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최초 물류창고 '남선창고' 터 출발
이야기 전시관 '이바구공작소'까지
간선도로와 골목·마을 잇는 1.5㎞ 구간
고단한 삶과 질곡의 자취들 찾아내
이야기로 풀어내는 부산 근현대사 이면

부산역 건너편 버스정류소. 보도 한쪽에 '초량 이바구길' 안내판이 서있다. 이곳이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중 하나인 '초량 이바구길' 입구이다. '이바구'는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로, 초량 산복도로에 얽힌 역사와 인물, 서민들의 삶의 흔적을 기록해 놓은 길이란 뜻이다.
 
'이바구길'은 부산 최초의 물류창고인 남선창고 터에서 출발해, 초량산복도로에 위치한 이야기 전시관인 '이바구 공작소'까지 이르는 1.5㎞ 구간의 골목길이다. 간선도로와 산복도로를 골목으로 이으며, 부산 근현대사의 이면을 이야기해준다.
 
▲ 담장 갤러리. 부산의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

주요 코스로는 남선창고 터~옛 백제병원 건물~담장 갤러리~초량초등학교 담장의 '이바구 갤러리'~우물 터~168계단~김민부 전망대~초량 당산~더 나눔 기념관~이바구 공작소, 그리고 유치환 우체통~게스트 하우스 '까꼬막'~산복도로 마을카페 등이다.
 
산복도로와 골목, 그리고 골목과 마을을 서로 이어가며, 산복도로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질곡의 자취들을 찾아, 이야기를 발굴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며, 골목 곳곳에 알록달록 이야기를 입혀나가고 있는 곳이, 바로 초량 이바구길이다.
 
초량 이바구길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부산 최초의 근대화 창고인 남선창고 터. 부산역 건너편에 있던 남선창고는 주로 함경도에서 부산항으로 들여온 명태를 보관했다고 해서 '명태고방'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철거돼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다. 주차장 한쪽의 붉은 벽돌 담장만이 '명태고방'의 흔적으로 쓸쓸히 남아있다.
 
남선창고 터 옆에는 예의 붉은 벽돌 건물의 옛 백제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1922년 설립된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으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동시대의 붉은 벽돌의 건축물로 그 아름다움이 남달랐던 두 건물이, '남음'과 '사라짐'의 기로에서 그 운명을 서로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린 '168계단'.
담벼락 장식한 시와 산문 그리고 사진들
피란민 애환 168계단·유치환 우체통
숙박시설 '까꼬막'·카페 '천지빼까리'…

본격적으로 골목길을 접어들면 골목 담벼락에 산복도로를 노래한 예술인들의 시와 산문, 사진들이 걸려 있다. '담장갤러리'이다. 산복도로를 노래한 강영환 시인의 '산복도로' 연작 시편들과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의 산복도로 관련 글, 사진작가 고 최민식 선생의 산복도로 사진들이 아스라한 추억으로 전시되어 있다.
 
계단을 조금 오르자, 곧이어 초량초등학교와 초량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초량교회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중국 상하이로 보내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담벼락에는 초량 산복도로의 옛 풍경과 변화상, 초량 출신의 정치·경제·문화계 인물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산복도로의 풍경을 그린 벽화와 조갑상 작가의 글이 한데 어우러져, 산복도로의 정취를 잘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가파른 계단을 이어가며 오르다 보면, 곧이어 더 큰 비탈의 계단과 맞닥뜨린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린 168계단이다. 이 계단을 따라 산복도로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마치고, 한 계단 한 계단 남루한 집으로 올랐을 것이다.
 
계단 입구에는 산복도로 사람들이 물을 길어먹었던 우물이 있다. 우물은 아직도 하늘을 파랗게 담고 넉넉하게 찰랑인다. 나무 이파리 하나 바람에 날려 우물 안으로 떨어진다. 동그랗게 파문이 일자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온다.
 

▲ 부산항이 발 아래로 조망되는 '김민부 전망대'.
가파른 계단을 한 계단씩 헤아리며 숨이 찰 때쯤 '김민부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국민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한 고 김민부 시인을 기려 만든 곳으로, 부산항이 발 아래로 조망되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전망대 매점에서 커피를 한 잔 시켜 마시며, 산복도로 마을 밑 풍경을 일별한다. 확 트인 전망에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동구와 중구, 남구 일대는 물론 부산역과 부산항, 북항대교의 위용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영도의 봉래산 정상도 깨끗하게 조망된다.
 
계단 길을 올라 다시 골목길을 계속 걷다보면 '초량 당산'이 나온다. 매월 음력 3월과 9월 보름에 산복도로 사람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당산제를 지낸다. 여타 당산과 달리 이곳은 할배신과 할매신의 전각을 각각 따로 모셔놓은 것이 특징이다.
 
마침 당산제 다음 날이라 마을 사람들이 당산에 옹기종기 모여들 있다. 곳곳에 형형색색의 꽃들과 제를 모신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몇몇 사람은 당산나무에 허리를 깊숙이 숙여 비나리를 하고 있다. 당산 옆 감나무는 가지가 휠 정도로 대봉감을 달고 있다. 아마도 올 가을걷이는 풍~성할 모양이다.
 
초량 산복도로에 오른다. '이바구 공작소'가 보인다. 이곳은 누구나 부담 없이 들렀다 갈 수 있는 갤러리이자 여행자들의 쉼터다. 아울러 '이바구 공작소'는 이바구길의 역사관 격이기도 하다. 매달 다양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의 이야기를 전시로 기획할 예정이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는 매축지마을 어르신들이 쓰던 요강에 얽힌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하여, 사용하던 요강과 함께 전시한 '요강뎐'이 열렸다. 사진작가 김홍희 씨의 산복도로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다.
 
요즘은 '골목, 역사를 품다'라는 주제로, 산복도로와 관련된 인물과 역사를 스토리텔링 하여 전시하고 있다. 일신여학교 출신 소설가 김말봉, 일제시대 부산경찰서 폭파사건을 주도한 오택, 초량 태평정미소에서 시작해 눌원문화재단을 설립한 신덕균…등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활동한 수많은 인물들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 유치환 우체통. 이 우체통에 편지를 부치면 6개월 후 받아볼 수 있다.
이바구 공작소 아래에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고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더 나눔 센터'가 서있다. 장기려 박사는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와서 복음병원(고신대의료원 전신)을 설립하고,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는 등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분이다. 그의 청빈한 생애와 나눔의 정신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산복도로를 따라 수정아파트 방면으로 가다보면 산복도로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유치환 우체통'이 나온다. 한국의 대표시인 청마 유치환의 예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청마우체통'은 살아 생전 그가 연인이었던 시조시인 이영도 여사와 주고받았던 편지의 추억을 되새기고자 만들어졌다. 전망대를 겸하고 있는 우체통 너머로 부산항의 푸른 바다가 '노스탤지어'처럼 펄럭이고 있다. 이 우체통에 편지를 부치면 6개월 후 받아볼 수가 있다.
 
▲ 청마우체통 건물과 2층에 마련된 시인의 방.
청마우체통 건물 2층에는 '시인의 방'이 꾸며져 있는데, 청마를 회상하는 영상실이 있고, 바다를 한눈에 조망하며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카페가 꾸며져 있다. 영상실 벽에는 청마의 '우편국'이라는 시가 쓰여 있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드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라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청마우체통 근처에는 산복도로 종합체험센터이자 게스트 하우스 '까꼬막'이 있다. '까꼬막'은 산비탈의 경상도 사투리. 산복도로를 오르려면 이 '까꼬막'을 올라야 한다. 이 '까꼬막'을 올라서야 하늘 아래 첫 동네 '산복도로 마을'이, 별처럼 반짝이며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까꼬막'은 옛 피난민들이 살던 판잣집을 형상화하여 지었는데, 외지인들이 산복도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숙박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옆으로는 마을 카페 '천지빼까리'가 있고, 마을기업 '골목점빵'에서는 샴푸, 비누, 천연조미료 등 마을사람들이 직접 만든 수제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한편 부산 동구청에서는 지난 9월부터 내년 3월까지 한시적으로 '산복도로 버스투어'를 시행하고 있다. '부산의 지붕을 달리다'라는 슬로건으로,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하는 투어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고 있는 것. 부산의 과거와 현재가 시원한 전망과 함께 이야기로 다가오는 관광 상품인 셈이다.
 
▲ 내년 3월까지 한시적으로 동구청에서 운행하고 있는 '산복도로 투어' 버스.
점점 슬럼화되고 있는 초량 산복도로 일대. 이곳을 풍요로운 삶과 문화의 향기가 흐르는 곳으로 되살리자는 취지의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이 사업 중 하나인 '초량 이바구길'은 초량 산복도로를 배경으로 하여 다양하게 풀어내는 이야깃거리와 근·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전한다.
 
산복도로에 알록달록 이야기의 옷을 입히고, 산복도로 곳곳에 이야기가 있는 테마 건축물을 들여놓음으로써, '초량 이바구길'은 산복도로 사람들의 '삶의 역사'가 부산의 대표적 근현대사의 '이바구 명소'로 한창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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