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도시의 면모를 갖추면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명지. 조선시대에는 전국 최고의 소금 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사진제공=부산일보
황산강(黃山江)으로 흐르다 대저도(大渚島)에 의해 삼분수(三分水)로 나뉘었던 낙동강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취도(鷲島) 또는 취량(鷲梁)과 명지도(鳴旨島)에 이르러서부터다. 지금은 김해평야의 농업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치던 염해(鹽害)를 방지하기 위해 바다 쪽으로 가로막은 수문(水門)·하구언(河口堰) 등과 상류로부터 쓸려온 모래가 쌓여 서쪽으로 가락(駕洛)·생곡(生谷)·신호(新湖)와 북쪽으로 대저(大渚), 동쪽으로 을숙도(乙淑島)·하단(下端)과의 사이를 흐르는 강이 그렇게 넓어 보이지 않고, 특히 신호대교·을숙도대교·서낙동강교 등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명지(鳴旨)가 섬이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낙동강과 바다를 연결한 다리를 모두 지도에서 지우면 명지는 다시 섬이 되고 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지도는 김해부의 남쪽 바다 복판에 있는데 물길로 40리 거리다. 동쪽 취도와는 200 보쯤 떨어져 있으며 둘레는 17리다. 큰 비나 큰 가뭄, 큰 바람이 불려고 하면 반드시 우는데, 그 소리가 어떤 때는 우레 같고 북 소리나 종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섬에서 들으면 그 소리가 다시 멀어져 우는 소리가 어느 곳에서 나는지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취도가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여기에서 낙동강의 물이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그 아래쪽인 명지는 과거 육지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바다 가운데 있었던 섬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명에 소리 내어 운다는 뜻의 울 명(鳴)자가 붙은 이유도 알 수 있다. 조선조 후기 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지금의 김해시 강동(江洞) 지역인 옛 강창포(江倉浦)에서 배를 타고 명지까지 가면서 다섯 편의 시를 읊었다. 이를 통해 당시 낙동강 하구와 명지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동쪽 해 흐릿한 물가에 숨고
쌀쌀한 서풍 부니 술 깨는구나
한 길로 모든 갯물 가지런히 나누니
반은 은백 반은 쪽빛이로구나

갈대와 물억새 꽃 지고 구름 조각 드물고
갯가 물결 천 겹 거울 빛으로 에웠구나
한 무리 물오리가 사람 치며 흩어지는데
그 솜씨가 믈에 붙었다 날아오를 수 있네

검은 거위 흰 거위 같이 곱지는 않아도
무리지어 안개 낀 물가에서 꽉꽉거린다
마치 삼랑의 작은 노점에서
길 가득 사람들 시끄럽게 싸우는 것 같네

해질녘 포구 밖으로 어부노래 들리더니
달이 뜨는 동쪽 봉우리 많기도 하구나
갯가에 삼백 리나 늘어선 빛 멀리 바라보니
동시에 번쩍이며 움직여 헬 수 없는 장지뱀

물억새 울타리 갈대 집에 바람이 우수수
새와 말이 바람에 고개 돌리기 두려워 하네
알겠네 낯 조수가 언덕에 평평하게 닿은 줄
숱한 돛이 처마 끝으로 높이 솟았네 

東方之日隱煙汀(동방지일은연정)
颯颯西風吹酒醒(삽삽서풍취주성)
一路平分全浦水(일로평분전포수)
半邊銀白半藍靑(반변은백반남청)

蘆荻無花雲片稀(노적무화운편희)
浦瀾千疊鏡光圍(포란천첩경광위)
一行野鴨衝人散(일행야압충인산)
伎倆能爲貼水飛(기량능위첩수비)

玄鵝未似素鵝鮮(현아미사소아선)
隊隊羣吟煙水邊(대대군음연수변)
略似三浪小墟市(략사삼랑소허시)
白衣諠閧滿晴阡(백의훤홍만청천)

黃昬浦外有漁歌(황혼포외유어가)
月上東岑寸寸多(월상동잠촌촌다)
極望浦光三百里(극망포광삼백리)
一時閃動萬金蛇(일시섬동만금사)

荻籬蘆舍共颼颼(적리노사공수수)
鳥馬風來怕轉頭(조마풍래파전두)
知是午潮平到岸(지시오조평도안)
數帆高出屋檐頭(수범고출옥첨두)
 

   
<이학규, 주행 자강창포지명지도(舟行 自江倉浦至鳴旨島)>  


명지는 은빛 모래밭과 쪽빛 바다가 펼쳐진 속에 갈대와 물억새가 우거지고, 물오리가 힘차게 날아오르며, 그 사이사이로 시장 바닥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것처럼 거위가 꽉꽉거리고, 어부의 뱃노래가 울려퍼지고, 해질녘 수많은 어등(漁燈)이 붉은 장지뱀처럼 흔들리는 등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이었음은 위의 시에서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명지가 조선 시대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소금 생산지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나라 안에서 소금의 이익은 영남(嶺南)만한 데가 없다. 명지도에서만 매년 소금 수천만 섬을 구우니 드디어 낙동포(洛東浦:상주 지역) 가에다 염창(鹽倉)을 따로 설치하기까지 했다. 감사(監司)가 해마다 천만 섬을 헤아리고 해평(海平 :구미 지역)의 옛 현(縣)에 해마다 소금 만 섬이 오니, 소금의 이익이 나라 안에서 첫째임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라고 한 말을 비롯한 여러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1800년 초기의 명지도(鳴旨島). 위로는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죽림동인 죽도(竹島)가, 오른쪽 위로는 현재 김해공항이 있는 대저도(大渚島)가, 왼편 아래쪽으로는 현재 녹산 지역인 녹도(菉島)가 보인다. 명지도 주변은 파도가 일렁이는 모양을 그려두어 이곳이 한바다 가운데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도 표현되고 있으니,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은 1800년대 말 명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해마다 모래 모여 큰 물결 위로 드러났네
근본이 단단하니 물결이 어찌 하겠나
세찬 흐름 재물의 근원 소금이 눈 같고
넓고 아득한 땅의 기세 풀이 비단 같구나
때 아닌 비바람에 몰려오는 물결 소리
오래 묵은 모래톱에서 들려오는 뱃노래
고개 돌리니 봉래산이 구름 가에 솟았네
오늘 외로운 배 지나가기 좋아라  

年年沙聚出洪波(연년사취출홍파)
根蒂堅牢浪柰何(근체견뢰랑내하)
滾滾貨源鹽似雪(곤곤화원염사설)
茫茫陸勢草如羅(망망육세초여라)
非時風雨來潮響(비시풍우래조향)
從古汀洲落棹歌(종고정주낙도가)
回首蓬山雲際出(회수봉산운제출)
孤帆此日好經過(고범차일호경과) 

   
<허훈, 명지도(鳴旨島)>  


천고의 세월 동안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명지도. 거센 물결을 견뎌내어 명지 사람들의 삶의 원천인 소금과, 비단 같은 풀이 펼쳐진 터전을 마련하였다. 명지는 이름 그대로 비바람 몰아치면 물결로 울고, 잔잔해지게 되면 어부의 뱃노래가 그를 이어받는다. 바다 멀리 구름 저편은 신선의 고향이러니, 배에 올라앉은 시인의 마음은 황홀할 뿐이다. 그러나 황홀함도 잠깐, 현실에서는 소금이 명지도 사람들에게 있어 삶의 원천이자 고통이 되었다.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솥에 불을 때어 소금을 얻는 전오법(煎熬法)과 햇빛과 바람 등 자연의 힘을 빌어 얻는 천일법(天日法)이 그것이다. 명지는 이 가운데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바로 불을 때서 소금을 생산하는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을 사용하였다.


넓고 아득한 겹겹의 바다에 둥근 연잎
사십의 가마솥 연기 수많은 집이로구나
섬의 숲 침침해지고 모래톱 어둡더니
남쪽 하늘 우기가 여기에 짙어지네  

層溟澔淼出圓荷(층명호묘출원하)
四十釜煙十百家(사십부연십백가)
島樹沈沈洲渚暗(도수침침주저암)
南天雨候此中多(남천우후차중다)

   
<허훈, 명호염연(鳴湖鹽煙)>  


 첫 번째 구절은 명지도의 모양을 묘사한 것으로 시인은 시에다 "명지도는 연잎 같은 모양이다"라는 주를 달아두었다. 두 번째 구절에서는 명지의 소금 생산 규모를 알 수 있으니, 소금을 볶는 가마가 40곳이나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섬 전체가 침침해지면서 우기가 짙어진다. 비가 오면 당장 소금 생산을 중단하여야 하니, 소금을 생산하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일손을 놓아야 하는 중대 사태였다. 같은 시기의 이종기(李種杞:1837∼1902)는 더욱 구체적으로 당시 명지의 소금 생산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명호 십리 소금 볶는 연기가 일어
한낮 모래밭 열기가 한들한들 피어오른다
배에 싣고 짊어지고 가기 천백 리
집집마다 항아리 바리때 채워지기 샘같네
 

鳴湖十里起塩烟(명호십리기염연)
白日沙塍暑露娟(백일사승서로연)
航走擔行千百里(항주담행천백리)
家家瓮鉢貯如泉(가가옹발저여천)

   
<이종기, 명호염연(鳴湖塩烟)>  


당시의 명지는 둘레가 약 20리(8㎞)가 되지 않았다. 시인은 10리에 소금 굽는 연기가 일어난다고 묘사하고 있으니, 명지는 허훈의 묘사대로 땔감 연기와 소금 볶는 연기가 자욱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곳의 소금은 영남 일대의 각 창고로 옮겨져 보관되고 판매되었으니, 끊임없이 소금을 생산하고 보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앞에서 보았던 정약용의 기록뿐만 아니라 심상규(沈象奎:1766∼1838)도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 잘 묘사하고 있는데, 수영(水營)이나 감영(監營)의 소금 생산 및 판매의 독점과 세금 탈루, 이에 따른 명지 염민(鹽民:소금을 생산하는 백성)들의 고통 및 수요자의 소금 부족 등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 명지파출소 앞에 있는 경상도 관찰사 김상휴(金相休)와 홍재철(洪在喆)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명지동 주민센터 곁 명지파출소 앞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는 경상도 관찰사 김상휴(金相休:?∼1827)와 홍재철(洪在喆:1799~미상)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인데, 중리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으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1945년 광복 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기록인 이건비(移建碑)와 함께 서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명지의 소금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1.염민의 책임자인 소택(所宅)이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킴에 따라 문제가 되므로 이를 없앤다.
 
2.산산창(蒜山倉:대동 예안에 있는, 소금의 유통을 관할한 창고)의 감색(監色:관리자)과 조선(漕船:화물선)과 공선(公船:관청의 배)의 사공 및 각 군청(軍廳:군부대)의 장무(掌務:사무 담당 관리)와 어금군(御禁軍:금부나졸)이 염민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따르라.
 
3.을유년(乙酉年:1825년)절목과 그 전후의 절목을 바르게 하여 길이 지키도록 하라.
 
지금은 새로운 도시의 면모를 갖추면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명지. 2만 명이 넘는 인구에 명지시장 전어 축제, 강서 낙동강 갈대꽃 축제 등이 벌어지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강 하구와 해변의 도시 명지. 파 생산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명지. 그런데 조선시대에 오랜 세월 영남 일대의 소금을 책임지던 곳이었다는 사실 또한 켜켜이 쌓여 단단하게 굳은 모래의 그것만큼 명지를 버틴 생명력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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