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앞 포구에 큰 배가 드나들었어요. 그 배에서 내리는 물건을 싣고 가려는 수레가 끝도 없이 줄지어 섰던 마을입니다."
 
장유로에서 신문동 범동포마을로 접어드는 길 입구에 '범동포마을'이라고 새긴 근사한 바윗돌이 있다. 곧게 뻗은 길 양쪽으로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가로수처럼 서 있다. 길 양쪽으로는 한여름 볕을 받으면서 알곡이 무르익어 가는 논들이 펼쳐졌다.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풍경이다.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맛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는 그 구절처럼, 걸어가 범동포마을에 도착했다.
 

▲ 범동포 마을 입구 표지석.
일제강점기 때 배 드나들던 김해 입구
끝도 없이 늘어섰던 말수레 행렬 장관
사람·물자 교류 많아 주민 일찍 개화
장유 기미년만세운동도 마을에서 계획
60가구 넘던 이웃들도 35가구만 남아


범동포마을은 조만강 인근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 1930년대 이후 주변의 개펄이 농지로 간척됐다. 마을회관을 지키고 있던 이상용(81) 마을노인회 회장을 만났다.
 
4대째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이 회장은 "우리 마을에서 장유의 기미년만세운동을 계획했다"는 말로 마을 소개를 시작했다. 김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장유면 무계리의 만세운동이 이 마을에서 시작됐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자연마을 취재를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 중 가장 큰 수확이다. "사람들은 무계리 만세운동이 대단했다는 것만 기억하지, 그 시작이 범동포라는 것은 몰라. 돌아가신 이학도, 김성명 두 마을 어르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지. 마을 앞이 바로 강이었고, 주변은 온통 갈대였지. 혹시 일본경찰이라도 들이닥치면 갈대에 몸을 숨겨 배를 타고 달아날 수 있도록 범동포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던 거야."
 
이 회장은 범동포에 배가 드나들었던 것도 기억했다. "일제강점기 때였지. 아주 어렸지만, 배의 큰 굴뚝에서 오르던 연기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 얼마나 큰 배였나 하면, 80㎏짜리 쌀가마를 500개는 너끈히 실을 수 있었지. 배 이름도 생각이 나네. '다케마루'라고. 범동포에서 출발한 배는 녹산, 명지, 하단, 송도를 지나 부산 새마당(부산 2부두)까지 오갔지."
 
▲ 범동포 마을 앞 수로. 1932년 구포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물자를 실어나르던 큰 배가 오갈 만큼 교류가 왕성했던 포구마을이었다.
이 배는 김해에서 농산물과 쌀을 싣고 가서 생활물자를 싣고 돌아왔다. 배가 들어올 때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다. "장유 일대는 물론이고 진영, 진례, 주촌, 김해읍내서 장사치며 물주며 사람들이 엄청나게들 와서 줄지어 기다렸어. 진영에서 온 말수레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던 장면은 장관이었지.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범동포를 김해의 입구라고 불렀어. 모든 생활물자며, 당시의 문화까지도 범동포를 통해 김해로 들어왔으니까." 사람이며 물자가 많이 드나들어 범동포 사람들은 일찍 개화했고, 자녀교육에도 열심이었다고 이회장은 말했다. "당시에 범동포에는 진주사범학교를 다니는 이도 있었어."
 
범동포에서 부산까지 오가던 배는 녹산에 수문을 만들고 구포교가 건설되면서 사라졌다. 더 이상 큰 배가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구포교는 1932년에 만들어 2008년까지 존속했다. 낙동강에 건설된 최초의 다리로 개통 당시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가장 긴 교량이었다.
 
"60가구가 넘게 살았던 마을인데 이제 35가구만 남았어. 예전 이야기를 들려주던 마을 어른들은 다 돌아가시고. 몇 년 전에도 기자양반처럼 어떤 여기자가 와서 마을 유래를 물어본 적이 있어. 하지만 이젠 그런 이야기를 묻는 사람도 없어. 범동포가 무슨 뜻인지 물어봤지? 범동포(凡東浦)라고 쓰는데, 나도 이 뜻을 알려고 무척 노력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돌아가신 이병태 김해문화원장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 분도 모른대. 동쪽에 있는 포구인데, '凡'자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거지. 여기뿐이겠어? 기록으로 분명히 남아있지 않다면, 자기 마을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마을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대로 잊혀지는 거야." 이 회장은 잠시 친구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거의 다 세상 떠났어, 마을 이야기 들려줄 사람들은. <김해뉴스>가 더 부지런히 다녀야겠네."
 
이 회장의 말이 끝날 즈음, 마을회관에 있던 다른 마을 어르신들이 소작한 바람을 한마디 덧붙였다. "장유가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이 마을에는 버스가 안 들어온다. 노인들이 병원 한 번 가면, 병원비보다 택시비가 더 든다. 하루에 두어 번만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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