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동구와 부산진구에 걸쳐 있는 안창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그림들이다. 처음에 만들 때는 관심을 끌었지만 지금은 벽화가 낡아 부스러져 흉물이 돼 가고 있다.

또다른 '도시의 슬럼화' 안창마을이 주는 교훈

무허가 주택 즐비하던 부산 대표 달동네
젊은 공공미술가들과 미대생들 힘합쳐
예술마을 프로젝트 시행하며 환골탈태
관광객 늘며 마을 사진 급속도로 확산
한동안 유명세 치르다 슬럼화의 긴 늪
관리 주체·지원예산·예술가 재능기부
주민 협조 어우러져야 재생 가능성


범내골역 5번 출구. 노랗게 단풍이 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이 열을 지어 서있다. 우수수~ 바람이 불자 쌈지공원의 느티나무 잎들이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 잎 두 잎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바야흐로 절정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범내골역 쌈지공원에서 동구 1번 마을버스를 탄다. 범내골역에서 안창마을까지 가는 버스는 끄덕끄덕 교통부 교차로를 지난다. 삼화고무 공장 자리였던 경남아파트가 보인다. '범표 신발' 삼화고무가 수 만 명의 신발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을 때, 교통부 주변과 안창마을은 수많은 신발노동자들의 거주지였다.
 
고개를 돌리니 옛 보림극장 건물이 보인다. 유명 가수 리사이틀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이었다. 남진의 리사이틀이라도 할라치면, 한창 때인 여공들이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장사진을 이루곤 했던 곳이다.
 

▲ 안창마을 어귀 느티나무 옆에 서 있는 학 모양의 솟대. 마을이 훨훨 날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세웠다.
초량산복도로 입구인 망양로를 따라 오르다 보니 어느새 안창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 입구 큰 옹벽에는 오리 가족이 마실 가는 모습의 조형물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안창마을이 오리고기로 유명한 곳이라 마을상징물로 표현한 모양이다.
 
안창마을. 부산시 동구 범일동과 부산진구 범천동에 걸쳐 자리한 수정산 아래의 산골마을이다. 지금은 복개가 되었지만, 범내골 교차로쯤으로 흐르는 범내(凡川)의 발원지 마을이기도 하다. 그만큼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마을이란 뜻이다.
 
'안창'은 원래 '마을이나 산, 골짜기 등지에서 깊숙이 들어간 안쪽'을 일컫는 말이다. 그만큼 외따로 떨어져 구석지고, 뒤돌아 앉아 찾기도 어려운 오지를 뜻한다. 그래서 깊숙하고 구석진 마을을 흔히 '안창마을'이라고들 부르는 것이다.

그 말뜻처럼 이곳 안창마을도 참으로 지지리도 못살고 힘들던 시절,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 마을이었다. 부산이 도시화, 산업화로 급격히 팽창하면서, 일을 찾아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지금의 마을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빈손으로 타지에 와서 마땅한 방 한 칸도 구하기 어려웠기에, 빈 땅에다 얼기설기 지은 루핑집과 판잣집으로 비바람을 피하던 마을이었다. 해서 오래되고 단정치 못한 무허가 주택들이 무분별하게 난립하여 있던 곳이었다.
 
근래 이 안창마을에 다양한 그림이 입혀지고, 밝은 원색의 색깔이 덧칠되면서 마을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가 벽화로 둘러싸인 '벽화마을'로 탄생한 것이다. 젊은 공공미술가들과 동의대학교 미술대 학생들이 힘을 합쳐, 밝고 푸른 마을 만들기에 힘을 합친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을 둘러본다. 마을 뒤편에는 동의대학교 기숙사가 크게 자리하고 있고, 그 밑으로 안창마을이 푸른 가을 하늘 밑에 옹기종기 모여들 있다. 대부분의 마을 지붕들이 푸른색을 이고 있어 한껏 싱그럽고 풋풋하다. 관광객들에게 이곳이 '푸른 벽화마을'로 불린다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을정비가 잘되어 마을 전체가 밝고 깨끗해 보인다. 도로도 잘 닦여있고, 집들도 원색 페인트칠로 산뜻하다. 마을 곳곳의 담벼락에는 여러 가지 익살스러운 벽화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마을의 큰 찻길을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작은 골목들이 산기슭을 타고 미로처럼 뻗어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찻길에서 자신들의 집이 있는 각각의 골목으로 하나 둘 스며들 듯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몇몇 골목에는 '안창집', '마당집', '왔다집' 등 오리전문 가게 안내판들이 이리저리 붙어있다. 그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영락없이 맛있는 오리구이 냄새가 사람의 입맛을 자극한다. 특히 주말이면 산에서 하산하는 사람들로 흥청망청 북적이기도 한다.
 
▲ 녹색 담장 위의 소국 화분이 지중해 어느 마을 골목의 풍경처럼 강렬하게 다가온다.
마을의 여러 골목들 중 한 골목 입구. 초록색 담이 상쾌하다. 그 담 위에 소국 화분 두 개가 얹혀있는데, 마치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마치 지중해 어느 마을의 골목 풍경을 보는 듯 강렬하다.
 
여느 집 앞에는 형형색색의 국화가 만발하고, 색색의 글라디올러스와 제라늄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있다. 어느 집 축대에는 고사리가 한껏 푸르게 자라고, 어느 가게 담 앞에는 작은 화단에 배추가 싱싱하다. 주차장 집 감나무는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가을의 여유로움이 가득가득 담겨져 있다.
 
이곳 안창마을은 외지인들에게 '오리마을', '벽화마을'로 통한다. 앞서 말했지만 값싸고 맛있는 오리고기집들이 집단화 되어 있기에 '오리마을'이고, 큰길 가의 집들이 대부분 다양한 벽화로 알록달록 꾸며져 있기에 '벽화마을'이다.
 
벽화마을답게 마을 담벼락에는 골목에서 숨바꼭질 하는 아이들, 새총을 쏘는 아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남매, 수박밭 서리를 하는 개구쟁이들, 부산의 해수욕장 풍경을 그려 넣은 벽화들이 있다. 부산의 벽화마을 중에 초기에 조성된 마을이기도 하다.
 
이곳 안창마을을 지금의 벽화마을로 가꾼 사람들은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젊고 활동적인 공공미술가들이었다. 몇 년 전부터 공공미술을 하는 젊은 예술인들이 안창마을에 관심을 가지면서 예술마을 프로젝트를 시행한 것.
 
비록 낡고 오래된 마을이지만, 수정산 안쪽으로 마을이 올망졸망 모여 있고, 골목이 잘 발달된 마을구조를 갖고 있기에 그랬다. 우선 그들은 마을에 색깔을 입히는 작업으로, 마을 담벼락에 그림을 하나하나 그려나갔다.
 
어린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그림들이 하나 둘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안창마을에 벽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창벽화마을'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집마다 독특한 미술작품으로 문패를 만들어 달았고, 골목마다 골목이정표를 제작하여 붙여나갔다.
 
가난한 마을이라 집안 경제가 나아지라는 뜻으로 벽면 가득 만 원짜리 지폐를 그려 넣기도 하고, 마을 어르신들이 항상 편안하게 지내라고 안락해 보이는 거실과 소파를 그려놓기도 했다.
 
구멍가게의 문 앞에는 갖가지 꽃들을 그려 장식하고, 푸른 바다 위에 광안대교를 그려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센스도 발휘했다. 못 쓰는 장난감이나 폐품들을 오브제로 대문 앞을 꾸미고, 집 전체를 벽화로 예쁘게 꾸민 벽화 집도 선보였다. 마을의 역사를 담은 역사관이자 작은 창고 도서관인 '안창庫'도 만들어 마을사람들과 공유했다.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마을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외지의 관광객들도 관광코스로 마을을 들렀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로 마을을 담기 시작했고, 마을사진은 인터넷을 통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 한 담벼락 모퉁이에 그려진 새총 쏘는 아이의 모습.
그러나 유명세 이후 몇 년. 지금의 안창마을은 예전의 활기찬 '벽화마을'이 아니다. 벽화마을이라는 유명세 뒤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 문제점들을 간과한 지금은 또 다른 '도시의 슬럼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우선, '벽화마을'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주체가 없어졌다.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공공예술가들이 '벽화마을'을 조성했지만, 이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예산은 지원되지 않았다. 마을조성 예산만 지원받았을 뿐 관리예산은 제외된 일과성 사업이었던 것.
 
그러니 자연스레 비바람을 맞은 벽화들은 색이 바래고, 그림이 벗겨져 흉물스러워졌다. 그러다보니 현재 많은 벽화들이 마을 집과 담벼락을 단장하면서 지워지거나 사라졌다. 대표적으로, 창문 위를 타고 오르던 익살스런 '스파이더맨'과 '새총 쏘는 아이'와 짝을 이룬 '장난감 총을 들고 벽 뒤에 숨은 아이', 벽에 만화를 그려 넣은 '만화벽화', 별과 달에서 술래잡기 하면서 노는 아이들 등,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던 벽화들이 지워졌다. 현재 남아있는 벽화들도 재단장을 하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해있다.
 
또 '벽화마을' 조성 이후 마을사람들의 불편함이 극에 달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조용하던 마을이 시끄러워졌고, 관광객들이 집안을 들여다보는 등 사생활 침해사례도 일상화 되었다. 그런데도 정작 마을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실질적인 혜택은 전무한 실정이다.
 
부산의 '감천문화마을'의 경우 공공미술가들과 주민자치위원회가 공동으로 마을공동체협의회를 만들어 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반면, 안창마을은 그러한 마을운영협의체가 전무한 실정이다.
 
마을을 가꾸는 일은 주민들의 협조가 없이는 '모래 위의 집짓기'나 마찬가지다. '문화마을'이든 '벽화마을'이든 우선은 주민의 쾌적한 편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마을은 마을사람들이 먹고 자고 살아가는 실질적인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 가난한 주민들을 위안하기 위한 만원권 지폐 벽화.
때문에 안창마을이 지속적으로 벽화마을로 사랑받으려면 기존의 벽화를 재단장하는 등의 새로운 마을조성사업이 시행되어야 한다. 지자체의 예산지원과 공공예술가들의 재능기부, 주민들의 솔선수범의 협조만이 '벽화마을'을 살릴 수 있다.
 
전국 최초의 벽화마을이자 대표적인 예술관광상품인 통영의 '동피랑 벽화마을'도 관광객의 벽화 훼손과 생활불편을 호소하는 주민들의 민원제기 등 우여곡절 끝에, 마을을 새롭게 단장하여 사랑받고 있는 선례가 있다. 적극적인 벤치마킹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창마을 어귀의 쉼터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 옆에는 하얀 색 몸피에 빨간 부리를 단 '학' 모양의 솟대가 서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을을 위해 존재하는 염원들이다. 하늘 아래 달동네 '안창마을'이 솟대의 염원처럼 하늘을 훨훨 날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느티나무 끝 가을바람이 청량하게 불어온다.







최원준 시인 / 문화공간 '守怡齊수이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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