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선을 초대한다는 뜻의 초선대. 가락국의 거등왕이 칠점산의 선인을 초대해 가야금과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바다 건너 칠점산에 사는 담시선인
해마다 구월 구일에 초선대로 놀러와
거등왕과 향기로운 술 마시며 바둑 즐겨

부드러운 손짓으로 가야금 타던 선인
온화한 음성으로 "소원 이뤄질 것이오"
왜 땅에 개국한 선견왕자와 묘견공주
두 동생 소식 적힌 죽간 학이 물고 와
 


이른 새벽이었다. 거등왕은 크고 작은 바위들과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어디선가 달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유적한 숲속에서 정겨운 새 소리가 들려왔다. 완연한 가을 날씨 속에 초선대 안은 청량한 향기로 가득했다. 상수리나무에서 도토리들이 톡톡 떨어졌고, 참나무와 물푸레나무에서는 상쾌한 향훈이 흘러나왔다.
 
거등왕은 초선대의 경치를 완상하며 천천히 연화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비가 온 탓인지 연화대 주변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함께 온 시종들이 빗물을 닦아낸 후 호랑이 가죽을 깔았다. 거등왕은 화려한 호랑이 가죽을 밟으며 연화대의 가운데로 다가갔다. 흑요석으로 만든 바둑판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매년 구월 구일이 되면 담시선인과 거등왕은 향기로운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두곤 했다. 담시선인은 바다 건너 칠점산에서 푸른 학과 봉황을 벗 삼아 유요의 삶을 즐기는 신선이었다. 오늘이 바로 담시선인이 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거등왕은 매년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왕은 담시선인을 만나면 세상 시름을 잊고 선경에 빠지곤 했다. 때론 그의 벗이자 때론 스승이기도 한 담시선인. 거등왕은 선인을 만나면 그지없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거등왕은 바둑판 앞에 자리를 잡은 뒤 동행한 천부경(가야시대 관직)에게 옆에 앉으라고 권했다. 천부경은 왕비인 휘모정의 아비로 거등왕의 장인이었다. 왕은 따뜻한 미소를 천부경에게 보낸 다음 가향주를 따라 주었다. 천부경의 오른편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서 있었다. 바위 위쪽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아래쪽에는 젊은 남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부처님의 형상은 모후의 오빠인 장유화상께서 새긴 것이었다.
 
'선견 왕자와 묘견 공주는 잘 지내고 있겠지. 오늘따라 그들이 너무 그립구나.'

거등왕은 말없이 커다란 바위를 쳐다보았다. 바위 주변에는 녹의홍상을 차려 입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솔잎을 흔들었으며, 그 바람에 날린 잎들이 하느작하느작 떨어졌다.
 
커다란 바위는 위로 올라갈수록 차츰 좁아지는 삼각형 모양이었고, 회색빛이 전체에 감돌았다. 바위 아래쪽에는 바다 건너 왜의 땅으로 건너간 거등왕의 두 동생이 새겨져 있었다. 귀공자풍의 선견왕자와 아리따운 용모의 묘견 공주였다. 선견왕자는 묘견 공주와 함께 왜의 땅에서 나라를 개창했다고 오래 전에 알려왔다. 나라 이름을 야마다이국이라고 했고, 누이인 묘견 공주가 히미코라는 이름으로 여왕이 되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의 땅에 세워진 나라는 바로 대가락국의 아들 나라인 셈이었다.
 
'당차고 기특한지고. 비록 아녀자이지만 백 명의 영웅호걸보다 더 나은 여제가 아닌가?'

▲ 초선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 거등왕의 초상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미타여래인 듯하다.
거등왕은 뿌듯함을 느끼며 묘견 공주를 떠 올렸다. 모후인 허왕후는 생전에 묘견 공주의 인물됨을 늘 칭찬하셨다. 인자하고 너그러우면서도, 단호하고 철두철미한 성품이 제왕의 풍모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왕께 간청을 드려 일찌감치 왜의 땅으로 보냈던 것이다. 거등왕은 왕세자 시절 부왕의 명에 따라 왕자와 공주를 왜의 땅으로 파견하는 역할을 맡았다. 두 동생이 떠난 후 왕은 그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초선대 마애불 아래에 두 동생의 모습을 새겼던 것이다.
 
왕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초선대 옆 신어천이 돌돌돌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물가 주변에는 누릇한 갈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가끔 금빛 찬란한 잉어가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고, 누치들이 퐁퐁 튀어 올라 사방에 은린을 뿌려댔다. 신의 물고기가 내려와 노는 곳이라고 해서 신어천인가? 옥구슬이 바닥에 깔린 듯 신어천은 언제나 비취색이었다. 그 비취색 물빛은 초선대 푸른 숲을 고요히 반사해 더더욱 푸르게 빛났다. 이제 얼마 후면 담시선인이 신어천을 거슬러 올라와 거등왕 앞에 나타날 것이다.
 
대가락국의 창건주인 수로왕께서 귀천(歸天)하신 지도 벌써 20여 년이 되었다. 거등왕은 부왕께서 승하하신 다음 해에 가락국의 두 번째 왕이 되었다. 부왕은 거등왕에게 늘 바다 건너 왜의 땅을 주목하라고 하셨다. 수로왕족이 최후로 머무를 곳은 만경창파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그 섬이라고 강조하셨다. 그 혜안에 따라 선견왕자와 묘견공주를 왜의 땅으로 파견했고, 그들을 돕기 위해 수많은 철기와 물자를 보내주셨던 것이다. 거등왕 역시 부왕의 뒤를 이어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도왔고 그 결실로 가락국의 아들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형제분들이 그리우신 가 봅니다."
 
거등왕은 천부경의 목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이를 말씀입니까? 오늘따라 동생들이 너무 그립군요."
"금명간 두 분께서 소식을 보내오겠지요."
"허허. 그리 되면 좋으련만 너무 먼 곳이니."
"무소식이 희소식 아닙니까? 새 나라를 경영하느라 여유가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 초선대 담장과 수백 년 수령의 나무 숲.
거등왕은 아쉬운 맘을 달래며 가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때였다. 갑자기 동쪽 하늘이 환하게 밝아 오면서 일곱 개의 무지개가 떠올랐다. 그 무지개들 사이로 푸른 학 수 십 마리가 날개를 휘저으며 나타났다. 학들이 날아다니는 동안 신어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푸른 조각배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조각배에서는 옥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왔다. 흰 옷에 흰 수염을 나부끼며 담시선인이 가야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선인께서 오셨군요."

천부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이에 가득한 눈동자로 조각배를 쳐다보았다. 거등왕은 귓가에 맴도는 가야금 소리에 취한 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언제 들어도 사람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황홀한 소리였다. 진정 천상에 사는 신선의 모습이란 저런 것인가? 담시선인이 신어천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푸른 학들은 연화대 주변으로 날아왔다.
 
마침내 담시선인의 배가 초선대에 정박하자 왕과 천부경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담시선인의 얼굴은 백옥처럼 빛났고, 몸에서는 계수나무 향이 흘러나왔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용화가 연분홍 잎을 활짝 피워 올렸다. 선인은 초선대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깊숙하고 아늑한 미소를 띠우며 거등왕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외다. 왕이시여."
"먼 길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벗이 나를 부르는데 먼 길인들 뭐가 힘이 들겠오?"
"세속의 저를 벗이라고 칭하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허허. 그 무슨 겸양의 말씀을…."
"선인께서 초선대로 오시니 푸른 학들이 마중을 나오는군요."
"껄껄. 푸른 학이야말로 저의 오랜 벗이지요."

거등왕은 담시선인을 연화대의 바둑판으로 안내했다. 바둑판 옆에는 온갖 진귀한 안주와 향기로운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슬 먹고 사는 저에게 이 어인 음식이오?"
"허허. 가끔은 선인께서도 속세의 술을 드실 때도 있어야지요."

왕과 담시선인은 격의 없이 웃으며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았다.

"오늘은 저에게 몇 수를 가르쳐 주실는지요?"
"몇 수라니요? 이제 왕께서는 저와 대등한 실력이외다."

▲ 초선대의 사각정자.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쳐다보며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거등왕이 검은 돌을 잡았고 담시선인이 백돌을 잡았다. 거등왕이 먼저 한 점을 놓자 선인이 따라서 한 점을 놓았다. 어느새 바둑판 위에는 흰 돌과 검은 돌이 기하학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들이 바둑돌을 놓는 소리가 청아하게 초선대 숲속에 울러 퍼졌다. 가끔 새소리와 나뭇잎이 가웃가웃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밤이 이슥하여 투명한 이슬이 내릴 때까지도 바둑돌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돌 하나에 술 한 잔, 다시 술 한 잔에 돌 하나를 놓으며 왕과 선인은 흘러가는 시간을 희롱하고 있었다.
 
어느새 동쪽 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랐고 푸른 학들이 왕과 선인 주변으로 날아다녔다. 달그림자 속에 푸른 학들이 군무를 이루며 날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가 장관이었다.
 
"허허. 오늘은 비겼소이다. 왕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니 내 이제 검은 돌을 잡아야겠소이다."
"그 무슨 과찬의 말씀을."
"그런데 아까 무슨 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예. 감히 선인께 부탁이 있습니다."

담시선인은 왕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왕의 소망이 무엇인지 다 안다는 듯 한 미소였다. 이윽고 선인이 가야금을 꺼내 부드러운 손짓으로 줄을 타기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게 전해오는 현의 울림에 거등왕은 깊은 전율을 느꼈다.
 
이윽고 가야금에서 손을 뗀 담시선인이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왕께서 소망하신 일이 이제 곧 이루어질 것이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왕께서는 바다 건너 두 동생분의 소식이 궁금하시지요?"

순간, 거등왕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담시선인이 거등왕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긴 그는 신선이 아닌가? 어찌 인간의 눈으로 신선을 논한단 말인가?

"맞습니다. 제 용렬한 마음을 들켰군요."
"껄껄."

담시선인은 걸쭉하게 웃으며 가향주를 들이켰다. 선인이 가향주 잔을 내려놓자, 멀리 바다에서 푸른 학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왔다. 학은 선인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더니 입에 물고 있던 죽간을 선인의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선인은 그걸 거등왕에게 전해주었다.
 
"내 아까 용안을 뵙고 진작부터 그 마음을 알았소이다. 하여 이 놈을 몰래 왜의 땅으로 보냈지요. 그 죽간 안에 두 동생의 소식이 들어 있을 것이오."
"고맙소이다. 내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지…."
"벗에게 은혜라니 가당치 않소이다. 미욱한 나를 잊지 않고 초대하는 그 마음이 고마울 뿐이라오."

왕과 선인은 서로를 쳐다보며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연화대 주변에 있던 푸른 학들이 담시선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중 한 마리가 담시선인의 발밑에 몸을 낮추었다. 선인은 구름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학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선인을 태운 학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올라갔다.

"왕이여, 내년에 다시 올테니 오늘보다 더 향기로운 술을 준비하소서. 껄껄."

푸른 학들은 보름달을 향하여 일제히 날아갔다. 왕은 죽간을 가슴에 안고 보름 달 속으로 사라지는 담시선인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초선대 곳곳에 은 조각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았고 푸른 깃털은 꽃잎처럼 하늘에 나부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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