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국여지승람과 김해읍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동상동 분산 아래쪽 동광초등학교 부근이 금강사가 있었던 대사리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김병찬 kbc@
전해오는 이야기로 김수로왕이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절을 창건하고 산 이름은 금강산(金剛山)으로, 절 이름은 금강사(金剛寺)로 하였다고 한다. 금강사의 위치에 대한 설명은 여러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자료에는 고려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일본을 칠 때 기도했다고 알려진 송악단(松岳壇) 또는 송악당(松岳堂)은 부의 북쪽 3리에 있으며, 금강사에서 서북쪽으로 200보쯤 언덕 위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이 합포(合浦)에 행차하였을 때 여기에 와서 놀았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부의 북쪽 대사리(大寺里)에 있다고 하고, 불훼루(不毁樓)가 있다고 하였으나 1800년대 <김해읍지>에는 불훼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분산(盆山)과 향교가 부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했다. 송악당 또한 부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했으니, 이 당이 분산의 향교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송악당이 금강사에서 서북쪽으로 200보쯤 언덕 위에 있었다면, 금강사는 분산의 송악당과 향교에서 동남쪽 200m 정도에 있었던 것이 된다. 게다가 금강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차(茶)와의 관련성을 첨부한다면,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는 '다전로(茶田路)' '다곡(茶谷)' 등의 지명은 동상동 분산 아래쪽이 금강사가 있었던 대사리였음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절에 있었다고 하는 불훼루에 대해서는 고려 말 조선조 초기 인물 하륜(河崙·1347~1416)의 기문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집이 있었는데, 그 앞에 고려 충렬왕이 장군(將軍)이라고 이름 붙여준 산다수(山茶樹)가 뜰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집은 마루가 낮고 작아서 경관을 보기에 적절하지 못하여 아쉬웠던 차에 김해 부사 우균(禹均)이 절의 남쪽에 강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누각을 지으려고 한다면서 기문을 부탁했다. 그래서 백성들을 동원하기는 어렵고 하여 절의 중들을 동원해 두어 달 안에 지은 것이 불훼루다.
 
▲ 동광초등학교 부근에는 아직도 '다전로'와 '다곡' 등의 지명이 전해내려오는데, 장군차가 뜰을 덮었다고 기록된 금강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누각 남쪽에 못을 만들고 그 안에 연을 심었으며, 동쪽에는 흙을 쌓아서 뜰을 만들고 그 위에 대를 심었다. 그리고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덕(智德)이 견고하여 일체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다는 뜻의 금강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불훼라고 이름 지었다. 이 불훼루는 경치를 보면서 잔치를 하는 장소로 쓰였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 21년(1439) 음력 11월 11일조에는 경상도 관찰사 이선(李宣)이 도절제사 이교(李皎)와 잔치를 하다가 누각이 무너져 여덟 명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의 불훼루가 잔치를 하다 무너졌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우스운 일이다.
 
조선 초기 시인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금강사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말굽 가는 대로 따라 명승지 다 거쳐 
분성의 성 북쪽으로 절을 찾아들었네
금관은 옛 나라라 하늘땅도 묵었는데
왕이 와서 놀았던 세월 또한 아득하구나
시조 왕릉 그윽하고 산은 적적하고
장군수 늙고 풀이 무성하구나
가야의 옛 물건 가야금이 남아 있으나
미인에게 고운 창을 낮추라 해야겠네  

歷盡名區信馬蹄(력진명구신마제)
盆城城北訪招提(분성성북방초제)
金官故國乾坤老(금관고국건곤노)
玉輦曾遊歲月迷(옥연증유세월미)
始祖陵深山寂寂(시조능심산적적)
將軍樹老草萋萋(장군수로초처처)
伽倻古物琴猶在(가야고물금유재)
要遣佳人唱更低(요견가인창갱저)

   
<서거정, 김해금강사(金海金剛社)>  


서거정이 찾았을 때의 금강사는 그다지 번성한 모양이 아니었던 듯하다. 주변 가야의 유물들과 함께 낡은 절을 찾은 시인의 마음은 대단히 착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이 놀았던 시절 이 절이 얼마나 번듯했던가를 상상한 시인은 초라해진 금강사의 모습에 가슴 아팠던 것이다. 가야금 소리를 통해 가야의 옛 정취를 느끼고 즐기고 싶으나, 연주하는 기생에게 그 소리를 낮추라고 해야겠구나라는 표현에서 이러한 그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당시 사찰들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는지는 불훼루를 짓는 과정에서 중들을 동원한 것이나, 여기에서 술을 먹고 굴러대어 누각이 무너질 정도였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서거정 당시의 금강사가 번성하였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크나큰 무리라고 하겠다. 조선조 말 시인 허훈(許薰·1836~1907)은 당시의 금강사와 그 주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금관성 동북쪽
골짜기가 깊고 길다네
맑은 물이 그 사이에 흘러내리고
흰 돌은 그 옆으로 깔려있다네
가다가다 드디어 끝닿은 수원
시냇길 이끼꽃이 푸르네
도중에 열리는 한 작은 골짜기
고운 산기슭이 담처럼 둘렀네
내 듣자니 노인네들 말하기를
이 골짜기를 금강이라 한다네
나라 사람들 사를 결성하고는
좋은 날 함께 잔치를 하였다네
불훼루 있었으니
천년 세월 동안 갈 듯 하였다네
산다가 뜰 가득 그늘 드리워
여름 달 녹음이 서늘하였다네
고려왕이 비를 피하였다가
장군이라 빛나는 이름 내렸다네
나는 와서도 볼 수가 없고
잡풀만 거칠어 있네
동쪽 바닷가로 머리 돌리니
일만 이천 산등성이이니
이것이 바로 금강산
기이한 절경 우리나라 최고라네
이 골짜기 이름 비록 비슷하여도
선인과 진인의 고향 되지 못했네
평범한 돌 가운데 아름다운 것
자리 되지 못하고
평범한 샘 가운데 우는 것
대 피리 같을 수 없네
초라하게 만든 흐르는 산세며
겨우 갖춘 안개와 놀이 모였네
마을의 미인이 마음껏 분을 발라도
어찌 궁중의 단장과 같으랴
그런데 이 고을 경계 안에
본디 자연의 아름다움 드문데
오직 이 골짜기가 있어
한때 거닐어볼 수 있구나
이 고을 사람에게 말하기를
덤불을 열어젖히고 초가집을 짓고
서쪽 산엔 단풍과 전나무 심고
남쪽 산엔 왕대를 심고
다음에 내가 다시 오면
샘물 길어 차를 달이라 하였네 

金官城東北(금관성동북)
有谷窈而長(유곡요이장)
淸流瀉其間(청류사기간)
白石鋪其傍(백석포기방)
行行遂竆源(행행수궁원)
磵路苔花蒼(간로태화창)
中開一小洞(중개일소동)
姸麓圍如牆(연록위여장)
吾聞古老言(오문고로언)
此谷稱金剛(차곡칭금강)
邦人曾結社(방인증결사)
令辰共醵觴(영진공갹상)
有樓扁不毁(유루편불훼)
若將竆千霜(약장궁천상)
山茶蔭一庭(산다음일정)
夏月綠陰凉(하월녹음량)
麗王嘗避雨(려왕상피우)
將軍賜號煌(장군사호황)
我來不可見(아래불가견)
但有雜卉荒(단유잡훼황)
回首東海上(회수동해상)
一萬二千岡(일만이천강)
此乃金剛山(차내금강산)
奇絶冠東方(기절관동방)
玆谷名雖似(자곡명수사)
未作仙眞鄕(미작선진향)
凡石之佳者(범석지가자)
不堪爲席床(불감위석상)
凡泉之鳴者(범천지명자)
不能若竿簧(불능약간황)
劣作流峙勢(열작류치세)
僅具煙霞藏(근구연하장)
村娥縱傅粉(촌아종부분)
詎肖宮樣粧(거초궁양장)
然斯郡境內(연사군경내)
素稀泉石良(소희천석량)
惟有此溪巒(유유차계만)
可以時徜徉(가이시상양)
寄語玆土人(기어자토인)
闢榛置茅堂(벽진치모당)
西崦植楓檜(서엄식풍회)
南岸種篔簹(남안종운당)
他年我復來(타년아부래)
酌泉煮旗槍(작천자기창)

   
<허훈, 유금강곡(遊金剛谷)>  


▲ 읍성의 동쪽, 분산(盆山)의 아래쪽에 향교(鄕校)와 송악당(松岳堂)이 있고,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금강사(金剛社)가 있었다고 하니, 지도의 분산봉(盆山烽) 가장 아래편과 읍성 사이에 향교와 송악당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 금강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시에서 보듯 허훈이 왔던 당시의 금강사에는 이미 불훼루도 없었고, 그 유명한 금강사의 장군차 또한 잡초밭으로 변해버린 다음이었다. 골짜기 이름은 금강산이라고 하여 일만이천봉을 자랑하는 금강산과 같아도 풍경은 소박하기 짝이 없어 촌 색시의 모습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래도 소박한 그 풍경은 그 나름대로 즐길 만은 하다. 그러니 시인은 고을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다음에 내가 다시 올 때는 조그만 초가집이라도 짓고, 소박하게라도 주변을 단장하여 차 한 잔을 즐길 수 있게 해달라고. 마지막 구절의 기창(旗槍)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에서 생산되는 녹차다.


금강골 안 푸른 기창차
아름다운 맛 참으로 고저차의 향과 한가지
왜 옛날에는 쓸데 없는 말을 가벼이 했나
진기한 것 우리나라에서 으뜸인 줄 이제야 알았네  

金剛谷裏綠旗槍(금강곡리녹기창)
美味眞同顧渚香(미미진동고저향)
何事昔年輕費說(하사석년경비설)
始知奇品冠東方(시지기품관동방)

   
<허훈, 금강영차(金剛靈茶)>  


허훈은 시에 주를 달아 '내가 전에 금강차를 배척한 적이 있었다. 뒤에 <다경(茶經)>을 살펴보고서야 이 차의 품질이 대단히 좋은 줄 알았다'고 하였다. 두 번째 구절의 고저(顧渚)는 중국 절강성 장흥현(長興縣) 고저(顧渚)의 자쟁차(紫箏茶)다. 시인은 옛날에는 김해의 장군차에 대해 평가절하 하였다가 차에 대한 책을 보고서야 그것이 얼마나 좋은 차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조선조 말 이종기(李種杞·1837∼1902) 또한 <금강영차(金剛靈茶)>라는 시에서 김해의 장군차에 대해 칭송하고 있다. 현재도 장군차는 김해의 큰 자랑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생산지이며, 김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차를 즐겼던 그 옛날 금강사가 사라져 버렸으니 안타까움 금할 수 없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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