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가까이에서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분명 개망초였다. 말린 개망초를 목판 위에 그대로 붙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지로 만든 작품이란다.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를 축소한 듯한 작품은 한지의 재료인 닥나무 껍질을 이용해 만들었다. 처음 눈길이 갔을 때는 물감을 사용해 그린 그림 같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한지를 자르고, 늘리고, 뜯어내어 붙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작품은 꽃처럼, 나무처럼 보였다. 한지그림 화가 박경희(50) 씨를 만났다. 그의 작업실은 주촌면 천곡리 1212-3에 있다.

▲ 한지그림 화가 박경희는 서랍장과 함에도 한지그림을 붙여 전통공예품의 멋을 더해준다. 김병찬 기자 kbc@

박경희의 작업실은 주촌면 천곡리 용덕마을(천곡리 1212-3)에 있다. 그는 남해고속도로를 오가며 용덕마을을 보았다. 용덕마을의 풍경에 반해버린 그는 "저 양지바른 곳에서 살고 싶다. 저곳에서 '나'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마을에 빈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준 이는 오빠였다. "제 작업공간으로 쓸 집을 알려준 오빠가 은인입니다. 제 마음에 꼭 드는 마을이에요." 키 낮은 담장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다. 서각가로 활동하는 남편 배기도 씨의 작품이다. "제가 사용하는 캔버스는 모두 남편이 짜줍니다. 저의 가장 큰 지원자죠."

간판을 보니 '한지풍경 떳다리공방'이라고 돼 있는데, 용덕마을 앞에 있었던 '떳다리'라는 지명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며 붙인 이름이다. 부부가 각자 하고 있는 한지그림과 서각작업의 내용도 이 이름이 다 말해준다. 집에 들어서니 한지그림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온다. 거실은 그의 한지그림과 남편의 서각작품으로 장식돼 있다. 마치 작은 갤러리 같다.
 
▲ 한지그림으로 장식한 팔각소반.
박경희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작고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4남매를 데리고 할아버지가 계신 김해로 옮겨왔다. "작은오빠는 깡통과 필름을 이용해 영사기를 만든 뒤 어두운 방에서 창호지에 비춰 보여줬을 만큼 손재주가 많았어요. 어머니는 부침개 하나를 하더라도 꽃잎을 예쁘게 놓아 화전을 부쳐내셨어요. 꽃과 풀, 네잎클로버를 두꺼운 책 속에 넣어 눌러두었다가, 추석 전 새 창호지를 바를 때 안에 넣어 예쁘게 장식하는, 그런 감성을 지닌 분이었어요. 밥상을 차릴 때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제 밥그릇, 국그릇, 수저가 각각 따로 있었어요. 일상 속 사소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항상 단아하고 품위 있게 그것을 표현해냈던 어머니의 손길이 있어 오늘날 제가 있는 거죠. 81세 된 어머니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좀 더 들려줬다. "손수건에 꽃물 들이고, 감꽃 주워 목걸이 만들고, 아카시아 줄기를 머리카락에 감아 퍼머한답시고 야단을 떨고, 오빠와 함께 해반천에 가 찰흙 파와서 그릇도 만들었어요. 오빠는 만들기대회, 저는 그림대회, 나갔다 하면 상을 받아왔어요."
 
그는 봉황초등, 김해여중, 김해여고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이 좋았어요. 고 1때, 첫 미술시간에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 미술선생님이 미술반 가입을 권했어요. 미대 진학도 꿈꾸었지만, 4남매를 홀로 키워내는 어머니로서는 힘든 상황이었죠. 그래도 혼자서 계속 서양화를 그리면서 붓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표현하고 싶은 자연물 유심히 관찰 후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오롯이 끄집어내
손으로 찢고 늘여 붙여 표현한 세밀함


결혼을 해 두 딸을 낳아 키우고 있을 즈음, 종이접기가 크게 유행했다. 아이들한테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 박경희는 종이접기를 시작했다. 종이공예와 관련된 모든 프로그램을 다 배웠고, 자격증도 땄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처음으로 한지그림을 접했다. "서양화, 한국화, 수채화 같은데 한지를 붙여 만든 그림이라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그 길로 한지그림을 시작했습니다. 한지그림 화가로 유명한 마산의 안봉선 선생님 밑에서 배웠어요. 김해의 곡산 이동신 선생님이 중간에서 소개를 해주셨죠. 4년 정도 김해와 마산을 오가면서 배웠습니다. 어느 날 안봉선 선생님께서 '이제 너 혼자 해봐라. 너의 색을 찾아라. 하다가 힘들면 찾아와라'고 하시더군요."
 
▲ 한지가 빼곡하게 걸린 진열대.
말하자면 '하산해도 된다'는 인정을 받은 셈이지만, 박경희는 늘 초심을 잃지 않고 작품에 임한다. 한지의 색채, 질감, 양감을 살려내고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내는 한지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한지는 자연색 그대로 옮길 수 있죠
어떤 사물에도 작업 가능해 재밌어요"

한지그림을 캔버스에 그릴 때는 하얀 초배지를 먼저 바른다. 그 위에 기본바탕이 될 한지를 붙인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물에 맞는 한지를 붙여나가는데, 음영과 명암도 계산해 한지로 표현한다. 한지를 모양에 맞게 찢어내기도 하고, 손으로 살살 펴서 늘이기도 한다. 손으로 늘이면 한지의 숨겨진 결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보풀이 일어나기도 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는 손길이 가야 한다.
 
"물감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색이 나타나지 않아요. 농도조절에 따라 다르고, 어디에 칠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그에 비해 한지는 눈으로 본 그 색 그대로 표현이 됩니다. 원하는 색의 한지가 없으면 염색도 합니다. 작품을 만들 때는 전부 손으로 하지요. 가위질은 전체 작업의 10%도 안됩니다."
 

그의 작업실 겸 집에는 구석구석 한지가 놓여 있다. 문방구의 진열대처럼 걸어둔 색색의 고운 한지도 있고, 소중하게 말아서 모셔둔 한지도 있고, 사용하고 남은 것을 보관하는 상자도 있다. 우리나라의 한지도 있고, 일본에서 사온 화지도 있다. "평생 쓰고 남을 만큼 있는데도, 아직도 눈에 띄기만 하면 사고야 말죠." 종이를 보여주던 중 그가 손바닥만한 상자를 열어보였다. 노란 가루가 들어 있었다. "꽃씨, 씨앗을 표현하기 위해 가위로 잘라 둔거예요." 가위로 잘랐다기보다, 분쇄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입자가 조금 거친 노란 가루이지, 이게 어떻게 종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런 걸 어떻게 붙인단 말인가. "족제비털로 만든 붓에 풀을 묻히고, 그 붓끝으로 종이가루를 조금씩 묻혀서 붙입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제서야 개망초가 진짜 꽃처럼 보였던 이유가 이해됐다.
 
그의 작품 가운데 화포천의 가을을 표현한 것이 있는데, 화포천의 억새와 갈대를 어찌나 섬세하게 표현했던지 마치 사진처럼 보였다. 손으로 한지를 늘여 느낌을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물감으로 그린 그림은 가까이에서 보면 붓 터치가 보인다. 그런데 한지그림은 가까이에서 봐도 진짜 같다.
 
그가 한지그림을 배운 후 만든 첫 작품은 매화였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이라 제 첫 작품에 매화를 모셨죠. 첫 단추를 채운다는 마음으로요. 매화는 또 김해의 시화이기도 하구요. 30호 크기로 만들었는데, 그 작품을 아직도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은 저를 부를 때 '매화'라고 불러요."
 
▲ '개망초' 한지그림의 일부. 실물을 말려 붙여놓은 것처럼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그는 늘 주위의 자연을 눈여겨 살핀다. 표현하고 싶은 대상물이 있으면 보고 또 본다. 꽃을 볼 때는 꽃말과, 꽃에 얽힌 전설도 새긴다. "단순히 꽃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꽃의 이야기를 그리는 겁니다." 그의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풍경이 마치 실제처럼 보이는 건, 그의 재능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마음까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그림은 꼭 캔버스에만 그리는 건 아니에요. 목판, 기와, 돌, 도자, 유리창… 종이가 붙는 소재라면 어디에나 한지그림을 그릴 수 있죠. 또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모두 표현할 수 있어요. 그게 한지그림의 매력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재미있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용덕마을에 들어온 건, 나이 들어도 재미있게, 끝까지 한지하고 함께 놀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을 할머니들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한지그림도 그리고, 동네 벽화도 그려보고 싶어요. 곧 한지체험교실도 열어보려 합니다. 그때 용덕마을에 또 놀러오세요."

≫ 박경희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역임. 한양예술대전 심사·초대작가. 김해미술대전 운영·추천작가. 경상남도 공예품대전 동상 2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입선. 현재 '한지풍경' 운영, (사)한양문화예술협회 경남지회장. 2013년 초대개인전/인도 샤르나르(초전법륜지. Maha bodh temple community school). 개인전/서울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 부스개인전/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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