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에는 부의 북쪽 대사리(大寺里)에 있다고 하고, 불훼루(不毁樓)가 있다고 하였으나 1800년대 <김해읍지>에는 불훼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분산(盆山)과 향교가 부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했다. 송악당 또한 부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했으니, 이 당이 분산의 향교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송악당이 금강사에서 서북쪽으로 200보쯤 언덕 위에 있었다면, 금강사는 분산의 송악당과 향교에서 동남쪽 200m 정도에 있었던 것이 된다. 게다가 금강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차(茶)와의 관련성을 첨부한다면,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는 '다전로(茶田路)' '다곡(茶谷)' 등의 지명은 동상동 분산 아래쪽이 금강사가 있었던 대사리였음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절에 있었다고 하는 불훼루에 대해서는 고려 말 조선조 초기 인물 하륜(河崙·1347~1416)의 기문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집이 있었는데, 그 앞에 고려 충렬왕이 장군(將軍)이라고 이름 붙여준 산다수(山茶樹)가 뜰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집은 마루가 낮고 작아서 경관을 보기에 적절하지 못하여 아쉬웠던 차에 김해 부사 우균(禹均)이 절의 남쪽에 강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누각을 지으려고 한다면서 기문을 부탁했다. 그래서 백성들을 동원하기는 어렵고 하여 절의 중들을 동원해 두어 달 안에 지은 것이 불훼루다.
누각 남쪽에 못을 만들고 그 안에 연을 심었으며, 동쪽에는 흙을 쌓아서 뜰을 만들고 그 위에 대를 심었다. 그리고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덕(智德)이 견고하여 일체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다는 뜻의 금강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불훼라고 이름 지었다. 이 불훼루는 경치를 보면서 잔치를 하는 장소로 쓰였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 21년(1439) 음력 11월 11일조에는 경상도 관찰사 이선(李宣)이 도절제사 이교(李皎)와 잔치를 하다가 누각이 무너져 여덟 명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의 불훼루가 잔치를 하다 무너졌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우스운 일이다.
조선 초기 시인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금강사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말굽 가는 대로 따라 명승지 다 거쳐 | 歷盡名區信馬蹄(력진명구신마제) | |
<서거정, 김해금강사(金海金剛社)> |
서거정이 찾았을 때의 금강사는 그다지 번성한 모양이 아니었던 듯하다. 주변 가야의 유물들과 함께 낡은 절을 찾은 시인의 마음은 대단히 착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이 놀았던 시절 이 절이 얼마나 번듯했던가를 상상한 시인은 초라해진 금강사의 모습에 가슴 아팠던 것이다. 가야금 소리를 통해 가야의 옛 정취를 느끼고 즐기고 싶으나, 연주하는 기생에게 그 소리를 낮추라고 해야겠구나라는 표현에서 이러한 그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당시 사찰들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는지는 불훼루를 짓는 과정에서 중들을 동원한 것이나, 여기에서 술을 먹고 굴러대어 누각이 무너질 정도였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서거정 당시의 금강사가 번성하였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크나큰 무리라고 하겠다. 조선조 말 시인 허훈(許薰·1836~1907)은 당시의 금강사와 그 주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금관성 동북쪽 | 金官城東北(금관성동북) | |
<허훈, 유금강곡(遊金剛谷)> |
시에서 보듯 허훈이 왔던 당시의 금강사에는 이미 불훼루도 없었고, 그 유명한 금강사의 장군차 또한 잡초밭으로 변해버린 다음이었다. 골짜기 이름은 금강산이라고 하여 일만이천봉을 자랑하는 금강산과 같아도 풍경은 소박하기 짝이 없어 촌 색시의 모습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래도 소박한 그 풍경은 그 나름대로 즐길 만은 하다. 그러니 시인은 고을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다음에 내가 다시 올 때는 조그만 초가집이라도 짓고, 소박하게라도 주변을 단장하여 차 한 잔을 즐길 수 있게 해달라고. 마지막 구절의 기창(旗槍)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에서 생산되는 녹차다.
금강골 안 푸른 기창차 | 金剛谷裏綠旗槍(금강곡리녹기창) | |
<허훈, 금강영차(金剛靈茶)> |
허훈은 시에 주를 달아 '내가 전에 금강차를 배척한 적이 있었다. 뒤에 <다경(茶經)>을 살펴보고서야 이 차의 품질이 대단히 좋은 줄 알았다'고 하였다. 두 번째 구절의 고저(顧渚)는 중국 절강성 장흥현(長興縣) 고저(顧渚)의 자쟁차(紫箏茶)다. 시인은 옛날에는 김해의 장군차에 대해 평가절하 하였다가 차에 대한 책을 보고서야 그것이 얼마나 좋은 차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조선조 말 이종기(李種杞·1837∼1902) 또한 <금강영차(金剛靈茶)>라는 시에서 김해의 장군차에 대해 칭송하고 있다. 현재도 장군차는 김해의 큰 자랑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생산지이며, 김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차를 즐겼던 그 옛날 금강사가 사라져 버렸으니 안타까움 금할 수 없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