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가난하지만 지조있는 선비의 모습을 두고 '딸깎발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소설가 김원우(64)는 이 표현을 적용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딸깎발이'로서, 그는 지금까지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질타하는 소설들을 주로 발표해 왔다. 그런 부류의 그런 모양새를 그냥 보아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또 독자를 괴롭히는 집요하고 웅숭깊은 문체로 문학사의 한 획을 긋고 있기도 하다.
 
최근 장편소설 <돌풍전후>를 내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를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지난주 <김해뉴스> 출향인 탐방에서 소개했던 소설가 김원일이 그의 친형이다.


-최근 발간된 장편소설 <돌풍전후>가 화제입니다. '임 교수'의 회고담 형식을 빌어 먹물 지식인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데, 기실 임 교수는 선생님의 분신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까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플로베르 같은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조차 '마담 보바리는 나다'라고까지 했겠습니까. 당연히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저 자신의 여러 모습은 <돌풍전후> 속의 임 교수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까지 골고루 분산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잔치국수'같은 음식을 좋아하고, '가방'에 집착하는가 하면 온몸에 살이 수북수북 찐 여성을 경원한다기보다도 점잖게 희화화하는 식입니다. 한편으로 제 천성과는 전혀 다른 측면을 '작위적으로' 덧붙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소심하고, 잔걱정이 많은데다가 불평·불만을 일로 삼으며, 부정·불의·거짓말을 싫어하는 신경질적인 제 성격이 징그러워서, 그 반대로 털털하고, 거짓말도 밥먹듯이 잘하는 허풍선이로서의 낙천적인 인물도 짐짓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이중인격자로서의 그런 면면은 모든 먹물 지식인의 공통함수이기도 할 것입니다.

-현재 한국사회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이고,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 일반을 흔히 '먹물'이라고 비아냥거리는데, 그럴 수밖에 없음은 그들이 파지하고 있는 '지식' 그 자체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워낙 알량해서입니다. 실례로 일제치하·해방공간·한국동란 전후에 열심히 투쟁하다 사라져간 숱한 좌익들이 과연 '마르크시즘'의 실체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대개 다 겉멋이었거나 막연히 '유행' 및 '대세'에 휩쓸린 추수주의자 내지는 영합주의자였을 공산이 큽니다. 그 많은 좌익들이 남긴 투쟁의 족적이래야 이 땅을 좁다고 삐대며 다니느라고 일정하게 오염시킨(?) 실적 정도나 남겼을까, 어떤 '지적인 고구'의 흔적이 전무한데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심지어는 팜플렛 같은 저작물 한 권조차도 없지 않습니까. 또한 북한이 그동안 간행해온 방대한 분량의 '주체사상'을 비롯한 그 방면의 여러 문헌들도 얼마나 유치한지는, 물론 저도 안 읽어봤습니다만, 뻔하지 않겠습니까.

보나마나 바른 문장이나 옳은 문맥이 하나도 없는, 허황한 잡설 투성이일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 쪽도 대동소이합니다. 분단 후 그토록 짱짱한 교육열을 과시했으면서도 다른 언어권의 세계적 수준과 버금갈만한 호저(好著)를 단 한권도 생산해내지 못한, 우리의 족탈불급의 성과는 지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옛날의 우리 선비들은 달랐습니다. 이퇴계(이황)와 김추사(김정희)를 보더라도 일목요연할 정도로, 그것도 그 사유의 깊이와 높이가 출중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세칭 '소중화(小中華)의식'이라는 특유의 자존심을 갖고 세상을 저저이 규명해 놓았습니다. 말을 줄이면 그 소위 '근대'가 시작하자마자 잃은 것은 문장이고 얻은 것은 구랏빨 곧 요즘말로 이빨만 까고 있으며, 돈맛을 알자마자 국격이나 인격이 송두리째 거덜나 버린 것입니다. 최근의 이른바 '보수적/진보적' 지식인들의 실상은 한마디로 허무맹랑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비천한 지식사회, 천박한 지적 풍토 전반에 대해 치열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지식/지식인'은 모름지기 아무 밥상에나 오르는, 그게 그것처럼 어슷비슷한 '간장종지'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뻔한 모양새하며,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자리나 차지하는 그따위 '그릇'을 '지식' 또는 '지식인'이라고 일컬어 버릇하는 우리의 습관부터 뜯어고쳐야 합니다.  

-선생님에게 고향 진영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고향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주십시오.

▶저도 진영읍 여래리, 곧 장터 마을에서 태어나긴 했습니다만, 이내 우리 가족이 솔가해서 서울로 이사를 가는 통에 6·25동란 후에야 진영읍 역전 거리께의 단칸셋방에서 할머니와 몇 달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대구에 정착하여 피난살이를 하면서 초등학교·중학교 재학중에는 방학 때마다 진영 지서 옆의 고모집에서 달장근씩 눈칫밥을 먹기도 했지요. 한때는 고모부가 한림정의 수리조합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낙동강 철교가 지척에 있던 고모네에 얹혀 지낸 적도 있습니다.

어느 한여름에는 낙동강의 그 튼실한 둑이 터져버렸을 정도로 큰물이 져서 돼지가 떼지어 둥둥 떠다니는 장관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또다른 추억거리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지나리의 고모 시댁에 심부름을 갔었는데, 짙푸른 나락 사이로 뚫린 논둑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면서 설익은 벼이삭을 깨물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경전남부선 철길을 건너 쭉 나아가면 지나리가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요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자리가 조성된 그 봉하마을이 나오지요. 이윽고 해거름녘에야 사돈댁에 당도해서 저녁밥을 얻어먹고 있으려니까 고모부가 장골의 이웃 사람 여럿과 함께 논일을 하다가 잡아왔다면서 어른 손바닥만한 가물치를 얼추 열댓 마리나 선보이고 나서, 곧장 마당에 쪼그려 앉아 회를 쳐서 초장에 찍어 맛있게 먹던 장면도 떠오릅니다. 그때 그 민물회가 엔간히도 먹고 싶더니만 어린애들에게는 한 점 먹어보라는 소리도 없어서 야속하고 섭섭했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김원우 교수는 ─────
본명은 김원수(金源守)다. 계명대 교수 명단에는 '김원수'라고 되어 있다. 지난 1947년 4월 11일 경남 김해군 진영읍에서 태어났으나 생활은 주로 서울과 대구 일원에서 했다. 경북대 영어영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지난 1977년 <한국문학> 중편소설 공모에 우리 사회의 속물적 근성과 물신숭배적 가치관을 비판한 작품 '임지(任地)'가 당선돼 등단했다. 지난 1983년에 단편 '불면수심'으로 제16회 한국창작문학상을, 1991년에 중편 '방황하는 내국인'으로 제2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중편소설 '반풍토설초'로 오영수문학상을, 2002년에는 '객수산록'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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