨간 교란(옵시스아트, 서울), 2012 뉴페이스 인 김해(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 2011 Meniscus 드로잉 초대전(렉서스갤러리, 대구), 2009 Meniscus Series(Art Gate Gallery, 뉴욕), 2003 Meniscus Series(Steubean East Gallery, 뉴욕). 단체전/2013 갤러리김해 개관전(김해), 2009 AHL Awards Show(Nabi Gallery, 뉴욕) 외 다수.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