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요 마을 전경. 바로 뒤로 산이 두르고 강둑 너머로 낙동강이 흐르는 편안한 느낌의 마을이 정겹다.
도요저(都要渚)는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의 가야진(伽倻津) 나루 사이인 낙동강 하구를 왕래하던 나루터다. 삼랑진의 세 물줄기 아래쪽에 형성된 모래톱으로 바로 건너편이 삼랑진이다. 현재의 행정명은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김해의 도요저는 본래 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나루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도요저는 김해부의 동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강을 따라 민가가 거의 200여 호다. 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울타리가 서로 잇닿아 있는데 농업을 일삼지 않고 오로지 수운(水運)만을 익힌다.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아 팔아 상류쪽 여러 고을로 다니면서 재산을 일군다. 풍속이 순박하여 한 집에 손님이 있으면 여러 집에서 각각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예를 차리는데, 혼사·초상·제사 때도 모두 그렇게 한다. 만약 어떤 집의 아내나 딸이 음탕한 행동을 하면 모든 집이 모여 의논해서 마을에서 쫓아내버린다. 이웃 지역인 마휴촌(馬休村) 200여 호의 풍속도 같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후 증보된 내용을 보면 주민은 400여 호다. 마을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과거에 오른 자가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앞다투어 학당을 짓고, 여럿이 모여 글을 읽어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제법 많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600년대의 학자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조선조 후기 학자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도요의 전통적 특성임을 알겠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의병장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 이두(吏讀)로 기록한 일기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김해·동래 등지의 사람들은 모두 왜적에게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곤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書員)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田稅)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稅米)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적으로 뱀 먹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정 많고 예의 바르던 도요 사람들의 특성이 전쟁 와중에 흩어져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는 세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그러나 현재 도요는 마을을 두르고 있는 비암봉의 산자락과 앞을 휘감고 흐르는 넓은 낙동강을 바탕으로 연극인, 미술가, 시인, 소설가들이 입주하여 예술촌을 이루고 있으니, 그 옛날 도요의 아름다운 풍속이 되살아나는 것이리라.

동쪽 이웃 딸 있으면 서쪽 이웃에 시집보내고
남쪽 배의 생선 오면 북쪽 배에 나누어주네
한 조각 강가 살아가는 일 궁색도 하여라
자손들이 끝내 농사는 꿈도 꾸지 못하네  

東隣有女西隣嫁(동린유녀서린가)
南舫魚來北舫分(남방어래북방분)
一片江壖生事窄(일편강연생사착)
子孫終不夢耕耘(자손종불몽경운)

 

 
<김종직, 도요저(都要渚)>  


▲ 도요마을 입구 전경. 감자 마스코트가 도요감자의 유명세를 대변하고 있다.
김종직은 시에 주를 달아 '도요저는 김해와 밀양의 경계에 있다. 이곳 주민 수백여 호는 대대로 생선 장사를 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농사를 짓지 않는다. 음란한 짓을 한 부녀자가 있으면 그 집을 파내어 못으로 만들고,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내쫓았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서 보았던 도요의 풍습을 더욱 상세히 알 수 있다. 시를 보면 당시 도요민들은 농사보다는 어업에 의존하는 궁핍한 삶이었으나, 서로서로 사돈을 맺을 정도로 이웃과의 관계가 돈독하였고 인정이 무척이나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도요는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서의 불상사를 제외한다면, 대대로 풍속이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조선조 초기 정사룡(鄭士龍·1491~1570)의 시다. 그는 48세이던 1539년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내고 경상남도 의령에 칩거하였다. 이 당시 그는 본관인 동래에 성묘차 다녀오던 길에 바람이 불어 도요에 배를 대었다.


해질녘 바람이 더욱 심해지더니
모래톱 흐려져 시야가 불분명하네
강물 소리 비스듬히 비탈길에 흩뿌리고
나뭇길 가느다랗게 구름 속으로 통하네
밀물 가까워지니 넓은 물결 빨라지고
비린내가 장삿배에서 풍겨오네
시골 막걸리 사서 편안히 있으려니
수심은 사라지고 은근한 취기에 기댄다  

向夕風顚甚(향석풍전심)
沙昏眼不分(사혼안불분)
江聲斜濺磴(강성사천등)
樵路細通雲(초로세통운)
潮近溟波迅(조근명파신)
腥從販舶聞(성종판박문)
村醪賖取便(촌료사취편)
愁破倚微醺(수파의미훈)

 

 
<정사룡, 조풍투박도요저(阻風投泊都要渚)>  
 

정사룡은 시에 주를 달아 도요저는 '김해 땅이다'라고 하였다. 바람이 불어 도요에 배를 댄 시인의 귀에는 물이 길 위에까지 넘치는 소리가 들리고, 눈에는 구름 덮힌 비암봉이 보이며, 코에는 고깃배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얹힌다.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가장 좋은 것은 역시 한 잔 술이다. 정사룡은 이 외에도 도요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겪은 일을 다섯 수의 시로 남겼다.
 

내 길을 가다 금화에서 멈추었더니
작은 고을 백성과 물자가 본보기에 드네
지난번 일 덜었을 땐 뛰어난 정사 기렸더니
도시락밥이 나그네의 밥 꾸미었던 적 있었나  

輟從金華佩竹符(철종금화패죽부)
雷封民物入型模(뇌봉민물입형모)
向來省事旌殊政(향래성사정수정)
簞食何曾飾客廚(단사하증식객주)

 

 
 
정사룡은 시의 마지막에 '지주(地主)에게 주었다'라고 붙였다. 첫 번째 구절의 금화(金華)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중부의 도시로 전당강(錢塘江)의 지류인 금화강의 북쪽 기슭에 있으니, 여기에서는 도요를 비유한 것이다. 뇌봉(雷封)은 천둥이 치면 그 소리가 100리쯤 진동한다고 하여 지방의 작은 고을 수령을 뜻한다. 도요는 작은 고을이지만 백성들의 삶이나 물자의 쓰임이 대단히 모범적이고, 백성들의 일을 덜어주는 사또의 태도도 기릴 만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은 소박한 음식이면 충분하니 굳이 자신을 위해 별다른 음식을 마련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있다.


홍수가 산을 덮어 남은 것 다 흩어버리니
쓸쓸한 마을은 처음의 것을 다 바꿔버렸네
남은 주민들 괴로워하지 않고 홍안을 노래하고
위로하여 모으니 공 거두어 그 역사 적을 만하네  

輟從金華佩竹符(철종금화패죽부)
雷封民物入型模(뇌봉민물입형모)
向來省事旌殊政(향래성사정수정)
簞食何曾飾客廚(단사하증식객주)

 

 
 
세 번째 구절의 홍안(鴻雁)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鴻雁之什(홍안지십)으로 혼탁한 정치 때문에 흩어졌던 백성들이 정치가 제대로 되어 다시 모인 것을 기뻐하며 노래한 것이다. 시인은 홍수가 나서 모두 쓸어가도 이를 극복해가는 도요 사람들의 강인하고도 긍정적인 태도를 기리고 있다.


성대한 모임 그때는 훌륭한 일 많았으니
정장의 손님 맞는 역과 맹공의 술단지
강 머리 즐거운 곳에 거듭 왔으니
지난 물 부르기 어렵거니 혼 부르지 않으려네  

高會當時勝事繁(고회당시승사번)
鄭莊賓驛孟公樽(정장빈역맹공준)
江頭重到懽娛地(강두중도환오지)
逝水難招不返魂(서수난초불반혼)

 

 
 
▲ 도요 마을 앞을 지나 원동(院洞)으로 흘러가는 낙동강. 푸른 강물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저 앞의 산자락을 돌아나가면 원동이고, 이곳에서 황산강(黃山江)과 만나 삼차수(三叉水), 부산 북구, 사상구, 사하구와 김해, 녹산으로 흘러가게 된다.
시인은 시의 말미에 '조국언(趙國 ) 사군(使君)을 생각하며'라고 주를 달았다. 세 번째 구절의 정장(鄭莊)은 한(漢) 나라 때 사람인 정당시(鄭當時)로 자(字)가 장(莊)이고, 진(陳) 출신이다. 경제(景帝:기원전 188~기원전 141) 때 태자(太子) 사인(舍人)이 되자 닷새마다 하루의 휴가를 얻었는데, 항상 역마를 장안(長安) 교외에 비치해두고, 옛 친구들을 만나거나 빈객들을 초빙해서 밤을 새었다. 태사(太史)가 되었을 때는 손님이 오면 문간에서 기다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맹공(孟公)은 <한서(漢書)>에 양웅(揚雄)이 지은 주잠(酒箴)의 내용에 나오는 '진준전(陳遵傳)'의 주인공 진준의 자다. 술을 좋아해서 술잔치를 크게 벌이곤 했는데, 손님들이 가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들의 수레바퀴 축을 고정시키는 비녀장을 빼내어 우물 속에 던져 넣어 손님이 가지 못하게 했다. 도요에 오자 시인은 정장이나 맹공처럼 그 옛날 자신을 극진히 대접해주었던 조국언에 대한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조국언은 이때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과, 시인이 얼마나 절실히 조국언을 그리워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동틀 무렵 새벽밥 하곤 다시 불 때지 않고
여기저기 아이와 여자 배고픔에 억지로 운다
늙은이는 사람 놀랠만한 시구를 찾아보려고
봉창에 바르게 앉아 콧수염만 꼬고 있네  

蓐食侵晨不再炊(욕식침신부재취)
紛紛兒女強啼飢(분분아녀강제기)
老翁要索驚人句(노옹요색경인구)
危坐篷窓只撚髭(위좌봉창지연자)

 

 
 
아침을 먹고 난 뒤에는 다시 먹을 것이 없다. 여기저기에서 아이와 여자들은 배고픔에 운다. 그리고 늙은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배에 앉아 시구나 생각하면서 하릴없이 콧수염만 배배틀고 있다. 궁핍하면서도 자존감은 꿋꿋이 지키는 도요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밤새도록 잠 못 자고 옷 입은 채 누웠다가
봉창 활짝 열어젖히고 높이 들어 날려 했네
바람신이 방자히 모욕과 학대하는 줄 알았으니
편지 가지고 가 대궐에서 송사하려고 하네 
 

通宵失睡臥連衣(통소실수와연의)
掀簸孤篷欲揭飛(흔파고봉욕게비)
始信飛廉肆陵虐(시신비렴사능학)
欲將書疏訟天扉(욕장서소송천비)

 

 
<정사룡, 도요저서사(都要渚書事)>  

세 번째 구절의 비렴(飛廉)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상상의 새다. 시인은 바람이 불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바람신의 모욕과 학대라면서 대궐에 가서 송사를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장난스러운 표현으로 답답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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