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명 조식은 부친상을 마친 30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로 옮겨 장인 조수의 도움으로 산해정을 짓고 독서에 힘썼다. 강당인 신산서원의 모습. 김해뉴스 DB
대동면의 중심인 대동면주민자치센터에서 불암동으로 길을 잡고 가다보면, 이정표에 조선시대 석학(碩學)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후학을 가르치며 지냈던 산해정(山海亭)의 진입로가 표시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오른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몇 채의 민가와 사찰을 지나 산해정에 이르게 된다. 입구에는 조식의 시를 새긴 시비·안내문 등이 놓여 있고, 입구인 진덕문(進德門)을 지나 신산서원(新山書院)의 편액이 붙어 있는 강당 안에 산해정(山海亭)의 편액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남명이 김해에 살면서 학문 수양과 교육을 이루어내었던 터전이다. 원래 조식의 고향은 합천(陜川) 삼가(三嘉)였는데, 부친상을 마친 30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로 거처를 옮겨 김해 일대의 부자였던 장인 조수(曺琇)의 도움으로 산해정을 짓고 독서에 힘썼다. 45세가 되던 1545년 모친이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가 시묘(侍墓)하고, 상복을 벗은 후에는 그곳 토골에 정착하였다.
 
조식은 이곳에서 거의 15년 세월을 지내면서 김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산해정에서의 생활, 사람들과의 교유를 여러 편의 시로 읊었다. 이제 그의 시를 통해 그의 김해 생활과 당시 산해정의 모습을 상상해보도록 하자.

10리 저곳 왕이 내려오신 곳
긴 강에 흐르는 한 깊기도 해라
구름은 누런 대마도에 떠있고
산은 비취빛 계림으로 통한다 

十里降王界(십리강왕계)
長江流恨深(장강유한심)
雲浮黃馬島(운부황마도)
山導翠雞林(산도취계림)

   
<조식, 산해정우음(山海亭偶吟)>  


▲ 1800년대 초 산해정(山海亭)의 위치. 대동면 예안의 산산창(蒜山倉)의 왼쪽 신산서원(新山書院)이 그 자리이다.
제목에서 보듯 시인은 갑자기 김해의 역사가 떠올라 그것을 산천에 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산해정에서 김수로왕이 탄강한 구지봉(龜旨峰)까지는 약 10리다. 한때 가야의 맹주였던 김수로왕. 그의 산하였던 낙동강은 흐릿한 구름만 아득한 바다 멀리 대마도로 흐르고, 저 건너 백양산·금정산의 비취빛 산자락은 그의 후손들이 그러했듯 신라의 왕도였던 계림으로 이어져간다. 그러나 세월 속에 흘러가버린 가락국의 한만은 되돌릴 수 없다.
 

산에 살며 컴컴한 속에 오래 있게 되니
해를 볼 기약 없고 사물 관찰하기 어렵네
상제가 아마도 수자리 모임을 만들었으리
반쪽 얼굴 보인 게 언제였던가 

山居長在晦冥間(산거장재회명간)
見日無期見地難(견일무기견지난)
上帝還應成戍會(상제환응성수회)
未曾開了半邊顔(미증개료반변안)

   
<조식, 산해정고우(山海亭苦雨)>  

 
장마철이었던 지난달 말. 지금도 그렇지만 산해정은 깊은 산속이라 그다지 밝지 않은데, 날마다 비가 내리니 더욱 어두워 도대체 사물을 관찰하기도 어려웠다. 하느님이 해가 뜨는 걸 지키려고 보초를 세웠는지, 하늘 반쪽이 빤한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장마는 날씨로서의 장마이기도 하지만, 남명의 학문에 대한 열망과 이를 이루지 못하는 답답함을 토로한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일생 근심과 즐거움 둘 다 번뇌일지라도
앞선 현인 푯대 세운 바에 의지한다네
부끄럽구나 책 쓰기에는 학술이 없으니
억지로 마음을 시에라도 부쳐봐야지 

一生憂樂兩煩寃(일생우락양번원)
賴有前賢爲竪幡(뢰유전현위수번)
慙却著書無學術(참각저서무학술)
强將襟抱寓長言(강장금포우장언)

   
<조식, 재산해정 서대학팔조가후 증정군인홍(在山海亭 書大學八條歌後 贈鄭君仁弘)>  

 
이 시에는 지은 유래가 밝혀져 있으니 '병인년 가을에 선생은 산해정에 있었다. 인홍이 가서 모시면서 반 개월을 머물렀다. 인홍이 북으로 돌아가자 선생은 손수 '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를 쓰고 또 이 한 절구를 그 뒤에 그에게 써주었다'고 되어 있다. 정인홍(鄭仁弘:1535~1623)은 조식의 수제자라는 학문적 정통성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58세라는 고령에 직접 의병을 일으킬 만큼 충의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식과 같은 합천 출신으로 어릴 때 조식에게서 글을 배웠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흐릿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방울은 김우옹(金宇 :1540~1603)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하였고, 이후 정인홍은 칼을 턱 밑에 괴고 반듯하게 꿇어앉은 자세로 평생을 변함없이 하였다고 한다. 광해군 즉위의 일등공신이었던 그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중앙정계에는 그의 정치적 대리인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 핵심으로 성장하였고, 정국에 주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반대파에 대해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였다. 광해군 2년(1610)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 종사(從祀) 논란이 일자, 그는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이황(李滉:1501~1570)을 비판하고 문묘 배향에서 제외하라고 요구하면서 스승 조식의 문묘종사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류(士類)들이 정인홍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그의 정치적 실천은 심지어 자신을 지지하던 문인들조차 이탈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나이 88세 되던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참형되었으며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이후 그는 서인과 노론 주도의 정국이 전개되면서 조선후기 내내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산해정 편액이 걸려 있는 신산서원 내부 모습.
제목과 주에서 보듯이 이 시는 그의 나이 31세 때인 1566년에 조식이 <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와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를 써주고 난 뒤 지어준 것이다. 일생을 살면서 근심이네 즐거움이네 해봐도 결국은 그것을 명확히 깨닫기는 어렵다. 그러나 선현들의 가르침이 전해져 있으니 그 얼마나 큰 다행인가? 스승인 내가 제대로 된 학술을 책으로 엮어 전해주어야 하지만, 재주가 없으니 시 한 수로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선현들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학문 이루기를 바라는 스승의 제자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는 시다.


이 이는 외로운가 외롭지 않은가
소나무가 곁에서 이웃하고 있으니
바람과 서리 기다려보지 않고도
아름답고 성함에 참모습을 본다네 

此君孤不孤(차군고불고)
髥叟則爲隣(염수칙위린)
莫待風霜看(막대풍상간)
猗猗這見眞(의의저견진)

   
<조식, 종죽산해정(種竹山海亭)>  

 
제목에서 보듯 시인은 대나무를 심고 그 감회를 읊었다. 대나무는 곁가지도 거의 없이 위로 위로 커 올라가고, 그 푸른 색깔 또한 계절의 변화에도 바뀌지 않으니 도무지 주변의 그 무엇과도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묻고 있다. 외로운가? 외롭지 않은가? 아마도 대나무의 성질과 같은 이웃이 없다면 대나무는 분명히 외로울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가 곁에 있으니 대나무는 외롭지 않다. 이랬다저랬다 시세에 따라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절개와 충의를 지키는 사람은 외로운 법이다. 그러나 진정한 참 모습을 유지하며 변치 않는 사람은 스스로 그러하다고 억지로 드러내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알아보고 따르게 되는 법이다.


산해정 안에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나
황강 늙은이 귀밑머리 눈이 가득하네
반생에 세 번 궁궐에 갔으나
군왕의 얼굴 보지도 못하고 왔구나 

山海亭中夢幾回(산해정중몽기회)
黃江老漢雪盈腮(황강노한설영시)
半生金馬門三到(반생금마문삼도)
不見君王面目來(불견군왕면목래)

   
<조식, 문이우옹환향(聞李愚翁還鄕)>  


제목은 '이우옹(李愚翁)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듣고'이다. 우옹은 이희안(李希顔:1504∼1559)의 자고, 시에 보이는 황강(黃江)은 그의 호다. 합천 초계(草溪) 출신으로 중종(中宗) 12년(15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중종 33년(1538)에는 이언적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명종(明宗) 9년(1554)에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곧 사직하였다. 그 뒤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으로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조식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 산해정 입구와 진덕문.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는데, 이때 조식의 숙부 조언경(曺彦卿)도 화를 당하자, 조식은 벼슬길에 회의를 가졌다. 중종 15년(1520) 진사 생원 초시와 문과초시에 모두 급제한 그는 이듬해 문과회시(文科會試)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25세 되던 해 과거 준비를 하던 그는 <성리대전(性理大典)>에 실려 있는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무엇 하겠는가?"라는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1279~1368)의 글을 읽고 출세를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공부를 버리고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 데 전념하였다. 조식의 명성이 중앙 정계로까지 알려지자, 1538년 조정에서 그에게 헌릉(獻陵: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 참봉을 제안했으나 그는 뿌리쳤다. 그 뒤에도 몇 차례에 걸쳐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번번이 사양했고, 1553년에는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퇴계 이황의 권고조차도 물리쳤다.
 
이러한 이희안과 조식의 관계와 시에 대한 일화는 사람들의 입에 오랜 세월 오르내렸으므로, 다양한 자료에서 발견된다. 특히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와 이제신(李濟臣)의 <청강선생 시화(淸江先生詩話)>에는 세 번째 구절이 '반평생 세 번을 조정에 조회하러 갔네 半生三度朝天去(반생삼도조천거)'라고 되어 있다.
 
금마문(金馬門)은 고려시대 궁문의 이름으로, 고려 인종 16년(1138) 5월 여러 전각과 궁문의 이름을 고칠 때 연명문(延明門)으로 고쳤다. 시에서는 임금이 있는 대궐의 뜻으로 썼다. 시인은 젊은 시절 산해정에서 겪었던 인생의 진로에 대한 갈등을 회고하면서 늙어서 귀밑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벼슬살이를 하다 고향에 온 이희안을 '벼슬한다더니 임금 얼굴 한번 보지도 못했다'고 놀리고 있다. 사실 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온 것에 대한 반가움이 짙게 묻어나오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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