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병성의 그림 속에서 창 밖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종이비행기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항공사 정비사로 일하며 그린 작품들
근로자문화제에서 차례로 장려·우수상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 전폭적 지원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작품활동 시작
항공회사 신문광고 본 뒤 비행기에 관심
미술대전 두 번의 입선과 두 번의 특선
화실 모든 공간이 빽빽한 작품 수장고

"종이 비행기와 함께 그린 작품들 다양한 희망적 메시지 표현하려고 해"

산골 마을에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이 가장 먼저 본 교통편은 버스나 택시가 아니라 비행기였다. 그런데 소년의 마을 하늘 위로는 비행기 노선이 없었다. 소년이 본 것은 여객기가 아니라 군용비행기와 헬리콥터였다. 어쩌면 산골 마을에서 자란 소년소녀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소년은 훗날 항공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비행기를 그리는 화가가 되어 있다. 화가 윤병성. 어방동 대우유토피아 아파트에 있는 그의 화실을 찾아가보았다.

윤병성이 화실로 사용하는 아파트는, 주방을 제외하고는 온통 그림이다. 벽마다 그림이 걸려 있고, 방은 그림을 보관하는 수장고이다. 거실 한 쪽에는 미술잡지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는 거실 한 가운데에 이젤을 세워두고 그림을 그린다.
 
▲ 김해시 어방동 대우유토피아 아파트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윤병성 화가. 김병찬 기자 kbc@
윤병성은 1959년 경남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에서 4남 3녀 중 6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농사를 지었던 부모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가정환경조사를 하잖아요. 그때 '집에 대학생이 있느냐?'는 조사도 했는데, 그 질문에 손드는 아이가 저밖에 없었어요. 큰형이 부산대를, 작은 형이 마산교대를 다녔죠."
 
그의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소용되는 웬만한 물건은 모두 직접 만들어 썼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다 그랬던가 봅니다. 할아버지의 여동생인 왕고모님의 자손들도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계시죠. 제 형님들도 그림을 잘 그렸구요. 교대를 다녔던 작은형 덕분에 저는 초등학교 때 형님의 물감이나 붓을 사용하는 혜택도 누렸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서예를 잘한다는 칭찬도 받았다. 중학교 때는 미술교사로 부임한 이응조 선생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이응조 선생은 후일 마산, 부산의 화단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윤병성은 부산의 형 집에 같이 살면서 국립 부산기계공고로 진학했다. 기술 인재 배출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이 학교에는 당시만 해도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세계기능올림픽 출전을 꿈꾸며 열심히 공부했다. 지방대회와 국가대회를 거쳐야 세계대회에 나갈 수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도장과정을 익혀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학교 미술반에 꼭 들어가고 싶어 했다. 물론 그림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런데 형이 "그림 그리면 가난하게 산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난처한 상황의 그를  구원해 준 사람은 형수였다. 형수는 생활비를 아껴 물감과 붓을 사주었다. "기능올림픽에는 못 나갔지만, 고등학교 미술반이 오늘의 나를 만든 토대였으니, 결국 형수님이 저를 화가로 만든 셈이지요. 형수님이 형 몰래 물감비를 대주었던 사실은 1999년 첫 개인전을 할 때 털어놓았습니다. 정말 마음 깊이 감사한다고 인사도 드렸습니다. 형수님도 많이 기뻐하셨죠."
 
▲ '희망 그리고 비상'. 이 그림은 2003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항공에 정비사로 입사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는데, 노동부 주최 근로자문화제에 작품을 응모했다. 1983년에는 장려를 했고, 1984년에는 우수상을 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우수상 이상 수상자들을 위해 마련한 수상기념 청와대 오찬에도 초청됐다. "청와대 오찬을 마치고 나오니,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님이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을 보내왔더군요. 조 회장님은 '어떻게 정비사가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느냐'면서 저를 위해 전폭적인 후원을 해주셨어요. 회사 안에 40평 정도의 화실을 마련해주시고, 재료비 일체를 지원하셨어요. 그 덕분에 제가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직무도 정비현장이 아니라 일반 사무실로 바꿔주시고, 많은 배려를 해주셨죠." 조중훈 회장은 당시 지인들에게 선물로 윤병성의 그림을 주기도 했고, 집에 걸어놓을 80호 정도 크기의 대작을 부탁하기도 했단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안 된다며 프랑스와 미국에 가서 훌륭한 그림들을 보고 오라고 외국에도 보내주셨어요. 당시는 외국 나가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근로자문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주로 배를 그렸다. 항구에 정박한 오래된 선박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주를 이루었다. "부산기계공고 시절, 3년 내내 해운대 바다와 배를 보았습니다. 마산 어시장 앞 바다를 보기도 했지만, 아시다시피 해운대 바다는 훨씬 넓잖아요. 그 바다에서 보았던 배를 화폭에 담았지요. 가장 많이 보는 사물이 화폭으로 옮겨지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는 그림의 소재를 찾기 위해 배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배의 이야기를 찾아다니느라,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배를 빌려 영도의 조선소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 노력 끝에 폐선을 그린 작품으로 1999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입선을 했다. 15년 여 꾸준히 국전에 응모한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 미술서적이 빼곡한 거실 벽 서가 앞에도 그림과 화구들이 놓여 있다.
입선 직후 서울의 한 지인이 연락을 해왔다. "오늘 모 신문에 게재된 모 항공회사의 광고를 꼭 보라"는 것이었다. 그 광고에 사용된 사진은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가 아니라, 비행기를 밑에서 바라본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구도는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새로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 있다, 그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가득 메우더군요. 그렇게 그 광고 사진을 본 게 계기가 돼 비행기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근무하는 직장의 여건을 활용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죠. 보안실에서 허락을 받고, 바닥에 드러누워 비행기 밑바닥을 올려다보고, 사진도 찍고…."
 
그는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비행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그린 작품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두 번의 입선(2000년, 2001년)과 두 번의 특선(2002년, 2003년)을 수상했다. 그의 비행기 그림 속에서는 육중하고 무거운 비행기뿐만 아니라, 종이비행기도 날고 있다. "그냥 비행기만 그리자니, 뭔가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종이비행기를 그렸습니다. 꿈, 동심, 희망, 이런 의미를 담아 함께 그렸지요." 그의 화실에서는 종이비행기만 그린 작품들도 보였다.
 
그는 결혼을 하면서 1987년 회사 사원아파트가 있는 김해로 왔다. 1988년에는 김해에서 활동하는 류제열, 박영호, 장유수 등과 함께 김해미술협회를 창립했다. 이전에도 김해지역 미술가들의 모임은 있었지만, 이때 한국미술협회의 정식 인준을 받았다.
 
그는 현재 김해미술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화가들이 자부심을 갖고 안정적으로 그림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동아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매니지먼트학과 석사과정도 마쳤다.
 
한편, 그림인생에 대해서만 들었다 싶어 가족 이야기를 물었다.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직장인으로, 화가로, 또 김해미협 회장으로 살아왔어요. 그러다보니 가정이 늘 순위 밖으로 밀려났네요. 묵묵히 지켜봐주고 힘이 되어 주는 아내에게 고마워요. 그 마음으로 더 좋은 그림을 그려야지요."

>> 윤병성
김해미술협회 회장. 현재 대한항공 근무. 2005년 '2005 APEC'유공자 미대사관 표창, 2008년 경남도미술대전 초대작가상 외 수상 다수. 2003년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외 공모전 수상 다수. 노동부 부산북부지방청·근로복지공단·부산근로청소년복지회관·한진중공업 선박수리소, 일본 노동청 등에서 작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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