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어산(神魚山)은 신령스러운 물고기 모양을 그린 쌍어문(雙魚紋)에서 그 이름이 기원했다고 하고, 이 쌍어문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파사탑(婆娑塔)과 함께 들여왔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당시에 이미 불교가 한반도 남부에 들어왔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사실이야 어떻든 신어산은 많은 불교 전설을 안고 있으니, 불교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감로사(甘露寺)·금강사(金剛社)·구암사(龜庵寺)·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 寺)·이세사 (離世寺) 등 신어산의 불교 사찰이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 전란에 무너지고 사라진 상황이 너무나 많아서였는지 은하사(銀河寺)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에 대한 언급은 이학규(李學逵·1770~1835)가 읊은 다음의 두 시에서 잘 보인다.
성의 북쪽 은하사 | 城北銀河寺(성북은하사) | |
<이학규, 기서림선정유탄이상인(寄西林仙正留坦二上人)> |
골돌 연기 없이 등불 심지 더디 타고 | 榾柮無煙燈燼遲(골돌무연등신지) | |
<이학규, 야숙서림사탄공방(夜宿西林寺坦公房)> |
전설에 따르면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서역의 인도에서 와 서녘 서(西)자의 서림사를 창건하고, 이어 오른쪽 곁에 동녘 동(東)자의 동림사(東林寺)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은하사와 동림사는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이학규도 '서림사의 선방(禪房·승려들이 참선하는 방)을 다시 수리한 기록'이라는 뜻의 '중수서림사선방기(重修西林寺禪房記)'에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년) 가락국의 수로왕이 옛 토성(土城)의 동쪽 신어산 기슭에 서림사(西林寺)를 창건하였는데, 세 개의 불전(佛殿·불당)과 일곱 개의 승료(僧寮·승방) 및 영구암(靈龜庵)이었다. 절은 여러번 병란을 겪고 지금까지 1800년을 지나면서 너덧 번의 공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1800년대 초기의 <김해읍지>와 지도에 보면 신어산에는 서림사가 있고 바로 옆에 구암(龜菴)이 있고, 지금 은하사와 동림사의 위치와도 일치한다. 더욱 상세한 기록은 1911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펴낸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의 것인데, 그래도 창건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연혁은 잘 알 수가 없다. 은하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44년(인조 22년)에 중건되었고, 1688년(숙종 14년)에 십육전(十六殿)의 16나한상을 조성하고 1753년(영조 29년) 법고(法鼓)를 조성하였으며 1761년(영조 37년)에는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1797년(정조 21년)에는 취운루(翠雲樓)를 새로 세우고, 1801년(순조 1년)에 대웅전을 새로 세웠으며, 1803년(순조 3년)에 다시 사찰을 수리하고, 1812년(순조 12년)에는 승당(僧堂)과 취운루를 다시 수리하였다고 한다. 1831년(순조 31년)에 사찰을 다시 수리하고, 1835년(헌종 1년)에 대웅전의 관음보살상에 다시 금을 입히고, 후불탱(後佛幀·부처를 그려 불당 뒤편에 거는 그림)을 조성하였고, 1861년(철종 12년)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으며, 1866년(고종 3년)에는 청량암(淸凉庵)을 새로 수리하였고, 1892년(고종 29년)에 사찰을 새로 수리하였으며, 1904년(광무 8년)에 대웅전의 후불탱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04년에는 대웅전의 후불탱화를 조성하였으며, 1932·1938·1948년에도 절이 새로 수리되었다고 하고, 1970년대에는 대성(大成)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30여년 간 낡은 전각들을 보수하고 도량을 정비하여 현재의 가람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현존 절 건물로는 서림사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 화운루(華雲樓)를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왼쪽에는 설선당(說禪堂) 오른쪽에는 명부전(冥府殿)과 종각(鐘閣)이 있다. 또, 대웅전 뒤편 왼쪽에는 응진전(應眞殿)과 두 동의 요사채가 있고 오른쪽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현대식으로 지은 객사가 있다. 근래에는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를 촬영한 곳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제 조선조 후기와 말 김해에서 읊은 이학규와 허훈(許薰·1836~1907)의 시를 통해 당시의 은하사를 상상해보자.
바른 생각 헤아림 없이 세월을 보내더니 | 定知無計送餘秊(정지무계송여년) | |
<이학규, 서림사(西林寺)> |
금빛과 푸른빛 다락 비갠 경관 맑구나 | 金碧高樓霽景鮮(금벽고루제경선) | |
<허훈, 취운루차판상운(翠雲樓次板上韻)> |
허훈은 특히 시 뒤에 주를 달아 '절의 기록을 보면, 허왕후가 처음 올 때 수로왕이 전각을 장막으로 바닷가에 치고 그녀를 맞이하였고, 마침내 이 절을 지어 신에게 제사를 지내 복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곳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선조(宣祖) 임금 때 섬 오랑캐들이 지른 불에 타서 다시 수리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수백 년이 흘러 절 건물이 무너졌으니 매우 애석하다'고 하고 있다. 앞의 기록에서 보듯 여러번 절을 새로 짓고, 수리를 하였으나 또 다시 훼손되기를 반복하였던 은하사의 안타까운 모습을 본 시인의 답답함이 묻어난다. 더구나 자신의 선조인 허왕후를 위한 절이었다는 전설을 알고 있는 시인에게는 더욱 안타까웠으리라. 그래도 이 당시 취운루는 건재하였던 듯 시인은 금빛과 푸른빛으로 단청이 선명하고, 고요하며 평온한 당시의 풍경과 김수로왕과 허왕후 당대에 은하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물결인 양 은하수가 한 줄기 하늘 가로 이어지는 밤늦은 시간까지 감상에 젖어 있다.
철쭉꽃 지는 산속 달은 둥글고 | 躑躅花殘山月圓(척촉화잔산월원) | |
<이학규, 야숙서림사돈공방(夜宿西林寺頓公房)> |
산문엔 눈 내리는데 이제 지나가나니 | 山門衝雪此經過(산문충설차경과) | |
<허훈, 서림사(西林寺)> |
이학규가 은하사의 분위기와 자신의 감정에 시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면, 허훈은 김해 허씨의 후손답게 가락국 유물로서의 은하사를 주로 읊고 있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절이 황폐해지고 승려들도 많지 않은 은하사의 분위기를 그는, 승려들이 부르는 불교 노래인 범패가 마치 보통의 노래 소리 같다는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