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지도는 김해부의 남쪽 바다 복판에 있는데 물길로 40리 거리다. 동쪽 취도와는 200 보쯤 떨어져 있으며 둘레는 17리다. 큰 비나 큰 가뭄, 큰 바람이 불려고 하면 반드시 우는데, 그 소리가 어떤 때는 우레 같고 북 소리나 종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섬에서 들으면 그 소리가 다시 멀어져 우는 소리가 어느 곳에서 나는지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취도가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여기에서 낙동강의 물이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그 아래쪽인 명지는 과거 육지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바다 가운데 있었던 섬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명에 소리 내어 운다는 뜻의 울 명(鳴)자가 붙은 이유도 알 수 있다. 조선조 후기 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지금의 김해시 강동(江洞) 지역인 옛 강창포(江倉浦)에서 배를 타고 명지까지 가면서 다섯 편의 시를 읊었다. 이를 통해 당시 낙동강 하구와 명지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동쪽 해 흐릿한 물가에 숨고 | 東方之日隱煙汀(동방지일은연정) | |
<이학규, 주행 자강창포지명지도(舟行 自江倉浦至鳴旨島)> |
명지는 은빛 모래밭과 쪽빛 바다가 펼쳐진 속에 갈대와 물억새가 우거지고, 물오리가 힘차게 날아오르며, 그 사이사이로 시장 바닥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것처럼 거위가 꽉꽉거리고, 어부의 뱃노래가 울려퍼지고, 해질녘 수많은 어등(漁燈)이 붉은 장지뱀처럼 흔들리는 등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이었음은 위의 시에서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명지가 조선 시대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소금 생산지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나라 안에서 소금의 이익은 영남(嶺南)만한 데가 없다. 명지도에서만 매년 소금 수천만 섬을 구우니 드디어 낙동포(洛東浦:상주 지역) 가에다 염창(鹽倉)을 따로 설치하기까지 했다. 감사(監司)가 해마다 천만 섬을 헤아리고 해평(海平 :구미 지역)의 옛 현(縣)에 해마다 소금 만 섬이 오니, 소금의 이익이 나라 안에서 첫째임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라고 한 말을 비롯한 여러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마다 모래 모여 큰 물결 위로 드러났네 | 年年沙聚出洪波(연년사취출홍파) | |
<허훈, 명지도(鳴旨島)> |
천고의 세월 동안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명지도. 거센 물결을 견뎌내어 명지 사람들의 삶의 원천인 소금과, 비단 같은 풀이 펼쳐진 터전을 마련하였다. 명지는 이름 그대로 비바람 몰아치면 물결로 울고, 잔잔해지게 되면 어부의 뱃노래가 그를 이어받는다. 바다 멀리 구름 저편은 신선의 고향이러니, 배에 올라앉은 시인의 마음은 황홀할 뿐이다. 그러나 황홀함도 잠깐, 현실에서는 소금이 명지도 사람들에게 있어 삶의 원천이자 고통이 되었다.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솥에 불을 때어 소금을 얻는 전오법(煎熬法)과 햇빛과 바람 등 자연의 힘을 빌어 얻는 천일법(天日法)이 그것이다. 명지는 이 가운데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바로 불을 때서 소금을 생산하는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을 사용하였다.
넓고 아득한 겹겹의 바다에 둥근 연잎 | 層溟澔淼出圓荷(층명호묘출원하) | |
<허훈, 명호염연(鳴湖鹽煙)> |
첫 번째 구절은 명지도의 모양을 묘사한 것으로 시인은 시에다 "명지도는 연잎 같은 모양이다"라는 주를 달아두었다. 두 번째 구절에서는 명지의 소금 생산 규모를 알 수 있으니, 소금을 볶는 가마가 40곳이나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섬 전체가 침침해지면서 우기가 짙어진다. 비가 오면 당장 소금 생산을 중단하여야 하니, 소금을 생산하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일손을 놓아야 하는 중대 사태였다. 같은 시기의 이종기(李種杞:1837∼1902)는 더욱 구체적으로 당시 명지의 소금 생산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명호 십리 소금 볶는 연기가 일어 | 鳴湖十里起塩烟(명호십리기염연) | |
<이종기, 명호염연(鳴湖塩烟)> |
당시의 명지는 둘레가 약 20리(8㎞)가 되지 않았다. 시인은 10리에 소금 굽는 연기가 일어난다고 묘사하고 있으니, 명지는 허훈의 묘사대로 땔감 연기와 소금 볶는 연기가 자욱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곳의 소금은 영남 일대의 각 창고로 옮겨져 보관되고 판매되었으니, 끊임없이 소금을 생산하고 보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앞에서 보았던 정약용의 기록뿐만 아니라 심상규(沈象奎:1766∼1838)도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 잘 묘사하고 있는데, 수영(水營)이나 감영(監營)의 소금 생산 및 판매의 독점과 세금 탈루, 이에 따른 명지 염민(鹽民:소금을 생산하는 백성)들의 고통 및 수요자의 소금 부족 등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1.염민의 책임자인 소택(所宅)이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킴에 따라 문제가 되므로 이를 없앤다.
2.산산창(蒜山倉:대동 예안에 있는, 소금의 유통을 관할한 창고)의 감색(監色:관리자)과 조선(漕船:화물선)과 공선(公船:관청의 배)의 사공 및 각 군청(軍廳:군부대)의 장무(掌務:사무 담당 관리)와 어금군(御禁軍:금부나졸)이 염민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따르라.
3.을유년(乙酉年:1825년)절목과 그 전후의 절목을 바르게 하여 길이 지키도록 하라.
지금은 새로운 도시의 면모를 갖추면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명지. 2만 명이 넘는 인구에 명지시장 전어 축제, 강서 낙동강 갈대꽃 축제 등이 벌어지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강 하구와 해변의 도시 명지. 파 생산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명지. 그런데 조선시대에 오랜 세월 영남 일대의 소금을 책임지던 곳이었다는 사실 또한 켜켜이 쌓여 단단하게 굳은 모래의 그것만큼 명지를 버틴 생명력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