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반천 너머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대성동 고분군에 '가야의 여인' 채현의 현신처럼 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 은린 반짝이는 해반천, 그리고 대성동 고분군
바람이 차갑다. 경전철 박물관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니 차가운 바람이 회색 넥타이를 날린다. 검은 색 양복은 차가운 냉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옛 동료 민식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나는 불현 듯 그와의 추억이 스며있는 대성동 고분군으로 가고 싶었다.
 
내 눈앞에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은린을 반짝이는 해반천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전설이 서린 해반천. 그 옛날에는 '거북내'로 불리던 개천이었다. 오밀조밀한 바위들과 금모래가 바닥에 놓여 있고, 옥구슬처럼 영롱한 물방울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나는 해반천 너머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대성동 고분군을 쳐다본다. 그리고 갓을 쓴 선비처럼 은은한 자태를 뽐내며 고요히 앉아 있는 고분박물관을 바라다본다. 세월은 무심해서 벌써 이십 육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옛날 박물관에서 학예사로 일했던 내가 이제 오십을 넘긴 나이가 되다니.
 
박물관 옆 구릉에서 바람이 낮게 날아온다. 널찍한 마당에는 박석이 단정하면서도 거친 모습으로 박혀 있다. 단층으로 이루어진 고분 박물관. 회색의 지붕 위로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고 있다. 다소 차가운 바람이지만 공기는 맑고 상쾌하다. 나는 심호흡을 길게 하며 박물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수 십 년 전의 그 흔적 안으로 나는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 가야의 아마조네스를 만나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청동거울이다. 나는 거울과 기마인물상을 지나 다양하게 꾸며진 박물관 내부를 둘러본다. 해마다 찾아오는 곳이긴 하지만, 민식의 장례를 치른 오늘은 왠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박물관 안에 전시된 유물에 민식의 흔적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 대성동 고분군을 지키고 있는 가야 기마 무사상.
나는 한 여인의 그림 앞에서 오래도록 머무른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여인의 유골을 추정해서 그린 그림이다. 해설판에는 이 여인이 하녀일 거라는 추정이 적혀 있다. 그러나 내 의견은 다르다.
 
"민식아, 내가 보기에 이 여자는 여성 전사일 가능성이 있어?"
"여성전사라니? 아마조네스라도 된다는 거야? 이 여자는 하녀가 분명해."
"이 여인의 유골 옆에서 다량의 무기가 발견되었잖아. 그건 여인이 쓰던 무기류가 틀림없어."
"주환아, 소설 쓰지 마라. 이 여자는 순장 당한 거야. 주인이 쓰던 물건을 관리했던 하녀였기에 다리뼈가 발달한 거야."

주환과 나는 발굴 내내 언쟁을 벌였다. 여인의 다리뼈는 다른 무덤에서 발굴된 여인의 뼈와 달리 무척 튼튼했다. 그건 단순히 일을 해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운동이나 훈련을 통해 발달된 근육이 분명했다. 나는 여인의 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채현'이라는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 여인을 발굴할 당시 내가 임의로 붙인 이름이었다.

나는 스스르 눈을 감았다. 당시 박물관장님이었던 교수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온다. 그 분은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의 3대 발굴은 공주 무녕왕릉, 경주 황남대총, 그리고 대성동 고분군이라고.
 
"나를 불렀나요?"
 
갑자기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확 떴다. 몸을 돌린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몸 주변에는 연푸른 안개가 희미하게 서려 있다.
 
"이 여인은?"
 
내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자 여인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온다. 그녀의 몸에서 신비로운 향기가 흘러나온다. 박물관 안에는 긴 정적이 흐른다. 관람객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양 모든 동작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다. 나는 순식간에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날 부른 게 당신인가요?"
"부르다니요?"
"채현이라고 제 이름을 불렀잖아요."
"아, 당신의 이름이 채현이라고요?"
"이것은 당신과 나의 인연일지도 몰라요. 당신에게 우리 가야인의 모습을 전하라는 천손의 명령일 수도 있고."
"천손의 명령?"
"맞아요. 당신들이 수로왕이라고 부르는 그 고귀한 이름. 바로 저 먼 북방에서 내려오신 천손이죠."

나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이 현실이 너무 환상적이었지만, 그녀에게서 가야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는 당신의 정체가 궁금해요. 하녀였나요 아니면 여성 전사였나요?"
"그게 궁금했군요. 자, 눈을 감았다가 떠보세요."

나는 여인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어느새 여인의 옷차림이 변해 있다. 여인은 파형동기가 그려진 방패를 왼손에 들고 있다. 두 팔에 가죽 토시를 찼고, 머리띠는 뒤로 넘어가 있다. 그녀의 이마에는 수국단(守國團)이라 쓰인 띠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어때요, 당신의 궁금증이 풀렸나요?"
"제 추론이 맞았군요. 그런데 진짜 당신의 이름이 채현인가요?"
"맞아요. 제 이름은 채현이에요. 제 정인의 이름은 미유라고 하지요."
"그대는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죠."

이 말에 여인은 다소 슬픈 눈동자가 되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척 깊었다. 마치 검은 강이 쉴 새 없이 흐르듯 흑빛이 감도는 물방울이 그녀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제2차 포상팔국의 전쟁 때였어요. 1차 전쟁은 우리 가락국의 승리로 끝났죠. 허나 2년 후에 다시 포상팔국이 침략했고 저와 미유는 그때 장렬하게 전사했어요."

어느새 채현과 나는 박물관을 나와 대성동 고분군이 있는 구릉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연푸른 연기가 따라 다니고, 희고 고운 구름이 그녀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잘록한 허리가 무척 요염하고, 뒤로 넘긴 머리칼이 음전하면서도 농홍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채현.
 

■ 애꼬지, 그리고 채현과 미유
▲ 아기 구지봉을 뜻하는 '애꼬지'.
"애꼬지라는 곳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나요?"
"잘 알고 있습니다. 아기 구지봉, 제2의 구지봉이죠."
"맞아요 여기는 천손의 자손들이 묻혀 있는 성지랍니다."

채현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구릉을 바라보며 말한다. "작은 부탁이 있답니다. 사실 저와 미유는 전쟁 때문에 혼인하지 못했어요. 전 그게 지금도 한이 되죠. 그건 미유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래요. 그 한 좀 풀어줘요."

어디선가 훤칠한 사내가 채현 옆에 나타났다. 강왕한 기골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자였다.

"미유!"

채현은 미유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긴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대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이 파형동기를 하늘로 세 번 던져주면 됩니다. 가락국에서는 남녀의 혼인식 때 귀한 제물을 하늘로 던지는 습속이 있었죠. 세 번은 삼성을 의미하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세 개의 별을 낳는다. 그런 의미랍니다."

채현은 왼손에 든 방패에서 파형동기를 떼어 나에게 건네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그윽한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들의 소원대로 파형동기를 세 번 하늘로 던진다. 파형동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연록색 파형동기만이 무심히 놓여 있다. 나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본다. 솜털 구름 두 개가 하나로 서서히 합쳐지고 있다.
 

■ 그리도 찾던 가야 왕들의 무덤을
▲ 대성동 고분군에서 내려다본 고분박물관.
"애꼬지란 말은 분명 봉우리를 의미하는 거야. 애는 아기란 뜻이고, 꼬지란 말은 구지의 옛 말이지. 결국 애꼬지는 아기 구지봉이란 뜻이야."
 
갑자기 발굴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모두들 어떤 강한 희망에 들떠 있었다. 3년간에 걸친 노력이 마침내 성과를 보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다시 대학 본부와 협의하여 부족한 발굴비를 타 오셨다. 여전히 적은 액수였지만 발굴단원들은 먹고 자는 것을 아껴 가며 애꼬지 발굴에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발굴단원들은 627일 동안 약 241기의 고분에서 3천 점의 가야 유물을 발견했다. 특히 수많은 유물 중에서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 유물은 단연코 파형동기였다. 파형동기는 13호분에서 무려 6점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은 고대 일본 왕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방패 장식물이었다. 당시 일본 측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일본 국영방송에서 직접 취재를 올 정도였다. 파형동기는 방패에 다는 일종의 장식품으로서 일본 것보다 훨씬 크고 상태도 양호했다.

나는 옛일을 회상하며 서서히 노출 전시관 안으로 들어간다. 민식이 아픈 몸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원형을 보존하려 애쓴 전시관이었다. 대성동 고분군을 발굴하는 데는 교수님의 추론이 적중했고, 그 유물을 지키는 데는 민식의 공로가 가장 컸다. 나는 털털한 민식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채현과 미유가 사라진 옥색 하늘도 떠올린다. 두 사람은 비로소 부부가 되어 저 먼 피안의 세계에서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전시관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얼굴을 난타하는 바람이 이제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나는 파형동기를 한 번, 두 번 하늘로 던진다. 그때마다 민식의 얼굴이, 그의 열정이 마음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세 번째 하늘로 던지니 파형동기는 빙글 빙글 돌면서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민식의 얼굴이 파형동기 날 사이로 잠시 보였다가 사라진다. 애꼬지에 부는 바람. 그건 차갑지만 따듯한 가야의 바람이었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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