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는 김해의 도요저는 본래 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나루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도요저는 김해부의 동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강을 따라 민가가 거의 200여 호다. 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울타리가 서로 잇닿아 있는데 농업을 일삼지 않고 오로지 수운(水運)만을 익힌다.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아 팔아 상류쪽 여러 고을로 다니면서 재산을 일군다. 풍속이 순박하여 한 집에 손님이 있으면 여러 집에서 각각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예를 차리는데, 혼사·초상·제사 때도 모두 그렇게 한다. 만약 어떤 집의 아내나 딸이 음탕한 행동을 하면 모든 집이 모여 의논해서 마을에서 쫓아내버린다. 이웃 지역인 마휴촌(馬休村) 200여 호의 풍속도 같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후 증보된 내용을 보면 주민은 400여 호다. 마을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과거에 오른 자가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앞다투어 학당을 짓고, 여럿이 모여 글을 읽어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제법 많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600년대의 학자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조선조 후기 학자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도요의 전통적 특성임을 알겠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의병장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 이두(吏讀)로 기록한 일기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김해·동래 등지의 사람들은 모두 왜적에게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곤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書員)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田稅)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稅米)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적으로 뱀 먹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정 많고 예의 바르던 도요 사람들의 특성이 전쟁 와중에 흩어져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는 세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그러나 현재 도요는 마을을 두르고 있는 비암봉의 산자락과 앞을 휘감고 흐르는 넓은 낙동강을 바탕으로 연극인, 미술가, 시인, 소설가들이 입주하여 예술촌을 이루고 있으니, 그 옛날 도요의 아름다운 풍속이 되살아나는 것이리라.
동쪽 이웃 딸 있으면 서쪽 이웃에 시집보내고 | 東隣有女西隣嫁(동린유녀서린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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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도요저(都要渚)> |
다음은 조선조 초기 정사룡(鄭士龍·1491~1570)의 시다. 그는 48세이던 1539년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내고 경상남도 의령에 칩거하였다. 이 당시 그는 본관인 동래에 성묘차 다녀오던 길에 바람이 불어 도요에 배를 대었다.
해질녘 바람이 더욱 심해지더니 | 向夕風顚甚(향석풍전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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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룡, 조풍투박도요저(阻風投泊都要渚)> |
정사룡은 시에 주를 달아 도요저는 '김해 땅이다'라고 하였다. 바람이 불어 도요에 배를 댄 시인의 귀에는 물이 길 위에까지 넘치는 소리가 들리고, 눈에는 구름 덮힌 비암봉이 보이며, 코에는 고깃배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얹힌다.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가장 좋은 것은 역시 한 잔 술이다. 정사룡은 이 외에도 도요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겪은 일을 다섯 수의 시로 남겼다.
내 길을 가다 금화에서 멈추었더니 | 輟從金華佩竹符(철종금화패죽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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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산을 덮어 남은 것 다 흩어버리니 | 輟從金華佩竹符(철종금화패죽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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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한 모임 그때는 훌륭한 일 많았으니 | 高會當時勝事繁(고회당시승사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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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 무렵 새벽밥 하곤 다시 불 때지 않고 | 蓐食侵晨不再炊(욕식침신부재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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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잠 못 자고 옷 입은 채 누웠다가 | 通宵失睡臥連衣(통소실수와연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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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룡, 도요저서사(都要渚書事)> |
세 번째 구절의 비렴(飛廉)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상상의 새다. 시인은 바람이 불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바람신의 모욕과 학대라면서 대궐에 가서 송사를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장난스러운 표현으로 답답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