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정 씨.
신발공장하다 시부모 모시러 김해행
시아버지 병간호하며 농사일 병행
틈틈이 익힌 농기계 이제는 전문가
이주여성 고민 상담해주는 멘토 역할


"농촌의 풍경이 그냥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농촌에 사는 농민들의 고통과 처절한 삶의 몸부림이 있기에 그 풍경이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요? 저는 지금 제가 선택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제30회 영농·생활수기 대상 '태산을 넘으면 평지가 보인다' 중에서)
 
신문동 범동포마을에서 만난 김미정(47·사진) 씨. 그의 집에 가니 소들이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각종 농기계가 즐비했다. 집 앞의 논에는 푸른 벼이삭이 넘실댔다. 그는 한때 부산의 신발공장 사장의 '사모님'이었다. 지금은 트랙터, 콤바인 등 어지간한 농기계는 모두 정비, 조작하는 전문 농사꾼이 되었다. 장유 농업협동조합 대의원이자 한국농업경영인회 김해시지부, 농촌지도자 김해시연합회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농민신문사 주최로 열린 제30회 영농·생활수기 대회에서 '태산을 넘으면 평지가 보인다'는 글로 대상을 받았다.
 
김 씨는 전남 고흥군 시골에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농사를 짓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때로는 도우면서 자랐다.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그는 절대 농촌으로 시집 가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농사일을 시작하게 된 건 시부모의 병 때문이었다.
 
"남편이 부산에서 신발공장을 했어요. 20여 년 전 경기 침체로 작은 공장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죠. 저는 경력을 살려 속셈학원을 운영해 보려고 했어요. 그때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형제들이 다 모였지만 모두 부모를 돌볼 형편이 안 됐다. 결국 막내인 김 씨 부부가 부모를 모시게 됐다. 김 씨는 남편 이주봉 (54)씨와 함께 1995년 추운 겨울 범동포마을로 이사했다. 이후 그는 13년 동안 시아버지를 모셨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도 시켜드렸다. 시아버지는 늘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남편 몰래 시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논가에 모셔 놓은 뒤 쟁기 달린 트랙터를 직접 끌고 논 한 구역을 간 일도 있었다. "며느리 참 잘 한다. 장하다"는 시아버지의 칭찬에 고무돼 논 1만 6천500㎡를 혼자 다 갈아버리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진흙밭에서 흑진주가 났다"며 효부상을 주기도 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밤 늦게 트랙터를 몰고 가던 중 다리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매일 반복되는 힘든 일과에 지치기도 했다. 몸이 불편한 시아버지를 돌보면서 4세 된 아들과 2세 딸을 키워야 했다. 집안일은 물론이고 시어머니가 밭에 가면 따라가서 일을 도왔다. 논 농사에 소 15마리까지 기르다 보니 하루 해가 너무 짧았다고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칭찬 한 마디에 겁 없이 농기계를 다루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모든 농기계를 조작할 수 있게 됐죠. 5년 전에는 경남도농업기술원에서 농기계 정비와 중장비 조작법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았어요. 농기계 조립 뿐 아니라 정비도 가능하죠. 농기계를 배우고 싶어하는 장유 아주머니들에게 직접 가르쳐드리기도 했어요"
 
김 씨는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들, 딸 어깨 너머로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 볏짚과 조사료 사업의 홍보와 판매도 컴퓨터를 통해 열심히 하고 있다. 요즘은 이주민 여성을 상대로 농사일을 가르쳐주고 고민도 상담해주는 멘토 역할도 맡았다. 바쁘지만 흙과 함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김 씨는 10년 전부터 전원생활의 기록을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에 매일 일기를 적었다. 그러다 석 달 전 장유면 농촌지도자 회의 때 김병윤 회장으로부터 영농사례를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자료를 준비하던 중 우연히 농민신문사 수기 대회를 알고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도시민을 상대로 주말농장 텃밭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벼 이삭 하나, 마늘 한 톨도 농민의 땀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어요. 하지만 물가가 불안정한 탓에 매년 농민들은 피땀 흘려 결실을 만들어 놓고도 제 값을 받지 못하죠. 그래서 정부의 물가안정 대책이 필요하답니다. 이를 위해서는 도시 사람들의 공감이 필요해요. 도시 사람들은 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죠. 그래서 자연학습과 더불어 흙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는 주말농장을 하려고 해요." 안주하지 않고 계속 걸어나가는 그의 얼굴에서 진정한 농민의 표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김미정 씨 원고 전문>
농민신문사 주최 제30회 영농·생활수기대회 대상 '태산을 넘으면 평지가 보인다' 전문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힘들어도 앞을 가로막은 벽을 당당하게 걷어차고 태산을 넘으면 평지가 보입니다. 저는 농사일이 힘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전남 고흥군 풍양면에서 농민의 딸로 태어나 부모님께서 농사 짓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도우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어릴 적부터 체험으로 알았습니다. 사시사철 부모님이 힘들게 일 하시는 걸 볼 때마다 농촌으로는 절대 시집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사업하는 경상도 총각 마음을 사로잡아 전라도 시골 아가씨가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부산 서면에 둥지를 틀고 남편은 신발공장 사장으로, 저는 전업주부로 살면서 토요일만 되면 김해시 장유면에 있는 시부모님 댁에 가서 농사를 거들었습니다. 시집 온 그해 보리수확 할 때, 4290㎡ 밭의 보리를 낫으로 작업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낫 사러 가는 길에 동네 농가를 둘러보았습니다. 논과 가까이 있는 한 주택의 허름한 창고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이곳에는 콤바인이 있겠구나' 싶어 창고 문 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콤바인이 2대나 있었습니다. 저는 무작정 바빠서 안 된다고 거절하는 주인을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30분을 설득해 콤바인을 얻어 작업했습니다. 그러자 시부모님은 "우리 며느리 최고다"라고 자랑하셨습니다. 동네 분들도 다 나와 구경하면서 "어디서 저런 며느리 데려 왔느냐. 전라도 아가씨가 생활력이 강하다!"라고 하시는데 제가 경상도와 전라도의 벽을 무너뜨린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농민이 된 계기였는지도 모릅니다.
 
20여년 전 경기 침체로 작은 공장들은 하나 둘 문을 닫고, 큰 공장들은 임금이 싼 베트남으로 이전을 하는 추세였습니다. 부산에서 가내수공업식 신발공장을 하던 남편은 공장 문을 닫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경력을 살려 속셈학원을 운영해 보겠다고 했는데, 남편은 생계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말도 못 꺼내게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형제들이 다 모인 가운데 어느 누구도 돌봐주지 못한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막내인 저희 부부가 시아버님을 돌보게 됐습니다. 이때 시어머님이 제 손을 붙잡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며느리가 셋이지만 난 너하고 살고 싶다. 집으로 들어와라."
 
농민의 딸로 태어나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기에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신 "어머님이 이사를 오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평생 어렵게 일궈 놓은 논과 하천변 밭 때문에 아까워서 안 된다. 들어오면 유치원을 차려 주겠다."
 
이렇게 어머님이 여러번 간절히 부탁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 귀농을 결심했습니다. 그후로 아버님 병구완을 했습니다.
 
1995년 12월 추운 겨울 시댁에 들어와 몸이 불편하신 시아버님을 돌봐드리고 4살 된 아들과 2살짜리 딸을 키웠습니다. 집안일은 물론이고 시어머님이 밭에 가시면 따라가서 일을 도와드리고, 논농사 3.3㏊에 소 15마리 정도를 기르다 보니 하루해가 너무 짧았습니다. '부지런한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란 소리를 들어가며 소처럼 일만 했습니다.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셋째가 생긴 줄도 몰랐지요. 그래서 덤으로 딸이 한명 더 생겨 자식을 셋이나 두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시아버님 병구완 13년 동안 대소변을 받고, 목욕도 군말없이 해드렸습니다. 시아버님은 자주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야 육신이 건강해 가고 싶은 곳엔 다 가 볼 수 있지만 아버님께서는 그럴 수가 없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그렇게 대답하며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래도 시아버님 덕분에 머리 자르는 기술을 익혀 이웃집 아이들까지 머리를 잘라줬고, 대소변 보실 옷을 만들어 드리다 아이들 옷도 만들게 됐습니다.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서 시아버님을 병원에 모셔 가기 위해 운전면허를 따고는 동네 어르신들까지 함께 모셔갔습니다. 주위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분들께서 '진흙밭에서 흑진주가 났다'며 효부상까지 주셨습니다. 거기다 몸은 왜소하지만 농사일로 단련된 체력 때문에 팔씨름 선수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면민체육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전자레인지와 밥솥 등을 타오고, 장유면 대표로 김해시 체육대회에 나가 메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없을 때였습니다. 시아버님을 휠체어에 태워 논 가에 모셔 놓고 자랑삼아 쟁기 달린 트랙터를 직접 끌고 논 한 구역을 다 갈았습니다.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트랙터에서 내려와 "아버님, 저 잘하죠?"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시아버님은 웃으시면서 "우리 며느리, 참 잘한다. 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시아버님을 집에 모셔다 드린 후 저는 기계 운전에 푹 빠져 논 1만6500㎡를 다 갈아버렸습니다. 이튿날 논을 본 남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누가 우리 논을 다 갈아 놓았네?"
 
"우렁각시가 해놓았나 보지요. 난 당신의 우렁각시죠."
 
남편은 이렇게 애교를 부린 제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신뢰해 주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말로 저를 칭찬해 주시는 주위 사람들 덕분에 겁 없이 농기계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지금에 와서는 모든 농기계를 조작할 수 있게 됐답니다.
 
늘어난 농사일로 인해 남편 혼자서는 힘이 듭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남편이 논 갈면 저는 뒤따라 써레질하고, 제가 콤바인으로 벼 타작하면 남편은 따라다니면서 짚 모으고, 남편이 짚 묶으면 뒤따라 랩을 씌우면서 부부가 손과 발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볏짚과 조사료 사업 등 농사와 연결되는 일들을 추진하다 보니 농업이 곧 기업이란 걸 알았습니다.
 
농기계 조작은 가능했지만 고장이 났을 때 정비를 할 줄 몰라 당황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5년 전쯤 경남도농업기술원에서 농기계 정비와 중장비 조작법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았습니다. 첫째날 이론교육에 이어 둘째날엔 트랙터·콤바인 조작법과 정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때 강사가 콤바인을 다 분해하고 나서 "조립할 수 있는 사람 나와 보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나가 능숙한 솜씨로 조립했습니다. 그러자 강사가 오후시간 실기교육은 저더러 직접 진행하라고 했습니다. 배우러 온 분들이 겁을 먹고 쉽게 기계에 올라가지 못하다가 여자인 제가 시범을 보여주고 가르치니 너도나도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강사가 보기에 좋았는지 김해시농업기술센터 담당자에게 전화해 저를 강사로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그후로 교육이 있을 때는 농기계를 배우고 싶어하는 장유면 아줌마들을 교육장까지 제 차로 모셔가 직접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분들이 남편들과 비슷하게 농기계를 잘 조작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위험천만한 사고도 겪었습니다. 밤 늦게 트랙터를 몰고 건너편 논에 가던 중 넓은 개천 다리가 갑자기 좁아지는 곳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트랙터가 부서질 정도였지만 저는 의식을 잠시 잃었을 뿐, 다행히 무릎과 팔꿈치에 타박상만 입었습니다. 주위 분들 모두 입을 모아 "조상님이 돌보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동네 어르신들의 추천으로 마을 새마을부녀회장을 13년 동안 맡기도 했습니다.
 
2001년엔 남편과 함께 마을 강둑길에 코스모스길을 조성, 행인들의 정서함양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저희 부부가 김해시장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또 농민으로서 적극적인 삶을 살기 위해 장유농협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올해에는 농협 대의원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들 어깨 너머로 컴퓨터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정보도 찾고 볏짚 조사료 사업의 홍보와 판매에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카페(cafe.daum.net/lch100j)를 만들어 농민으로서 느끼는 전원생활의 희로애락과 삶의 흔적들을 글로 담고 있습니다. 글이 많이 쌓이는 먼 훗날 책을 한권 내고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어 생각해 봅니다. 제가 꿈꿨던 속셈학원 운영은 못했지만 남편 따라서 농민으로 산 것은 참 잘했다 싶습니다. 농촌의 풍경이 그냥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농촌에 사는 농민들의 고통과 처절한 삶의 몸부림이 있기에 그 풍경이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요. 저는 지금 제가 선택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내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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