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개국삼등공신 송유충의 후손들
담안마을에 터 잡아 청주송씨 집성촌
사충신 송빈 공 추모 재실 첨모재 전해

하천 따라 수백년 수령 고목들 웅장
교육열 높고 애향심 남다른 명품 고장

"김해 사충신 중의 한 분인 송빈(1542~1592) 공을 향사하는 유서 깊은 담안마을입니다."
 
진례면 담안리 담안마을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 담안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저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웅장한 자태의 고목 여러 그루가 반겼다.
 

▲ 담안마을에 들어서면 수백 년 수령의 고목이 손님을 맞는다. 오른쪽 나무는 도로를 낼 때 뽑힐 뻔했으나, 마을 주민들이 끝내 지켜냈다.

"하천 따라 수백 년 된 고목들이 늘어서 있었죠. 공장이 들어서고, 도로를 넓히면서 더러는 뿌리째 뽑혀나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남아 있는 고목들은 마을 주민들이 지켜낸 겁니다." 송세명(58) 이장이 하천 따라 서 있는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송 이장은 많은 나무들이 뽑혀나갔음을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담안마을의 나무들은 아름답움을 발했다.
 
담안마을은 청주송씨의 집성촌으로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고려말기에 예부상서를 지낸 송춘(宋椿)의 아들 송유충(宋有忠)은 조선개국삼등공신으로 청원군에 봉해졌다. 청원군은 청주의 옛이름이다. 이후 송씨는 청주를 본관으로 했고, 그 후손들이 김해 진례에 터를 잡았다. 담안마을 뿐만 아니라 진례 전역에 청주송씨가 살고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청주송씨가 살고 있는 지역이다. 담안마을도 예전에는 한 두 집만 다른 성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45가구 16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마을 뒤로 보이는 산으로 올라서면 불티재이다. 불티는 한자로 불현(佛峴)이라 쓰고 있다. 우리나라 산 곳곳에 '불티' '불현'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주로 돌부처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담안마을에는 옛날부터 '불티재'로 불렸다는 이야기만 전해져온다.
 
"담안에서 김해로 가려면 불티재를 넘어 주촌으로 가야 했습니다. 불티재 오른편에는 양동산성이 있고, 왼편으로 가면 황새봉이 있어요. 가야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산길인데, 그 길을 다니는 등산객들도 많습니다." 송 이장이 마을 뒤의 산세를 설명했다.
 
'담안'이라는 지명은 담안리의 한자인 담안(淡安)과는 다른 이름이다. 담안마을의 이름에 대해 <김해지리지> 등의 기록에는 한자로 장내(墻內)라고 한다고 남아 있다. 마을 주변 지형이 마치 담으로 둘러싸인 듯 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진사가 많이 나고 학문 높은 마을이라 해서 김해부사가 석축을 쌓아 마을을 보호했는데, 그 석축담 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담안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김해 사충신 송빈 공을 향사하는 첨모재와 그 앞에 세워진 유허비.

송유석(74) 개발위원장은 옛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옛날, 김해 고을 원(김해부사)이 백성을 핍박하고 탐욕을 부려 백성들이 굶어죽을 판이었다. 상소를 올려도 소용이 없었다. 담안의 송씨문중 어른들은 김해 유림들과 의논 끝에 부사를 끌어내 가마에 실어 삼랑진 앞까지 데려가, 배에 실어 보냈다. 뒤에 암행어사가 왔는데, 백성을 위해 한 일이라 죄를 묻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유학의 가풍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마을에는 주민들의 자녀 교육열 역시 높다. 송 위원장은 "서울대학교며 명문대에 적을 둔 학생이 없는 해가 없었을 정도로 교육열도 높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설명했다. 마을에서 나고 자라 외지에 나간 젊은 세대들도 마을을 극진히 생각한다. 담안마을청년회는 정기적으로 마을청소를 한다. 담안천 살리기 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맑은 물을 되찾았다. 청년회의 회원들 중에 마을에 살고 있는 이가 드물다. 그래도 그들은 부모가 살고 있는 마을이니 찾아와 청소를 하고 마을 일을 의논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송 이장은 "마을사람들이 마을 주변의 생태와 환경 보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을에 들어선 공장들도 마을 환경에 신경을 써주기 바란다"는 바람을 털어놓았다.
 
마을 위로 올라가면 첨모재가 있다. 청주송씨 문중의 재실로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지키다 순국한 송빈 공을 추모하는 곳이다. 송빈 공은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다. 김해부사 서례원이 송빈 공에게 왜군의 침략 문제를 함께 의논하기를 청했는데, 그는 이때 이미 나이가 50대에 이르렀다. 공은 장남에게 집안을 부탁하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김해는 영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을 잃게 되고, 영남을 잃으면 나라가 모두 적의 것이 될 것이니,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김해뉴스 2012년 5월 2일자 '김해인물열전' 보도). 첨모재에는 송빈 공의 별묘(신주를 모시는 사당)가 있고, 입구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김해 역사의 한 대목을 말해주는 소중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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