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경하고 엄숙하다는 뜻의 산해정 사당 입구 신문(神門)인 지숙문(祗肅門).
1588년 산해정 동편 아래쪽에 신산서원 창건
임진왜란·서원훼철령 등 겪으며 복원·중건 곡절
1998년 복원되면서 산해정이 서원의 강당 돼
도학과 도덕 숭상 '숭도사'·공경과 엄숙 '지숙문'
서고 '장서각'·정문 '진덕문'·동재 '환성재' 등
조식의 맑은 풍모와 성망 고스란히 서려 있는 듯


앞에서 우리는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여러 시를 통해 조식이 생존하던 당시의 산해정과 그 주변 풍광 및 그곳에서의 삶을 살펴보았다. 이후 그가 지냈던 산해정 곁에는 그의 학문과 얼을 기려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걸음이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조식 전공자이며 신산서원의 창건과 훼철 및 중건에 대해 연구한 경상대학교 이상필 교수(2008)의 논문 <남명 조식 유적 소고(1), 대동한문학회지 29권>을 참고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 지숙문(祗肅門).
서원의 이름은 지명이나 산 이름을 취하는 게 보통이다. 신산서원은 신어산(神魚山) 자락 아래의 주동리(酒洞里) 주부(酒府)골에 있다. 그렇다면 신산서원이나 신어서원 또는 주부서원 정도가 되어야 할 터인데, 신어는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고 주부는 하필 술 주(酒)자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발음도 비슷하거니와 유교 경전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에서 '신(新)'의 의미를 생각하여 이름하였다. 드디어 1588년 감사 김수(金 )와 부사 양사준(楊士俊)의 협조로 안희(安憙)가 일을 주도하여 산해정 동편 아래쪽에 창건하였다.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신산서원과 산해정이 모두 불타자, 1608년 안희와 황세열(黃世烈)·허경윤(許景胤) 등이 주도하고 부사 김진선(金振先)이 협조하여 1609년에 산해정의 빈터에 다시 세워졌고, 이 해에 사액(賜額)되었고, 이때의 원장은 문경호(文景虎)였다. 1618년 배대유(裵大維)는 <신산서원기(新山書院記)>를 남겼고, 1705년 조이추(曺爾樞)가 현판을 써 지금까지 걸려 있다. 1818년에는 원장인 김해부사 이석하(李錫夏)의 제의로 송윤증(宋允增)·유방식(柳邦 )·조석권(曺錫權) 등이 주도하여 서원 곁에 산해정을 복원하였다. 이때의 기문은 양산군수 김유헌(金裕憲)이, 상량문은 이석하가 지었다. 이석하의 상량문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고, 김유헌의 기문은 순조 때 편찬된 읍지에 실려 있으나, 산해정에는 걸려 있지 않다. 1830년대에 김해부사 류이좌(柳台佐)의 제의로 송윤증·송석순(宋錫洵)·허학(許 )·노병연(盧秉淵)·조중진(曺重振) 등이 주관하여 강당을 중수하였고 류이좌가 기문을 썼으나 이 기문도 서원에 걸려 있지는 않다. 1871년 국가의 서원훼철령이 내리자 신산서원은 산해정과 함께 문을 닫았다. 1890년 하경도(河慶圖)·조종응(曺鍾應)·허찬(許燦) 등에 의해 서원 터에 산해정이 중건 복원되었다. 이때의 상량문은 허훈(許薰)이, 기문은 박치복(朴致馥)이 지었으나 기문은 산해정에 걸려 있지 않다. 그 뒤 1924년과 1949년 및 1972년, 1983년에 산해정은 각각 중수되었고, 1998년에 신산서원이 복원되면서 산해정이 서원의 강당으로 되었다. 도학(道學)과 도덕(道德)을 숭상한다는 뜻의 사당 숭도사(崇道祠)와 공경하고 엄숙하다는 뜻의 사당 입구 신문(神門)인 지숙문(祗肅門),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의 동재인 환성재(喚醒齋)와 마음 속에 의로움을 쌓는다는 뜻의 서재인 유위재(有爲齋), 서고(書庫)인 장서각(藏書閣)과 정문인 진덕문(進德門)등 옛 서원의 규모에 걸맞게 복원되었다. 이때의 상량문은 김철희(金喆熙)가 지었고, 기문은 이우성(李佑成)이 지었다. 이렇듯 수많은 파란을 겪으면서 유지되어온 신산서원에서는 지금도 후학들이 춘추로 향사(享祀)를 받들며 학덕을 기리고 있다.


크게 잠긴 웅장한 등성이 제일의 지경
긴 세월 덕 있는 이 응대하며 노닐었지
활달하던 마음 풍격과 성망 남아 있고
시대 달라도 쓸쓸해라 물색은 남아있네
옛 터 사당 이루니 우러러 사모함 남겼고
새 서원 책 남기니 서로서로 학문에 힘쓰네
나그네 와도 보지 않고 유생들 한가하고
문밖에는 영롱하게 푸른 시냇물 흐른다
 

이름난 산해정 오랫동안 들었더니
하늘이 내린 고상한 자취에 홀로 노닌다
아직도 강당의 섬돌에서 음성을 듣는 듯
이리저리 떠돌다 의지해 오래 머문다
십년 전쟁에 잡초 덮혀 가슴 아팠더니
일백 보 서원에서 중수를 기뻐한다
인간 세상 이래로 갈림길이 달랐으니
참된 갈래 찾아 원류를 묻고 싶구나  

巨浸雄巒第一區(거침웅만제일구)
千秋應待碩人遊(천추응대석인유)
當時磊落風聲在(당시뇌락풍성재)
異代蕭條物色留(이대소조물색류)
刱廟舊墟存景仰(창묘구허존경앙)
貯書新院待藏修(저서신원대장수)
客來不見靑衿伴(객래불견청금반)
門外玲瓏碧澗流(문외영롱벽간류)


久聞山海擅名區(구문산해천명구)
天放高蹤獨往遊(천방고종독왕유)
猶想堂階聞謦欬(유상당계문경해)
却憐萍梗寄淹留(각련평경기엄류)
十年兵甲傷蕪沒(십년병갑상무몰)
一畒儒宮喜刱修(일묘유궁희창수)
人世邇來歧路異(인세이래기로이)
願尋眞派問源流(원심진파문원류)

   
<신지제, 신산서원(新山書院)>  


▲ 도학(道學)과 도덕(道德)을 숭상한다는 뜻의 사당 숭도사(崇道祠).
신지제(申之悌·1562~1624)는 1613년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와 임진왜란 이후의 혼란을 틈타 창궐하던 명화적(明火賊·횃불을 들고 무리를 지어 부잣집을 주로 털던 도적)을 토벌한 적이 있다. 그가 신산서원을 찾은 것은 이때였을 것인데, 서원이 건립된 지 4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 시 5, 6구에서 임진왜란 때 잡초에 묻혀 영원히 사라진 것을 걱정했더니 중건된 것을 기뻐한다는 표현에서 그가 바로 이 시기에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식의 풍격과 성망을 이어받아 손님이 와도 공부에만 매진하는 유생들의 모습과 주변에 끼친 조식의 영향에 기꺼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마지막 두 구절에서 신지제는 인간 세상이 아무리 사람들마다 가는 길이 모두 다르더라도 원류는 하나이며, 이곳이야말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도(道)의 원류가 있는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 봉우리 큰 강 모퉁이에 우뚝 솟았고 
아름다운 단청 변함없이 서원이 열렸네 
선생께서 한적하게 지내던 곳이라 하더니 
지금도 많은 자제들 경서 끼고 오는구나 
옳고 그름 정해지지 않아 논란은 많아도 
모든 이들이 높이 받들어 도는 어기지 않네 
돌아가는 배 잠깐 대고 우러러 그리워할 뿐
솔바람 부는 한 골짝 저녁 북소리가 슬퍼라 

三峯嶢兀大江隈(삼봉요올대강외)
丹碧依然廟宇開(단벽의연묘우개)
聞昔先生考槃處(문석선생고반처)
看今諸子抱經來(간금제자포경래)
是非未定論雖貳(시비미정논수이)
遐邇猶尊道不回(하이유존도불회)
暫駐歸橈徒仰止(잠주귀요도앙지)
風松一壑暮聲哀(풍송일학모성애)

   
<허적, 제신산서원(題新山書院)>  


신어산이 불암(佛巖)을 거쳐 예안(禮安)에서 초정(草亭)으로 넘어가는 산자락이 그 끝에 삼분수(三分水)를 마련해두어 산수가 어우러지는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신산서원은 자리잡고 있다. 서원에 입힌 단청이 그 옛날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 옛날처럼 주변의 자제들이 유학의 도를 찾아 경서를 끼고 모인다. 세상 모든 것이 이런저런 논설에 휘둘릴지라도 후세에 끼친 조식의 도는 모든 사람들이 어기지 않으니, 허적(1610~1680) 또한 그 도에 취한 듯 마음이 스산하다. 다음은 조선조 후기 권만(權萬:1688~?)의 시다.


천지를 소요하던 남명이 있었더니
붕새 날개의 바람이 더러운 냄새를 쓸었지
홀 괴고 서쪽 바라보니 그 맑음 넉넉하여
지금 산해에는 외로운 정자가 남았네

산문은 적적하고 바닷문은 깊은데
선생의 넓고 밝은 마음 상상해본다
영철이 천하의 선비를 가볍게 논하더니
어찌 알았겠나 이러한 산림처사 있을 줄  

逍遙天地有南冥(소요천지유남명)
鵬翼風長掃濁腥(붕익풍장소탁성)
拄笏西看餘爽在(주홀서간여상재)
至今山海有孤亭(지금산해유고정)

山門寂寂海門深(산문적적해문심)
像想先生曠朗襟(상상선생광낭금)
靈澈輕論天下士(영철경론천하사)
那知世有此山林(나지세유차산림)

   
<권만, 강상망신산서원(江上望新山書院)>  


제목을 보면 강가에서 멀리 서원을 바라보며 읊은 시다. 시 전체에서 조식의 맑고 의로운 선비 정신이 표현되고 있다. 특히 첫 번째 시 세 번째 구절의 '홀(笏·벼슬아치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괴고라는 표현에서 권만이 당시 벼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던 선비 조식의 풍모는 벼슬에 묶여 있는 권만 자신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표현이다. 두 번째 시 세 번째 구절의 영철(靈澈)은 중국 당나라 때 시를 즐겨 쓰던 승려다. 그는 승려로서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고 시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권만은 승려로서 시를 쓰던 영철과 조식을 비교하여 진정 세속의 욕심을 끊고 살아가던 이는 영철과 같은 산속의 승려가 아니라 조식과 같은 산림처사라고 표현하여 조식의 맑은 풍모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유학 조종이 남쪽에서 일찍 이름 감추고 
바닷가 산자락에 집을 이루었네 
예물 갖추고 세 번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범종 한번 쳐도 아직 소리가 없네 
지금까지 나라에서 구서를 추천했으니 
예로부터 궁성에서는 향기를 누리네 
동쪽 바라보다 문득 돌아가 섬돌에 오르니 
눈 내린 날 차가운 달에 그 모습 떠올린다   

宗儒南服早鞱名(종유남복조도명)
傍海臨山結構成(방해임산결구성)
聘幣三徵猶倦起(빙폐삼징유권기)
洪鐘一扣尙無聲(홍종일구상무성)
至今鄕國推龜筮(지금향국추구서)
從古宮牆享苾馨(종고궁장향필형)
東望便違陞砌級(동망편위승체급)
雪天寒月想儀形(설천한월상의형)

   
<안명하, 망신산산해정우회(望新山山海亭寓懷)>  


시인 안명하(安命夏·1682~1752)는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잇는 성리학과 예학을 깊이 연구하였던 인물이다. 세 번째 구절의 삼미(三徵)는 임금이 세 번 부르는 것으로, 조식이 조정에서 세 번 마련한 벼슬에 응하지 않은 사실을 말한다. 안명하는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매진한 점에서 조식과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앞의 네 구절은 조식이 산해정에 숨어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긴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다섯 번째 구절의 구서(龜筮)는 길흉을 점치는 물건으로, 일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재목을 말한다. 비록 조식을 천거해 등용은 못했어도 조정은 조식과 같은 재목을 추천함으로써 이미 아름다운 향기를 누린 것이다. 시인은 눈 내리는 하늘 차가운 달빛에서 조식의 서늘한 절개를 떠올린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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