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지구에서 자라는 꽃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꽃이다. 특히 서구세계에서는 문명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꽃의 대표로까지 일컬어져 왔다. 종교에서 흰 장미는 성모 마리아의 순결과 영적인 사랑을 뜻하며, 붉은 장미는 고혹적인 미인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아름다운 꽃과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문학작품 속에서의 장미는 다층적, 다의적인 의미로 널리 이용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장미가 등장한다. <양화소록(養花小錄·조선 성종 5년 강희안이 쓴 원예서)>에서는 장미를 평하여 '자태가 아리땁고 아담하다'고 했다. 강희안은 장미를 가우(佳友·아름다운 벗)라 부르면서 화목 9등품 제 중 5등에 놓고 있다.
대동면 예안리에서 30여 년 동안 장미를 키워 온 안영달(71) 씨의 보라매농원을 찾아가보았다.

▲ '장미 박사' 안영달 씨는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는 방식으로는 우리나라 장미 농가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장미품종을 직접 개발했다. 일본 수출이 잘 될 때는 보라매농원이 장미꽃 향기로 그득했다고 한다. 김병찬 기자 kbc@

맨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장미농사
막대한 로열티 지불하는 현실 안타까워
핵심 기술 배우려 일본행 등 동분서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 작심했죠"
혼자 연구하고 실패 거듭하며 터득
메이·첼시 등 다양한 품종 직접 개발

"TV에서 일본에 장미 수출하는 기사를 내보낼 때, 새로운 재배기법을 소개할 때, 화훼농가의 힘든 점을 방송할 때, 기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분이 바로 안영달 어르신이죠. '장미 박사'입니다. 교수들요? 명함도 못 내밀죠! 국내 최고의 장미 박사님이에요." 안영달 씨를 취재하러 간다고 하자, 그를 아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할머니들한테 보라매농원의 위치를 물었다. "마을회관 앞에서 똑바로 농로를 따라 가면 있어. 좀 전에 점심 드시러 집에 가시던데, 집은 저 쪽이고."
 
안영달 씨의 집은 마산마을의 옛 산산창(蒜山倉·조선시대 때 소금의 유통을 관할한 창고) 자리 근처에 있었다.
 
▲ 안영달 씨가 장미와 찔레 가지를 접삽목 기법으로 붙이고 있다.
농원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영달 씨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드넓은 대동들판, 한 뼘의 그늘도 없는 상황에서 한여름 따가운 햇살이 무서워 농원의 하우스 안 그늘에 앉아 있던 기자는 잠시 머쓱해졌다. 흰 머리는 듬성듬성 나 있었지만, 키가 훌쩍 크고 허리가 꼿꼿한 안영달 씨가 "장미를 언제까지 키울 수 있을는지, 언제 농사를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무슨 이야기를 들으러 왔소"라며 덤덤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장미 묘목이 가득한 9천900㎡(3천 평)의 농원 안쪽을 바라보며 그가 바닥에 앉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굵은 주름, 오랜 농사일이 그대로 몸에 새겨진 듯한 검은 팔뚝과 손등 위로 불쑥 솟아오른 굶은 힘줄, 흙이 묻은 작업복 바지와 흰 고무신…. 그는, 천생 농부였다.
 
기자가 대동면에서 가장 먼저 장미농사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자, 그는 "내가 아니라 '태양장미'라는 곳에서 먼저 시작했다"고 정정해주었다. 그러면서 "장미에 대해 물어보면 잘 안 가르쳐주시더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장미농사에 뛰어들었지"라고 옛 일을 더듬었다.
 
그의 부모들은 쌀농사 보리농사를 지었다. 쌀농사를 짓는 부모가 꽃 농사를 짓는 아들을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여러 기자들을 만나 봤는데, 처음 듣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참 재미있네"라며 웃음을 보였다. "경운기가 없던 시절, 소가 제일 큰 일꾼이었지. 채소 농사도 마찬가지야. 큰 물통을 짊어지고 이랑 사이를 걸어가며 물을 주는 식이었으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거야. 힘들었지. 그런 농사방식이 나하고는 좀 안 맞았어. 그땐 부모님들 연세가 많아서 나를 반대하거나 말릴 힘도 없었던 것 같아."
 
외국 찔레나무와 장미 '접삽목 기법'
꽃대 더 크고 재배 기간도 더 늘어나
"품 많이 드는 통에 배우려 들질 않아
수출판로마저 위축돼 걱정 태산 …
배우고 싶다면 누구든 언제든 기꺼이"

우리나라에 서양 장미가 들어온 것은 8·15 광복 이후다. 유럽·미국 등지로부터 우량종을 도입해 다양한 원예 종을 재배하고 있다. 그래서 국내 장미농가들은 묘목 생산비 외에도 포기당 로열티를 따로 내야 한다. 안 씨가 '장미박사'로 통하는 건 그런 현실 속에서 새로운 재배기술과  장미품종을 개발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외국 찔레나무와 장미를 접붙이는 접삽목 기법이 있어. 손이 많이 가는 힘든 작업이지. 내가 손을 놓으면 이 기법이 이어질 수 있을지 걱정이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모두들 힘들어서 다 포기하더군."
 
▲ 장미를 위로, 찔레를 아래로 연결한 어린 묘목이 자라면 묘목 하나 하나를 다시 옮겨 심는다.
그는 직접 접삽목 기법을 보여주었다. 농원 한쪽 옆에 따로 지어진 하우스 안에는 찔레 묘목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찔레나무의 가지 하나를 꺾고, 장미의 가지 하나도 꺾었다. 굵기가 같아야 한단다. 그는 그런 다음 칼을 사용해 두 가지를 45도 각도로 베어냈다. 상하를 구분하기 위해 장미는 잎 하나를 남겨두었다. 장미를 위로, 찔레를 아래로 해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꽂아 접이 잘 붙도록 비닐튜브로 감싼 뒤 다시 테이프로 감았다. 찔레와 장미를 접삽목 기법으로 접을 붙이면, 장미의 꽃대가 10㎝는 더 자라고, 1년 정도는 더 살 수 있다. 1년 정도의 로열티를 아낄 수 있는 것은 물론, 상품가치도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모든 장미묘목마다,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9천900㎡의 농원 안에 있는 묘목을 대상으로 접삽목 기법으로 작업하고, 또한 잘 자라도록 밤낮으로 지켜보는 일이라니…. 그에게 접삽목 기법을 배우러 왔다 포기하고 돌아서는 농부들의 마음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그는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장미농사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장미의 품종을 개발하기도 했다. 메이, 첼시, 핑크베리, 스위티, 뉴맨, 뉴레이디 등이 그가 개발한 품종이다. 2001년에는 경상남도 농수산물 수출탑 시상식에서 '10만 불 수출탑'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50만 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개인 농원에서 이런 성과를 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005년에는 선진농업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농협중앙회의 새 농민상 기술 부분에 선정돼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일본에 장미를 수출하기 위해 그는 직접 일본을 수차례 다녀오기도 했다. "일본의 장미재배기술을 배우러 갔는데, 기본 핵심기술을 안 가르쳐 주려고 하지 뭐야. 옆에서 통역을 해주긴 하는데,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도 알 길이 없고. 그래서 '내 맘대로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지. '머리에 김난다'는 말 있지? 정말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연구를 하고 또 했어. 일본에 처음 꽃을 보낼 때는 경험이 없어서 장미를 그냥 잘라 종이에 말고 신문지 물에 적셔 은박지에 포장하는 건 포장으로 보냈는데, 일본에 도착하면 꽃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거야. 상품가치는커녕 그냥 버려지는 거였지. 그래서 박스에 물을 채워서 보내는 습식포장으로 바꿨어. 농원에서 일본 경매장까지 가는 데 일주일 정도 걸려. 50송이를 꽃은 박스에 물을 400cc 넣으면 일본 경매장에 도착했을 때 물이 바닥에 조금은 남아 있어.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계산을 해야 해."
 
▲ 45도로 베어낸 장미 가지를 비닐튜브에 먼저 끼우고, 같은 각도로 벤 찔레 가지를 튜브로 밀어 넣어 붙이는 모습.
일본에 수출이 잘 될 때는 일본 바이어들에게 신용도 높았고 신바람 나게 일도 했다. 그런데 2011년 일본 동북해안지역에 쓰나미 지진이 일어났고, 그 후로 지금까지 수출판로가 끊겼다. "일본 쓰나미의 여파가 심각해. 많이 힘들지. 화훼농가도 많이 줄었어, 국내시장도 마찬가지야. 꽃값은 오르지 않고, 인건비, 농약비, 연료비, 운영비는 몇 배로 올랐으니까.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하고 있긴 한데, 이대로라면 농사를 그만 접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
 
그는 농가의 현실을 깊이 걱정하고 있었다. "2천300여㎡(700평)에 채소농사를 지어봤어. 오이, 토마토, 양배추 농사를 지어서 부산청과조합에 가 팔았는데, 이건 도시민 먹이려고 농사를 짓는 거지 내가 먹고 살자고 하는 게 아니더란 말이지. 농가는 생산비도 못 건지고, 소비자는 비싸다고 하고.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거야. 할아버지 아버지의 농사짓는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이 살길이야. 두려워 말고 도전하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시도해야 농촌이 살 길이 열리는 거야."
 
그는 장미묘목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두 아들에게 접삽목 기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더 많은 장미농가에서 배웠으면 해. 기자 양반이 기사에 이 말을 꼭 써주면 좋겠네. 접삽목 기법을 배우고 싶다면 누구든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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