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볍게 등산을 즐기던 한 여성이 해발 323m로 분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만장대의 고목 아래 앉아 쉬고 있다.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물러갔다. 한 떼의 솜털 구름이 바람을 따라 흐르더니 어느새 태양을 가려 버렸다. 시나브로 구름 사이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구름을 뚫으면서 내려오는 사선의 빛들. 미유는 눈앞에 펼쳐진 빛 내림의 광경을 황홀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미유는 분산성의 서문 망루대에 서 있었다. 성 밑에는 서낙동강이 푸른 바다와 만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때는 마품왕(금관가야 3대 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 쯤 되던 시절이었다. 수로왕께서 이 땅에 내려와 금관국을 창업한 지도 벌써 20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수로왕, 거등왕을 거쳐 마품왕에 이르면서 금관국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였다. 백제와 사로국, 고구려에 철정을 수출하면서 나라의 경제 기반을 다졌고, 멀리 바다 건너 왜의 땅에는 금관국의 분국이 속속 세워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금관국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자 그에 위협을 느낀 주변국들의 견제가 만만찮게 펼쳐졌다.
 
멀리 서쪽에서는 백제와 포상팔국이,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호시탐탐 금관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금관국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주변국들의 침략과 견제를 효과적으로 분쇄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했다.
 
'수로왕이시여, 금관국을 지켜주소서.'

미유는 저도 모르게 수로왕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분산성을 지키는 가평장군의 장남이었다. 출중한 외모에 강인한 기상, 빼어난 무술 실력을 자랑하는 청년 장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금관국을 너무나 사랑하는 가락인이었다. 금관국이 어떤 나라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수로왕과 아유타국에서 오신 허왕후께서 함께 만드신 나라가 아닌가.
 
멀리 바닷가에서 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이 불어와 미유의 머리띠를 날리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대가락이라 적힌 붉은 색 띠가 묶여 있었다. 미유는 황금색 손잡이가 달린 검을 불끈 쥐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적들은 언제 어디서 바다를 건너, 평야를 지나 쳐들어올지 몰랐다.
 
어디선가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붉은 띠를 맨 아름다운 여인들이 말을 타고 망루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는 여인은 채현이었다. 그녀들의 머리띠에는 '수국(守國)'이란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채현은 아녀자들로만 이루어진 특별 전투단의 수장이었다.
 
▲ 등산로를 따라 걷다 올려다본 분산성의 성벽.
혼자 망루대로 올라온 채현은 미소를 지으며 미유에게 다가갔다.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양 팔에 가죽 토시를 차고, 화살을 어깨에 맨 그녀는 은방울꽃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에서는 요염한 기운이 감돌았고 선이 뚜렷한 얼굴에는 날카로운 기운도 맺혀 있었다. 그녀는 아녀자이기 이전에 금관국을 지키는 전사였다. 무술 실력도 미유와 대등했고, 활솜씨는 금관국 전체를 통틀어도 적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같은 스승 밑에서 병법과 무술을 연마한 사이였다. 채현의 아버지는 마품왕의 호위장군이었다.
 
"미유, 바람이 차."
"이까짓 바람쯤이야. 폭풍우가 몰려올 텐데."
"무슨 말이야?"
"포상팔국의 움직임이 수상해. 간자에 의하면 보라국에서 배와 병사를 준비하고 있다더군."
"걱정 마. 그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나와 수국단이 있으니까."
"그래. 그대는 전사니까. 나 역시도."
"저기 계시는 수로왕과 허왕후께서 이 금관국을 보살펴 주실테니 걱정 마."

채현은 멀리 내려다보이는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을 가리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미유는 망루를 천천히 내려갔고, 채현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의 발길은 자연스레 성곽으로 향했다. 남쪽과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성곽. 높이는 열다섯 자 정도이고 전체적인 모습은 타원형이었다. 두 사람은 성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찰로 발걸음을 돌렸다.
 
절로 가는 길에는 녹의홍상으로 물든 나무들이 자리를 지켰다. 숲속 길가에는 여뀌와 꽃 무릇, 괭이사리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가끔 서로를 쳐다보며 수줍게 웃기도 했다. 싱그러운 향이 풍기는 숲속을 걸어가는 이 순간만큼은 전사가 아닌 연인의 모습이었다.
 
▲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은해사.
은해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본전의 왼편에 있는 대왕각으로 들어가 향불을 피웠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을 모신 곳이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합장을 올렸다. 어쩌면 그들은 부부가 될 소원을 동시에 빌었을지도 모른다. 나이 스물을 충분히 넘겼지만 두 사람은 혼인하지 못했다. 외적들이 쳐들어오려는 와중이라 한가롭게 혼인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왕각을 나와 사찰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뒷마당 중앙에는 파사석탑을 본떠 만든 돌탑이 서 있었다. 은해사는 허왕후와 장유화상께서 세운 절이었다. 금관국 최초의 가람인 서림사를 세운 후에, 모진 풍랑을 막아준 용왕에게 예를 올리기 위해 만든 절이었다.
 
은해사를 나온 그들은 다시 성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는 이제 서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성곽에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고, 붉은색이 파란 바다에 점점이 퍼져갔다. 미유와 채현은 잠시 바위 위에 앉아 산 위의 평탄한 지형을 둘러싼 분산성을 내려다보았다. 거등왕 대에 시작하여 마품왕 대에 어렵사리 완성한 성이었다. 만일 이 성이 함락된다면 금관국 전체가 위태롭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마품왕은 분산성을 만든 후에 금관국의 정예 병력을 분산성에 집결시켰다. 포상팔국이나 백제, 또는 사로국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사흘이 지나갔다. 미유는 서쪽 망루대에서, 채현은 동쪽 망루대에서 각각 바다와 평야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오전에 보라국에서 병사를 태운 배가 바다로 나갔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그들은 무척 긴장했다. 그 배들이 과연 사로국으로 향할 지 금관국으로 향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포상팔국은 남해안에 자리 잡은 작은 소국들로서 금관국과 사로국의 해안가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곤 했다. 간자는 보라국으로 포상팔국의 병사들이 집결했으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미유, 적들이 몰려오고 있어!"

채현이 급히 미유에게 달려와 바다를 쳐다보라며 손짓했다. 미유는 긴장한 눈으로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을 응시했다. 수평선 위에 크고 작은 배들이 새카맣게 모여 있었다.
 
"채현, 그대는 망루로 돌아가서 전투 준비에 돌입해. 난 아버님과 상의해야겠어."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후,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동쪽 망루로 다시 간 채현은 수국단원들에게 쇠뇌와 화살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높은 성 위에서 사용하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미유는 아버지 가평장군과 함께 방어 작전을 짜는 데 집중했다. 미유는 탐색부대를 보내 적들의 동태도 살피고 일차 타격도 주자고 말했다. 가평장군은 1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들의 전력을 탐색하라고 일렀다.

미유는 군사를 거느리고 은밀히 성문을 나서 기별포에 도착했다. 포상팔국 병사들이 서서히 기별포로 접근하고 있었다. 미유는 먼저 궁수들을 전진 배치했다. 적들의 전열도 살피고 그들의 진격 속도도 최대한 늦추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타격을 준 다음에는 신속히 분산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 분산성 안에서 내려다본 김해시내 전경.
마침내 포상팔국 병사들이 기별포 바위에 배를 대기 시작했다. 미유는 은밀히 궁수들에게 화살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하나 둘, 포상팔국 병사들이 배에서 내리기 시작하더니 바닷가는 어느 덧 1천 명이 넘는 군사들로 가득찼다. 미유는 재빨리 궁수들에게 신호를 내렸다.
 
"피융~."
"윽. 으윽."

궁사들이 화살을 쏘자 보라국 병사들이 쓰러졌다. 어느새 기별포 앞바다에 붉은 물이 넘쳐흘렀다. 적들은 이내 전열을 정비하고 미유의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화살을 날렸다. 미유는 재빨리 병사들을 후퇴시켜 분산성으로 돌아갔다.
 
성 가까이 다가간 미유는 경악스런 표정을 지어야 했다. 1천 명에 가까운 포상팔국 병사들이 분산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적들은 육로로도 진격한 것이었다. 성 주변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성곽은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뜨거운 기름을 뒤집어쓴 포상팔국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가락국 병사들도 활과 창을 맞고 성 밖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분산성은 워낙 견고한 성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포상팔국 병사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미유는 숨죽이며 전투 상황을 지켜보았다. 지원병이 도착할 때까지 미유는 참고 있어야 했다. 그의 눈에 채현이 활을 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를 비롯한 수국단원들이 쉴 새 없이 화살을 쏘고 있었다. 그녀들이 쏜 화살에 포상팔국 병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갑자기 함성소리가 들려와 미유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기별포에 상륙했던 적들이 전열을 갖추고 분산성으로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유는 갑자기 벌어진 진퇴양난의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앞뒤로 적들에게 포위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때, 대가락국의 강력한 철기병단이 나타났다. 봉황대 궁궐에서 보낸 지원군이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철기병들은 긴 창을 휘두르며 적들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분산성도 방어작전에서 적극적인 공격작전으로 들어갔다. 성문을 열어 전투병들을 내보낸 것이다. 그 틈에 미유도 적극적인 공격작전에 가담했다. 모든 궁수들을 활용하여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그에 화답하듯 채현의 수국단원들도 포상팔국 병사들에게 화살을 날려댔다.
 
그렇게 사흘간에 걸쳐 분산성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포상팔국 병사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은 채 퇴각하고 말았다. 사흘간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전투에 임한 미유 일행은 그야말로 피폐한 몰골로 분산성 안으로 들어갔다.
 
미유의 온 몸은 적들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채현은 미유에게 달려왔다. 채현 역시 온 몸에 붉은 색깔을 지니고 있었고, 얼마나 화살을 쏘았는지 오른쪽 손가락들이 헐어 있었다. 두 사람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쪽 망루대로 올라갔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 있었고, 구름이 태양을 살짝 감싸고 있었다. 다시 구름 사이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황금빛이 구름을 뚫고 대지로 쏟아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두 사람은 빛 내림의 광경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의 눈에 작은 눈물이 흘렀고, 내려오는 황금빛이 두 사람의 눈물에 황홀하게 어리었다. 그 빛은 분산성의 돌 틈 사이에도, 은해사 대왕각에도,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에도 장엄하게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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