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구암에서 바라본 신어산의 서쪽 산자락. 물결치듯 이어지는 산자락 위에 구름과 놀을 한자락 얹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영구암(靈龜庵)은 신어산(神魚山)의 발원지라는 말이 있으니, 신령스러운 물고기 즉, 신어가 살았다는 샘이 여기에 있었다고도 한다. 영구암은 낙동강 하구나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서 바라보면 산에서 거북이 기어 나오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제대학교를 지나 신어산 삼림욕장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동림사(東林寺)와 은하사(銀河寺·西林寺)가 있다. 은하사 쪽으로 길을 잡아 가다보면 '영구암 1.5㎞'라고 적힌 푯말을 만나게 된다. 다소 멀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가파른 곳도 있으나 천천히 걸으면 느긋한 기분마저 느끼게 하는 숲길이 참으로 정겹다. 이 푯말에서 1.1㎞를 가면 왼쪽으로 '영구암 0.4㎞'라는 푯말이 보인다. 거친 바윗길을 걸어 올라가 절 입구쯤에 이르면 이 절이 왜 거북 구(龜)자를 절 이름에 붙이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바위의 절경이 펼쳐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을 구암사(龜巖寺)라고 적고 신어산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위 암(巖)자로, 아마도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불리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00년대 초의 <김해읍지>에는 '구암(龜庵)은 서림사(西林寺) 위에 있다. 사람들이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지도에도 표시해두었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는 얼마나 경관에 반했으면, 이곳을 사람들이 작은 금강산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구암암(龜巖庵)이라고도 하였는데, 아무리 이름이 여러 가지로 불리어도 끝내 빠지지 않는 것은 '거북'이니, 마치 구지봉(龜旨峰)의 거북과 짝을 이룬 듯도 하다.
 
▲ 영구암 삼층석탑. 이 석탑이 놓인 곳이 바로 거북의 머리라고 한다.
바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 절에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이 몇 채 있고, 오른쪽 언덕 위로 가면 삼층 석탑이 있는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당히 훼손되어 있긴 하지만 고풍스러운 모양이 참으로 세월을 잘도 머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왜 이곳이 작은 금강산이라고 불렸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정확히 알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저 앞으로 김해 시내와 평야, 강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는 서쪽을 향해 굽이치는 산자락들이 물결치듯 한 폭의 산수화를 선사한다. 여기에 뒤로 신어산 정상의 자연 병풍이 절을 감싸안고 있으니, 절로 '아아!'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여기에다 석양을 하나 더 얹으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이 탄생한다니, 그때는 뭐라고 감탄을 해야 할까? 조선 후기 시인 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에게 답한 편지 '답정참의약용서( 丁參議若鏞書)'에 '김해부에는 동쪽에 영구암이 있다. 암자는 신어산 꼭대기에 있는데, 돌로 지은 누각과 단풍 숲의 빼어남은 영남 동쪽에서는 최고다. 맑은 낮이면 대마도를 볼 수 있으니, 소라인 양 옥으로 만든 죽순(竹筍)인 양 구름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은하사를 수리한 기록인 '중수서림사선방기(重修西林寺禪房記)'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서기 42년)에 가락국의 수로왕이 서림사를 창건하였다. 세 개의 불전과 일곱 개의 승방 및 영구암이었다'라고 하였다. 은하사를 창건할 때 영구암도 지었다는 말이다. 창건 연대를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를 해두고 어쨌든 영구암이 은하사와 그 역사를 같이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학규는 이러한 기록 외에도 영구암을 읊은 시를 여러 수 남겼다. 다음 시는 그가 영구암에서 주변을 바라보면서 읊은 것이다.

한식날 납릉은 탱자꽃 천지라오
서림 가서 진달래 구경하놋다
가장 좋을 손 영구암에서 바라보면
맑은 저녁 안개낀 숲의 대마주라오 

納陵寒食枳花天(납릉한식지화천)
去向西林賞杜鵑(거향서림상두견)
最好靈龜頭上望(최호영구두상망)
晩晴煙樹馬州堧(만청연수마주연)

   
<이학규,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  


시인은 납릉 즉, 김수로왕릉 주변에 핀 탱자꽃, 은하사 주변에 흐드러져 지천으로 피어있는 진달래로 시선을 옮긴 다음 영구암에서 다시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맑은 봄을 맞아 김수로왕릉을 지나고 은하사를 지나 영구암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는 기행의 느낌이 든다.
 
조선조 초기 시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이 절에서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동쪽 고개 소나무는 나무인데 
불당에서 사람이 거기다 절하네 
남명 내가 늙어가는구나 
구차히 산의 영지나 찾다니  

東嶺松爲木(동령송위목)
佛堂人拜之(불당인배지)
南冥吾老矣(남명오노의)
聊以問山芝(료이문산지)

   
<조식, 제구암사(題龜巖寺) 재김해(在金海)>  


▲ 영구암 입구의 바위. 이 바위를 비롯하여 주변은 모두 절벽으로, 전체의 모양이 거북이 굴에서 나오는 모양이라 한다. 앞에 제단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지금도 이 바위의 영험을 믿고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첫 구절 '東(동)'이 조식의 문집 <남명집(南冥集)>에는 '冬(동)'으로 되어 있다. 동녘 동(東)자나 겨울 동(冬)자나 같은 평성(平聲)이라 문제는 없으나, 내용으로 보아서는 동녘 동자가 어울린다. 조식은 처가인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거의 20년을 지냈다. 조식은 산을 통해 수양하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을 열두 번이나 올랐다. 산을 그렇게 좋아하던 그였기에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신어산 자락을 여러 차례 찾았을 것이다. 이 시는 그 당시에 영구암에 들러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아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었으므로 암자는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에서의 동쪽 고개 소나무는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신목(神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절에 와서 부처에게 절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신목에 절을 하고 있다. 그러하듯 조식 자신도 마음이 늙어가는지 스스로를 수양하려는 태도는 어디에다 버리고 좋은 약이나 찾는 것이 한심스럽다는 표현이다. 실제로 당시 영구암 불당 동쪽에는 신목이라 불릴 만한 큰 소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조선조 후기 김여진(金汝振)의 시다.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닌데, <김해읍지>에 다음 시가 실려 있고, 자신의 문집인 <상재헌문집(相在軒文集)>에 39수의 시가 실려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상당히 명망이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는 단 두 줄밖에 남지 않았다.


만겹 물결은 먼 바다에서 돌아오고 
천겹 산이 높은 구름 속에 들어갔네   

水納萬泒歸海遠(수납만고귀해원)
山連千嶂入雲高(산연천장입운고)

   
 
시인은 부산의 승학산(乘鶴山)과 가덕도(加德島) 사이로 멀리 다대포(多大浦)의 몰운대(沒雲臺)와 거제도 주변 바다에서 낙동강으로 시선을 옮겨가고 있다. 하구언 등의 시설이 없었던 그 옛날에는 밀물 때 바다 수위가 높아지면 낙동강으로 바닷물이 역류하여 올라왔으니, 실제로 물결이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다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려 영구암 경관 가운데 제일인 구름 속에 물결치고 있는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다.


푸른 하늘 숨소리 가쁘게 하더니
절벽에 높은 난간 두었네
나무 끝에서 중의 말을 듣고
섬돌 앞에서 산비둘기를 본다
가을은 소먹이는 물가부터 차가워지고
하늘은 대마도 쪽으로 넓게 열렸다
전에 보았던 이 산 빛 생각하며
성 안에서 날마다 본다  

靑冥驚歊歔(청명경효허)
絶壁置危欄(절벽치위난)
木杪聞僧語(목초문승어)
階前見鶻盤(계전견골반)
秋從牛渚冷(추종우저냉)
天向馬州寬(천향마주관)
緬憶玆山色(면억자산색)
城中日日看(성중일일간)

   
<이학규, 영구암(靈龜庵)>  


시인은 이전에 올랐던 영구암을 아래에서 바라보면서 이 시를 읊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른 하늘이 나타나도록 길을 오르자 깎아지른 절벽 위에 절이 있다. 세 번째 구절의 목초(木 ) 나무 끝이라는 뜻인데, 음력 8월을 말한다. 그리고 네 번째 구절의 계전(階前)은 계단 앞이라는 뜻으로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朱子)가 공부하기를 권하는 시 가운데 '섬돌 앞의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네(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를 활용한 것으로 가을이 깊어졌다는 의미다. 가을을 맞은 영구암에서 멀리 소먹이는 낙동강을 바라보고 대마도를 바라보았던 추억에 젖어 있는 시인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영구암은 주변이 모두 빼어난 경관이지만 특히 일출이 경주 석굴암(石窟庵)이라면, 놀은 영구암이라고 한다. 또한 영구암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04호로 지정된 김해 영구암 칠성탱(金海 靈龜庵 七星幀)이 있다. 이 그림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일곱 성군(星君)을 그린 것으로, 1911년부터 1931년 사이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활약했던 불모(佛母) 양완호(梁玩虎)가 그린 것이다. 그는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20여 년간 영남의 불교 미술계를 장악했다. 범어사의 불화소에서 불화와 불상을 조성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앞에서 잠시 보았던 삼층석탑인데, 탑 앞에 세워둔 안내문을 통해 탑에 대해 알아 본다.
이 석탑은 영구암 대웅전 앞쪽의 거북 머리처럼 돌출된 암괴(巖塊) 위에 형성된 편평한 대지에 세워져 있다. 원래는 삼층석탑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하대갑석과 상대갑석 1,2,3층의 옥개석과 상단의 노반, 복발 부분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만 살펴보면 대략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던 탑으로 추정된다. 탑 각층의 지붕돌인 옥개석의 경사면은 완만한 편이고, 그 단면의 높이와 너비의 비례도 비교적 날렵한 편이다. 특히 이 석탑은 비록 파손이 심하지만 오히려 다른 석탑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노반과 복발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남아 있어서 고려시대 석탑의 상륜부를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된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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