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싶어요. 아무런 장식이나 그림 없이,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빚어낸 것을 가마에 넣고 나면 그때부터는 불에게 맡깁니다. 저는 1차 작업을 할 뿐, 2차 작업은 불이 하는 거지요. 불의 작업은 인간의 손길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마에 불 올린다'고 말합니다." 청욱요 박주욱(44) 씨의 말이다.

청욱요는 백숙으로 유명한 진례면 평지마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진례면 신안리 717-6. 도로에서 바라보니 청욱요 입간판보다 장작가마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작업장이 가마를 마주보고 있다. 작업장 안쪽에는 전시장을 겸해 손님을 맞는 공간이 있다. 전시장을 살펴보니 박주욱의 작품이 나무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박주욱의 첫 느낌은 '장르를 짐작하기 힘든  젊은 예술인'이란 것이었다. 기자가 만난 도예인들은 주로 생활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박주욱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였다.
 

▲ 청욱도예에서 만난 젊은 도예인 박주욱. 전시장을 겸한 작업장에 있는 작품들이 그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대변하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박주욱은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5세 무렵부터는 대구에서 자랐다. 청욱도예는 청도와 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만든 이름이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저도 어려선 미술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운동을 잘해서, 거의 모든 분야의 코치들이 저를 스카우트 하려 했을 정도였지요. 집에서 운동하는 걸 반대해서 운동은 안했어요. 중학교 때, 어떤 물건이든 만져보고, 해체하고, 두드려 부수고, 다시 조립하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그래서 공업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집에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권했어요."

스타일·형태·선을 고집하지 않고
느낌으로 만나는 전율 같은 작품 심취
"나중에 남는 게 나의 것이 되겠지요"
 
안이 보이지 않아 속을 알 수 없듯이
많은 것을 숨겨둘 수 있는 '단지' 선호
"스스로 도자기 그 자체가 되는 게 꿈"


가고 싶었던 공고를 가지 못한 그는 학교에 정을 붙이고 싶어 모든 서클에 가입했다. 친구 따라 미술부에도 가입했는데, 선배들이 가르치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었다. 그는 다시 미술대학 진학을 원했지만, 부모가 그림을 그리면 가난하게 산다며 반대했다. "미대를 목표로 한 친구들이 미술학원 다니면서 실력이 늘어가는 걸 볼 때면 속이 상했어요. 저는 겨우 점심시간마다 미술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 게 고작이었죠. 아무리 반대해도 내가 끝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어머니가 결국 제 마음을 알아주시더군요. 3학년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언젠가 어머니는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어린 주욱을 데리고 해인사에 갔을 때 한 스님이 그를 보더니 "이 아이는 묶어두면 안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실제로 박주욱도 "저는 죽을 때까지 자유롭게, 열린 상태에서 모든 걸 받아들이고 또 표현하면서 살고 싶어요. 어쩌면 그 스님도 그런 말씀을 해주신 게 아닐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사춘기 때잖아요. 이유 없이 불만이 쌓이는 시절이었죠. 지금 제 얼굴이 그때 얼굴이에요. 고등학생 때부터 아저씨 얼굴이었는데, 인상을 쓰고 다녔어요. 그런 저의 감성을 부드럽게 다독여준 선생님 한 분을 잊지 못합니다. 음악을 가르쳤던 송상철 선생님. 언제나 저를 보시면 '주욱아, 스마일~' 하시면서, 많이 웃으라고 주문하셨어요. 그리고 '뭔가를 배우려면 스펀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펀지의 물기를 꼭 짜내고 난 뒤 다시 스펀지에 물기가 차면, 다시 짜내고, 또 다시 짜내고, 죽을 때까지 그런 마음으로 배워라. 그렇게 살아라'고 가르치셨죠. 제 인생의 첫번째 스승이십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인터뷰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는데, 그게 모두 선생님 덕분이란다. 송상철 선생님이 항상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며 '주욱아, 스마일~' 하고 계시나보다.
 
▲ 박주욱이 좋아하는 작품은 '단지'. 아래에는 뚜껑이 있는 네모단지 작품.
친구들보다 늦었지만, 미술학원을 다니며 실력을 배가한 그는 경일대학교 공예학과로 진학했다. 섬유, 목공, 도예의 3분야 전공이 있었는데 그는 도예를 전공했다. 그의 활달한 기질이 동기들의 마음을 잡아 그는 과대표를 맡았다. 그런데, 마침 등록금 인하투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과대표였던 그는 학교 측과 맞설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최인철 교수님이 그를 시골마을에 있는 작업장으로 데려갔다. "수업거부 등으로 분위기가 안 좋았고, 제가 과대표를 맡고 있다 보니 교수님들과도 어색한 관계였어요. 그런데 최인철 교수님이 작업장까지 저를 데리고 가서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주욱아, 이거 한 번 봐라' 하시면서 물레를 차면서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가 두 번째로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물레 차는 걸 처음 봤으니 신기했죠. 교수님께서 '흙 한번 만져볼래?' 하시더군요. 난생 처음으로 흙을 만졌는데,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이거다! 드디어  찾았다!' 뭐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교수님에게 머리를 숙였다. "교수님 작업장에 들어오겠습니다. 도자기 하고 싶습니다."
 
최인철 교수의 작업장에는 도예가들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많이 찾아왔다. 다른 학교에서 도예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찾아왔다. "2년 정도 교수님 작업장에서 그분들께 많은 것을 배웠지요. 인생과 예술을 주제로 나누는 모든 이야기들이 제겐 공부였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예술의 바탕이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1997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김해로 왔다. 김해요, 장유도예에서 각각 1년씩 일을 한 뒤 1999년 청욱요를 설립했다. 청욱요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생림면 도요마을의 '김해예술창작스튜디오(현 도요창작스튜디오)'였다. 이곳에서 1년 반 정도 있다가 진례면 무송마을을 거쳐, 4년 전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
 
"오전 6시면 늘 요장에 도착했어요. 새벽에 농삿일 나가시는 어르신들을 뵈면 90도로 절하면서 인사를 드렸고요. 처음 뵙는 어르신들도 일단 '어, 일찍 오네'라고 인사를 받고 난 뒤 '그런데, 니가 누고?' 하고 물으셨어요. 매일 그렇게 인사를 드렸더니 나중에는 어르신들이 '젊은 사람이 먹고 살라고 열심히 하네' 칭찬도 하고, '농사도 안 짓고 뭐 먹고 사노?' 하면서 수확한 농산물도 가져다주셨죠. 저도 손님이 오면 평지마을 백숙 식당 곳곳을 골고루 다녔구요. 덕분에 시골마을에 잘 정착했습니다. 가마에 불 올릴 때는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연기가 많이 나니까요. 어르신들이 '불 때는데 연기가 나겠지'라며 저를 이쁘게 봐주십니다."
 
그는 "딱히 내 스타일, 나만의 형태, 선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걸 다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만들고 있는 게 100개의 형태라면 시간이 흐르면서 50개, 30개, 10개로 서서히 줄어들면서 서 너 개만 작업하게 되겠죠. 그때 가서도 끝까지 만들고 있는 그것, 그것이 '박주욱의 것'이 되겠지요"라고 말했다.
 
물론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형태의 그릇이 있기는 하다. '단지'이다. "겉은 보이지만, 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뚜껑이 있는 것은 더 안보이죠. 안 보인다고 해서 단지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닙니다. 나는 나만의 것을 감추어 둘 수 있는 단지가 좋아요. 그게 물건일 수도 있고, 제 마음일 수도 있지요." 흙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을 그대로 표현해 단순하고 질박한 작품을 빚어내는 그의 작품세계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그에게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으냐고 물었다. 우문이었는데, 현답이 돌아왔다. "제 자신을 다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 제가 하는 모든 작업은 그것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 자리에 묵묵히 머물러 있을 뿐이지만, 귀중한 것이 담겨 있어,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가진. 제가 도자기 그 자체이고 싶습니다."


▶박주욱
청욱도예 운영. 김해도예협회·경남도예협회·전국예술인연합회 회원. 대구·경북산업디자인전 추천작가. 2007년 경남차사발전 으뜸상, 2008년 선진문화상·대한민국 장인상 외 수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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