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는 가락국 제8대 질지왕(銍知王·?~492)이 절을 지을 당시 세웠다는 장유화상사리탑(長遊和尙舍利塔·장유화상은 허왕후의 오빠로서 허보옥(許寶玉)이라고도 한다)이 남아 있다. 절에서 오른쪽 60m 아래가 장유화상이 최초로 수도했던 토굴이라 하고, 장유사 입구의 사라진 절터는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김수로왕(首露王·42~199)과 허왕후가 처음 만나 장막을 치고 합혼(合婚)한 곳에 세운 왕후사터(王后寺址)라고 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절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불교의 전래는 김수로왕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는 중국 진(晉)나라 승려 순도(順道)가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 2년(372)에 고구려로, 같은 진나라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침류왕(枕流王·384~385) 즉위년(384)에 백제로,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눌지왕(訥祗王·417~458) 때 신라로 불교를 전했다는 사실 즉,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찰들이 절의 연원을 신비로움과 연계시키는 경우는 허다하니,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 절을 감상하기에는 더욱 유리할 것이다.
현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전신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1545년 6월 김해에서 온 장유사 승려 천옥(天玉)의 부탁으로 적어준 <장유사중창기(長遊寺重創記)>를 보면, 이 절을 처음 지은 것은 신라 애장왕(哀莊王·800~809) 때의 화주(化主)였던 월지국(月支國) 신승(神僧) 장유(長遊) 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로왕이 중창한 후 화주 소석(小釋)에 의하여 여덟 번째 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주세붕이 기문을 적어준 것은 아홉 번째 중창이다. 주세붕의 기문에서 천옥이 이야기하였다는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설이나 기록과는 시기와 장유의 출신 지역 차이가 너무 크다. 필자는 다시 말한다. 절이 누구에 의해 언제 생겼느냐가 아니라 그 절을 유지하고 있는 정신적 바탕이 무엇이냐, 그것을 참으로 종교적 차원에서 믿느냐가 중요하다. 기문에서 천옥은 절의 규모를 설명하였는데, 기둥이 60개이며, 불전(佛殿)은 순금을 쓰고 주단(朱丹)을 섞었다고 하였으니, 그 규모와 화려함이 천옥의 말대로라면 당시 영남에서 최고였을 것이다.
절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둘러보았으니, 이제 그곳을 찾았던 시인의 감상을 보기로 하자. 그런데 장유사에서 읊은 시는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의 것밖에 없다. 이 점 아쉽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하여도 시간의 차이 등 다양한 상황에서 읊은 것이라 당시 장유사의 모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거센 바람 불어 일렁이더니 하늘엔 눈 개이고 | 長風吹動雪晴天(장풍취동설청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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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시상은 허공에 가득하고 | 悠悠詩思滿虛空(유유시사만허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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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암자 고요하여라 천년을 지났고 | 孤菴寥寂閱千秋(고암요적열천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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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세월 창원과 김해 두 고을의 경계인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장유사. 오랜 세월과 깊은 골짜기에 기대어 인간인 양 자연인 양 오묘한 자취를 키웠다. 이때 나그네의 호기심인양 햇빛이 누각 사이를 비추어 시야에 새로운 세계를 펼쳐준다. 시인은 세 수의 시에서 그윽한 골짜기와 신비로운 절 분위기,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장유사가 보여주는 모든 것을 노래하였다.
붉은 깃발 사방으로 흩어져 검은 깃발 덮으니 | 紅旂四散黑旂微(홍기사산흑기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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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절의 우상(虞裳)은 조선조 후기 역관(譯官)이자 시인인 이언진(李彦瑱·1740~1766)이다. 그는 1763년 통신사 조엄(趙曮)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다. 27세로 요절하였는데,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초고(草稿)를 직접 불살라버려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으나, 그의 아내가 빼앗아 둔 일부의 유고(遺稿)가 문집인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에 전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소설 <우상전(虞裳傳)>을 통해 그를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절의 의미는 이언진이 통신사의 역관으로 부상, 즉 일본에 가서 활약한 것을 말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허훈이 장유사를 떠나면서 그 절의 승려에게 준 세 수의 시를 감상하며 우리도 장유사를 떠나기로 하자.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