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은 이곳에서 거의 15년 세월을 지내면서 김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산해정에서의 생활, 사람들과의 교유를 여러 편의 시로 읊었다. 이제 그의 시를 통해 그의 김해 생활과 당시 산해정의 모습을 상상해보도록 하자.
10리 저곳 왕이 내려오신 곳 | 十里降王界(십리강왕계) | |
<조식, 산해정우음(山海亭偶吟)> |
산에 살며 컴컴한 속에 오래 있게 되니 | 山居長在晦冥間(산거장재회명간) | |
<조식, 산해정고우(山海亭苦雨)> |
장마철이었던 지난달 말. 지금도 그렇지만 산해정은 깊은 산속이라 그다지 밝지 않은데, 날마다 비가 내리니 더욱 어두워 도대체 사물을 관찰하기도 어려웠다. 하느님이 해가 뜨는 걸 지키려고 보초를 세웠는지, 하늘 반쪽이 빤한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장마는 날씨로서의 장마이기도 하지만, 남명의 학문에 대한 열망과 이를 이루지 못하는 답답함을 토로한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일생 근심과 즐거움 둘 다 번뇌일지라도 | 一生憂樂兩煩寃(일생우락양번원) | |
<조식, 재산해정 서대학팔조가후 증정군인홍(在山海亭 書大學八條歌後 贈鄭君仁弘)> |
이 시에는 지은 유래가 밝혀져 있으니 '병인년 가을에 선생은 산해정에 있었다. 인홍이 가서 모시면서 반 개월을 머물렀다. 인홍이 북으로 돌아가자 선생은 손수 '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를 쓰고 또 이 한 절구를 그 뒤에 그에게 써주었다'고 되어 있다. 정인홍(鄭仁弘:1535~1623)은 조식의 수제자라는 학문적 정통성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58세라는 고령에 직접 의병을 일으킬 만큼 충의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식과 같은 합천 출신으로 어릴 때 조식에게서 글을 배웠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흐릿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방울은 김우옹(金宇 :1540~1603)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하였고, 이후 정인홍은 칼을 턱 밑에 괴고 반듯하게 꿇어앉은 자세로 평생을 변함없이 하였다고 한다. 광해군 즉위의 일등공신이었던 그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중앙정계에는 그의 정치적 대리인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 핵심으로 성장하였고, 정국에 주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반대파에 대해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였다. 광해군 2년(1610)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 종사(從祀) 논란이 일자, 그는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이황(李滉:1501~1570)을 비판하고 문묘 배향에서 제외하라고 요구하면서 스승 조식의 문묘종사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류(士類)들이 정인홍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그의 정치적 실천은 심지어 자신을 지지하던 문인들조차 이탈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나이 88세 되던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참형되었으며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이후 그는 서인과 노론 주도의 정국이 전개되면서 조선후기 내내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이는 외로운가 외롭지 않은가 | 此君孤不孤(차군고불고) | |
<조식, 종죽산해정(種竹山海亭)> |
제목에서 보듯 시인은 대나무를 심고 그 감회를 읊었다. 대나무는 곁가지도 거의 없이 위로 위로 커 올라가고, 그 푸른 색깔 또한 계절의 변화에도 바뀌지 않으니 도무지 주변의 그 무엇과도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묻고 있다. 외로운가? 외롭지 않은가? 아마도 대나무의 성질과 같은 이웃이 없다면 대나무는 분명히 외로울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가 곁에 있으니 대나무는 외롭지 않다. 이랬다저랬다 시세에 따라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절개와 충의를 지키는 사람은 외로운 법이다. 그러나 진정한 참 모습을 유지하며 변치 않는 사람은 스스로 그러하다고 억지로 드러내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알아보고 따르게 되는 법이다.
산해정 안에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나 | 山海亭中夢幾回(산해정중몽기회) | |
<조식, 문이우옹환향(聞李愚翁還鄕)> |
제목은 '이우옹(李愚翁)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듣고'이다. 우옹은 이희안(李希顔:1504∼1559)의 자고, 시에 보이는 황강(黃江)은 그의 호다. 합천 초계(草溪) 출신으로 중종(中宗) 12년(15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중종 33년(1538)에는 이언적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명종(明宗) 9년(1554)에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곧 사직하였다. 그 뒤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으로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조식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이러한 이희안과 조식의 관계와 시에 대한 일화는 사람들의 입에 오랜 세월 오르내렸으므로, 다양한 자료에서 발견된다. 특히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와 이제신(李濟臣)의 <청강선생 시화(淸江先生詩話)>에는 세 번째 구절이 '반평생 세 번을 조정에 조회하러 갔네 半生三度朝天去(반생삼도조천거)'라고 되어 있다.
금마문(金馬門)은 고려시대 궁문의 이름으로, 고려 인종 16년(1138) 5월 여러 전각과 궁문의 이름을 고칠 때 연명문(延明門)으로 고쳤다. 시에서는 임금이 있는 대궐의 뜻으로 썼다. 시인은 젊은 시절 산해정에서 겪었던 인생의 진로에 대한 갈등을 회고하면서 늙어서 귀밑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벼슬살이를 하다 고향에 온 이희안을 '벼슬한다더니 임금 얼굴 한번 보지도 못했다'고 놀리고 있다. 사실 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온 것에 대한 반가움이 짙게 묻어나오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