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에는 이전에 보았던 귀암사(龜巖寺·영구암)·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 寺)와 함께 이세사(離世寺)가 신어산에 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이 없어 이 절에 대해서 더 언급하기는 어려우나 다행히 여기에서 읊은 시가 한 수 있으니, 그래도 위안이 된다. 다음 시는 고려 시대의 곽여(郭與:1058~1130)가 이세사에서 읊은 시다.
 

늦은 가을 푸른 바다 천 길 물결에
일엽편주로 만 리 길을 가는 사람
멀리서 종소리 듣고 절 찾아 와서는
잠깐 배 매어두고 신선이 되려하네
가야국 왕업 강가 우거진 풀에 이어지고
수로왕 후손들 고을 백성이 되었네
남방 옛 도읍 이제 모두 보았으니
배돌려 봄 깃든 바다와 산으로 가려네  

三秋碧海千尋浪(삼추벽해천심랑)
一葉片舟萬里人(일엽편주만리인)
遠聽鍾聲尋到寺(원청종성심도사)
暫留風馭欲栖眞(잠류풍어욕서진)
伽倻國業連江草(가야국업연강초)
首露王孫作郡民(수로왕손작군민)
南土舊都今已見(남토구도금이견)
片帆還向海山春(편범환향해산춘)

   
<서거정, 김해금강사(金海金剛社)>  

 

시인의 이동 경로를 보아 이세사는 신어산에서도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배를 매어두고 산책하듯 둘러보며 절을 찾은 나그네의 여유로운 마음처럼 숨이 차게 올라야 하는 곳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시인은 속세의 인연이랄 수 있는 가야국 왕업과 수로왕의 후손을 사찰의 그것과 하나로 놓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감로사 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삼층석탑. 1975년 삼층석탑재와 비석대좌, 연화대석 등이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다음은 감로사(甘露寺)로 가보자.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감로사에 대해 송(宋) 이종(理宗) 가희(嘉熙·1237~1240) 연간에 승려 해안(海安)이 지은 것으로 동쪽 옥지(玉池:양산시 원동면과 김해시 상동면 사이의 황산강) 가에 있으며 최고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현재 이 절은 모두 사라지고 터만 남았는데, 원래 절터에 남아 있던 삼층석탑재와 비석대좌, 연화대석 등은 1975년에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조선금석총람 (朝鮮金石總覽)>에 1731년에 이 절에 진남루(鎭南樓)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조 후기까지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에서 읊은 두 편의 시가 실려 있으니, 다음은 고려 시대 안유(安裕·안향 1243~1306)의 것이다.


일엽편주 거울 같은 물에 날아오니
공중에 빛나는 금벽은 절이로구나
고갯 머리 푸르름은 산 그림자 아니요
돌 위에 졸졸거리는 물 빗소리 같구나
포근한 햇살에 뜰의 꽃은 얇은 푸르름 감추고
서늘한 밤 산 달빛은 희미한 빛을 보낸다
백성을 염려해도 도탄에서 건져내지 못하니
부들 자리에 앉아 여생을 보내려한다  

一葉飛來鏡面平(일엽비래경면평)
輝空金碧梵王城(휘공금벽범왕성)
嶺頭蒼翠非嵐影(령두창취비람영)
石上潺湲似雨聲(석상잔원사우성)
日暖庭花藏淺綠(일난정화장천록)
夜凉山月送微明(야량산월송미명)
憂民未得湔塗炭(우민미득전도탄)
欲向蒲團寄半生(욕향포단기반생)

   
<서거정, 김해금강사(金海金剛社)>  


시에서 보면 고려시대 당시 감로사는 금빛이 찬란하고, 산에 기댄 절 주변으로는 바위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고 소박한 뜰이 가꾸어진 모습이었던 것 같다. 절에 들어선 시인은 아늑한 절의 분위기에 빠져 벼슬살이를 잊어버리고 싶다고 토로하고 있다. 다음은 안유와 거의 같은 시기 이견간(李堅幹·?~1330)의 시다.


신선의 골짜기에 들어오니 넓은 들이요
절이 고을과 멀리 떨어진 걸 기뻐하였네
삼면의 반공은 모두 산 빛이요
한 자락 빈 곳으로 강물 소리로구나
앞마을 아득하고 고기잡이 등은 어둡고
별원은 쓸쓸하고 안탑만 환하구나
어찌 임금을 받들어 축수하지 않으리
검은 관복으로 포의의 선비를 등용하셨으니  

竭來仙洞得寬平(갈래선동득관평)
却喜蓮坊去郡城(각희연방거군성)
三面半空皆嶽色(삼면반공개악색)
一襟虛處是江聲(일금허처시강성)
前村縹緲漁燈暗(전촌표묘어등암)
別院蕭條雁塔明(별원소조안탑명)
曷不戴君勤祝壽(갈부대군근축수)
紫泥徵起白衣生(자니징기백의생)

   
<서거정, 김해금강사(金海金剛社)>  


이견간은 앞에서 본 안유의 시보다 더욱 상세하게 감로사 주변을 읊고 있으니, 삼면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 사이로 강물이 비치며,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고요한 절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다만 앞의 안유와는 달리 이견간은 마지막 구절에서 절에 온 차에 관직에 등용해준 임금을 축수하겠다고 관리로서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어, 절을 대하는 두 사람의 생각이 대조적인 것을 볼 수 있다.
 
▲ 장유화상이 호랑이 형상을 한 임호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지었다는 흥부암.
다음은 흥부암(興府菴)으로 간다. 김해 시내의 서쪽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임호산(林虎山)은 가조산(加助山) 또는 유민산(流民山), 호구산(虎口山)이라고도 한다. 김해읍지에는 '가조산은 부에서 서쪽으로 5리다'라고 하였다. 임호산은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 가락국 때 장유화상은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조선조 말의 이종기(李種杞·1837∼1902)는 고서영지(古西影池)라는 시를 읊으면서 '군 서쪽에 유민산이 있는데 험악하다. 그래서 못을 파서 그 그림자를 담궜다'고 했다. 임호산이 얼마나 험하고 기운이 강했으면 이 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절을 지어 누르고, 못을 파서 그 그림자를 못 속에 담그려고 했겠는가? 여기에 지은 절이 바로 흥부암이다.


기와집 얽어놓은 바위 험준 하거니와
시야가 흥부만큼 좋은 곳이 없어라
스물여덟 차례 나팔이 울리고 나면
성 가득 불 켜져 별 총총 모인 듯하네  

架成蝸屋石嵯峨(가성와옥석차아)
眼界無如興府多(안계무여흥부다)
二十八聲囉叭後(이십팔성라팔후)
滿城燈火總星羅(만성등화총성나)

   
<이학규, 금관기속시>  


흥부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이것은 이학규가 살았던 당시에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절에 올라가보면 김해 시내는 물론이요, 멀리 바다가 보이는 경관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세 번째 구절의 '스물여덟 차례 나팔이 울린다'는 것은 성문이 닫히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당시 도성에서는 밤 10시경에 종을 스물여덟 번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그렇게 되면 집집마다 불을 켜게 되어 별이 모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밤에 흥부암에 올라가보면 이학규의 이 느낌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진변 서쪽 성이 저 밖으로 두르고 
퉁소 피리 소리 구름 낀 산에서 들려오네 
산에 오르는 사람 개미가 개미굴에 오르는 듯
돌에 붙은 암자 제비가 둥지를 포개놓은 듯 
하얀 길이 종횡으로 저자 거리를 지나고 
붉은 누각 모퉁이가 꽃나무에 얽혔네 
동쪽 밭이 지척이요 초가집이 가까우니 
맑은 풍경소리 밤이면 밤마다 들리네    

辰弁西城俯㢠郊(진변서성부형교)
吹簫擫笛來雲嶅(취소엽적래운오)
登山人似螘緣垤(등산인사의연질)
貼石菴如燕疊巢(첩석암여연첩소)
白道縱橫貫墟市(백도종횡관허시)
丹樓隅絶交花梢(단루우절교화초)
東田咫尺茆廬近(동전지척묘려근)
淸磬曾聞夜夜敲(청경증문야야고)

   
<이학규, 춘조동정택승사군 등서산흥부암(春朝同鄭宅升使君 登西山興府菴)>  


봄날 아침에 흥부암으로 올라 가면서의 느낌을 읊은 시다. 가파른 임호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개미굴로 올라가는 개미에, 절은 포개어놓은 제비 둥지에 비유하여, 흥부암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은 흥부암에 오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돌소리 차디차니 사월이 서늘하고 
처마 빈 곳으로 넉넉히 푸른 하늘이 들어온다 
비 개자 벼랑의 대나무에 새 가루가 피어나고 
바람 따뜻하니 바위 꽃이 가득 향기를 보낸다 
물가에 가득한 기운 어느 곳인 줄 알겠네 
인간 세상 맑은 인연은 저 위에 있다네 
뚜벅뚜벅 신 한 켤레 돌아가기를 미루더니 
석양에 강 물결이 하나같이 푸르구나   

石籟泠泠四月凉(석뢰냉냉사월량)
簷虛剩納碧天長(첨허잉납벽천장)
雨晴崖竹生新粉(우청애죽생신분)
風㬉巖花送晩香(풍난암화송만향)
汀洲積氣知何處(정주적기지하처)
人世淸緣在上方(인세청연재상방)
鏗然緉屐遲歸去(갱연량극지귀거)
落照江濤一色蒼(낙조강도일색창)

   
<허훈, 등흥부암(登興府菴)>  


4월인데도 산꼭대기에 있는 흥부암은 서늘하다. 그러나 역시 봄은 봄인지라 비가 개이고 햇빛이 비치자 대나무, 바위 주변의 꽃들이 생기를 되찾는다. 이러한 풍경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시인은 결국 석양녘의 강 물결을 보고야 말았다.


태평흥국은 아득해라 천 년이 되었으니
또 다시 사대부가 범루에 모였네
중들이 어찌 알겠나 글이 귀중한 줄을
신선의 글로 흐르는 세월을 얽어맨다
세상 먼지가 어찌 산 속에 오겠는가
세계가 큰 바다 위에 뜬 것 같아라
더구나 고상한 친구들 부지런히 왔으니
평생의 운수가 이 놀음 보다 작다네  

太平興國杳千秋(태평흥국묘천추)
又復衣冠集梵樓(우부의관집범루)
白衲那知文事重(백납나지문사중)
丹經欲挽歲華流(단경욕만세화류)
塵煙不到空山裏(진연부도공산리)
世界如浮大海頭(세계여부대해두)
何况高朋勤命駕(하황고붕근명가)
平生歷數少玆遊(평생력수소자유)

   
<허훈, 휴족제명오 족질경무 채 상흥부암 동상추경 이사징방여래차 희극공부(攜族弟明五 族姪景茂 埰 上興府菴 同賞秋景 李士澄訪余來此 喜劇共賦)>  


제목에서 보듯이 시인은 집안 동생, 조카들과 흥부암에 올라 가을 풍경을 보고 있다가 찾아온 이사징(李士澄)과 시를 지었다. 첫 번째 구절의 태평흥국은 이 절이 지어졌다고 알려진 송나라 태종 연간인 900년 대 말이다. 이렇게 오래된 절에 올라 신선이 된 듯한 감상에 빠지는 맛도 좋지만 이보다는 가까운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기쁨이 가장 큰 것이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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