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오항리로 불릴 만큼 큰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장원마을에 속해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한림면 용덕리에는 현재 오항마을이라는 행정지명이 없다. 오항은 장원마을에 들어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만 불려지는 이름으로 남았다. 어르신들이 세상을 뜨고 나면 그 이름조차 잊혀지겠다 싶어 오항마을을 찾았다.

▲ 멀리서 바라본 오항마을.  김병찬 기자 kbc@
용덕천과 오산 사이 길지로 '오목이'
장원마을과 합병돼 행정지명 사라져
장군차밭 매스컴 타며 전국적 유명세
벼농사 짓던 '어룡뜰' 황금물결 넘실
"어르신들 다 떠나면 잊혀질까 두려워"

현재의 용덕리는 원래 덕촌리였다. 오항리와 신천리 일부를 병합하면서 새로 만든 이름이다. 오항마을 앞에는 용덕천이 흘러간다. 마을 뒷산은 오산(烏山)이라 부른다. 까마귀 오(烏)자를 쓰는 데 까마귀의 목에 해당하는 지점에 산과 마을을 이어주는 고갯길이 있다. 그래서 오항마을에는 '오목이'라는 옛 이름이 전해져온다. 앞에는 용덕천이, 뒤에는 오산이 있어 이 마을은 배산임수형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마을 주변에서는 가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 파편이 나오고 있어 고대 적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직 정식으로 발굴된 적은 없다. 현재의 오항마을이 생겨난 것은 200여 년 전이다. 낙산마을에 큰 불이 난 뒤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낙산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던 의성김씨 가문도 오항으로 옮겨왔다. 후손인 김영근 씨는 "'오'자가 들어가는 산이 명산이라고 해서 의성김씨 선조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설명했다. 의성김씨 가문의 재실인 오산재는 마을의 옛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오산재 뒤에는 장군차밭이 있다. 오산재는 KBS-TV의 '6시 내고향'을 비롯해 여러 언론에 오산재 차밭으로 소개돼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오항마을에 20여 가구, 장원마을에 20여 가구가 남아 있어요. 그나마 할아버지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마을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실 어른이 몇 분 안 남았습니다." 오항마을이 속해 있는 장원마을의 김명도 이장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김 이장도 오항에 살고 있다. 한때 오항마을만 해도 70여 가구가 살았다. 그러나 용덕천을 따라 공장이 들어서면서 농사를 짓는 일이 힘들어지고 이농현상이 일어나면서 마을주민들이 하나둘 떠나버렸다.
 
▲ 마을 앞 어룡뜰에는 아직 농사를 짓는 가구가 있다.
오항마을 사람들은 용덕천을 따라 펼쳐진 들판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이 들판의 이름이 '어룡(魚龍)뜰'이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정래(80) 씨는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들판이었다. 물에 잠기면 그해 농사를 망치곤 했다. 과수원도 하고, 보리나 콩 농사도 지었다"고 말했다. 그는 "오항에서는 진영장보다 김해읍에 장을 보러가는 것이 가까웠다. 어른들은 쌀이나 콩자루를 이고, 닭 우리를 메고, 참외를 바지게에 가득 지고 장에 가서 생필품을 사 왔다. 큰 길이 없어 화포천을 따라 있는 마을과 마을을 돌다시피 하며 김해읍까지 걸어갔다 왔다. 해뜨기 전에 출발하면 해질 때가 돼서야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예전에 오항마을의 아이들은 이북초등학교까지 왕복 4㎞를 걸어다녔다. 현재 마을 앞에 놓인 다리 용덕교는 예전에 징금다리였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학교 갈 엄두도 못냈다. "개근상 받기는 아예 글렀던 거지." 조 씨가 예전 일을 들려주며 웃었다.
 
그는 또 마을의 아픈 역사를 들려주었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소나무에서 기름을 많이 채취했는데, 이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전투기에 쓸 윤활유 수입이 안 되니까 일본이 송탄유(소나무에서 짜낸 기름)로 대체했거든. 오항·장원마을의 피해가 극심했지."
 
오항 마을에는 당집과 당산목이 있었는데, 이것도 공장이 들어서면서 모두 없어졌다. 마을의 옛 일을 들려주던 조 씨는 '자연마을' 시리즈가 참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김해군청에서 재직하던 시절, 김해의 마을 이름을 찾고 그 이름의 의미와 유래를 후손들에게 알리는 운동이 벌어진 때가 있었다. 40여 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김해뉴스>가 김해 곳곳을 다니는 걸 보니 그때 생각이 난다." 그는 장원마을에 속해져버렸지만, 오항마을은 아직 남아있으니까 그 이름은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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