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에는 이전에 보았던 귀암사(龜巖寺·영구암)·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 寺)와 함께 이세사(離世寺)가 신어산에 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이 없어 이 절에 대해서 더 언급하기는 어려우나 다행히 여기에서 읊은 시가 한 수 있으니, 그래도 위안이 된다. 다음 시는 고려 시대의 곽여(郭與:1058~1130)가 이세사에서 읊은 시다.
늦은 가을 푸른 바다 천 길 물결에 | 三秋碧海千尋浪(삼추벽해천심랑) | |
<서거정, 김해금강사(金海金剛社)> |
시인의 이동 경로를 보아 이세사는 신어산에서도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배를 매어두고 산책하듯 둘러보며 절을 찾은 나그네의 여유로운 마음처럼 숨이 차게 올라야 하는 곳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시인은 속세의 인연이랄 수 있는 가야국 왕업과 수로왕의 후손을 사찰의 그것과 하나로 놓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엽편주 거울 같은 물에 날아오니 | 一葉飛來鏡面平(일엽비래경면평) | |
<서거정, 김해금강사(金海金剛社)> |
시에서 보면 고려시대 당시 감로사는 금빛이 찬란하고, 산에 기댄 절 주변으로는 바위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고 소박한 뜰이 가꾸어진 모습이었던 것 같다. 절에 들어선 시인은 아늑한 절의 분위기에 빠져 벼슬살이를 잊어버리고 싶다고 토로하고 있다. 다음은 안유와 거의 같은 시기 이견간(李堅幹·?~1330)의 시다.
신선의 골짜기에 들어오니 넓은 들이요 | 竭來仙洞得寬平(갈래선동득관평) | |
<서거정, 김해금강사(金海金剛社)> |
이견간은 앞에서 본 안유의 시보다 더욱 상세하게 감로사 주변을 읊고 있으니, 삼면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 사이로 강물이 비치며,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고요한 절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다만 앞의 안유와는 달리 이견간은 마지막 구절에서 절에 온 차에 관직에 등용해준 임금을 축수하겠다고 관리로서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어, 절을 대하는 두 사람의 생각이 대조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흥부암(興府菴)으로 간다. 김해 시내의 서쪽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임호산(林虎山)은 가조산(加助山) 또는 유민산(流民山), 호구산(虎口山)이라고도 한다. 김해읍지에는 '가조산은 부에서 서쪽으로 5리다'라고 하였다. 임호산은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 가락국 때 장유화상은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조선조 말의 이종기(李種杞·1837∼1902)는 고서영지(古西影池)라는 시를 읊으면서 '군 서쪽에 유민산이 있는데 험악하다. 그래서 못을 파서 그 그림자를 담궜다'고 했다. 임호산이 얼마나 험하고 기운이 강했으면 이 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절을 지어 누르고, 못을 파서 그 그림자를 못 속에 담그려고 했겠는가? 여기에 지은 절이 바로 흥부암이다.
기와집 얽어놓은 바위 험준 하거니와 | 架成蝸屋石嵯峨(가성와옥석차아) | |
<이학규, 금관기속시> |
흥부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이것은 이학규가 살았던 당시에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절에 올라가보면 김해 시내는 물론이요, 멀리 바다가 보이는 경관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세 번째 구절의 '스물여덟 차례 나팔이 울린다'는 것은 성문이 닫히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당시 도성에서는 밤 10시경에 종을 스물여덟 번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그렇게 되면 집집마다 불을 켜게 되어 별이 모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밤에 흥부암에 올라가보면 이학규의 이 느낌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진변 서쪽 성이 저 밖으로 두르고 | 辰弁西城俯㢠郊(진변서성부형교) | |
<이학규, 춘조동정택승사군 등서산흥부암(春朝同鄭宅升使君 登西山興府菴)> |
봄날 아침에 흥부암으로 올라 가면서의 느낌을 읊은 시다. 가파른 임호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개미굴로 올라가는 개미에, 절은 포개어놓은 제비 둥지에 비유하여, 흥부암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은 흥부암에 오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돌소리 차디차니 사월이 서늘하고 | 石籟泠泠四月凉(석뢰냉냉사월량) | |
<허훈, 등흥부암(登興府菴)> |
4월인데도 산꼭대기에 있는 흥부암은 서늘하다. 그러나 역시 봄은 봄인지라 비가 개이고 햇빛이 비치자 대나무, 바위 주변의 꽃들이 생기를 되찾는다. 이러한 풍경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시인은 결국 석양녘의 강 물결을 보고야 말았다.
태평흥국은 아득해라 천 년이 되었으니 | 太平興國杳千秋(태평흥국묘천추) | |
<허훈, 휴족제명오 족질경무 채 상흥부암 동상추경 이사징방여래차 희극공부(攜族弟明五 族姪景茂 埰 上興府菴 同賞秋景 李士澄訪余來此 喜劇共賦)> |
제목에서 보듯이 시인은 집안 동생, 조카들과 흥부암에 올라 가을 풍경을 보고 있다가 찾아온 이사징(李士澄)과 시를 지었다. 첫 번째 구절의 태평흥국은 이 절이 지어졌다고 알려진 송나라 태종 연간인 900년 대 말이다. 이렇게 오래된 절에 올라 신선이 된 듯한 감상에 빠지는 맛도 좋지만 이보다는 가까운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기쁨이 가장 큰 것이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