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열과 복통·설사로 체내 수분 고갈
탈수로 인한 부정맥 탓 돌연사 가능성


경종은 그 유명한 폐비 장희빈의 아들이다. 하지만 장희빈의 소생이라는 점, 정치적으로 남인계열에 속한다는 점 때문에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우암 송시열은 세자 책봉을 극렬히 반대했다.
 
송시열이 누구인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발전시킨 기호학파의 주류이자, <송자대전>을 지어 당시 정계와 학계를 호령하던 거두였다. 우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경종을 세자에 책봉했다. 송시열은 사사되고, 서인은 실각한다.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이 폐출되고 숙종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경종을 옹립하던 남인은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한다. 장희빈의 빈 자리는 숙빈 최 씨가 대신하여 연잉군(훗날 영조)을 출산한다. 숙빈 최 씨는 노론의 지지를 받고,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는다. 노론과 소론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영조가 게장과 감을 진어하여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경종독살설'의 배후인지도 모른다.
 
<본초강목>에서는 게장과 생감을 상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으면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하며, 그 때문에 옻독이 올라 피부에 두드러기가 날 경우 게를 바르면 사라진다. 이에 착안해 게장과 생감이 차가운 성질을 띤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극의 성질을 띤 찬 음식을 진어한 것이 연잉군이므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허나 경종 독살설은 의문이 든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경종 4년 8월 2일 '임금의 병이 위급해졌고', 3일 '밤에 한열이 갑자기 심해졌으며', 16일 '병이 중하여 식사량이 줄고 소변이 적어지다'라고 되어 있다. 식사량이 줄자 19일 어의가 밥맛을 돋구는 '육군자탕'을 달여 올린다. 허나 20일 '밤에 가슴과 배가 아파오자' 21일 약방에서 복통을 치료할 목적으로 '곽향정기산'을 진어할 것을 청한다. 22일 '복통과 설사가 심해지고' 23일 '설사가 그치지 않아' 24일 '의식을 잃어 인삼차를 달여 올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25일 환취정에서 경종은 승하한다.
 
승하 직전 경종은 입맛이 없어 수라를 들지 못했다. 이를 안타까워해 대비전에서 보낸 것이 게장이다. 감은 제철 과일이라 게장을 먹은 후 후식으로 올라간 것이다.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을 따라 추적해보면, 3일 밤에 경종은 체온이 올라가 발열이 났는데, 체열의 생산과 방산의 균형이 깨어지고 있었다. 16일은 소변이 적어져 체내 수분이 고갈되던 중, 영조가 진어한 게장과 감을 맛있게 먹고 경종은 과식을 한다.
 
경종의 과식은 복통, 설사로 이어지고, 23일 그치지 않는 심한 설사로 인해 탈수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탈수는 전해질불균형을 초래해 부정맥을 유발하기 쉽다. 주지하듯이 부정맥은 심근경색으로 인한 돌연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경종은 가슴이 조이듯 아파왔다고 한다. 이는 경종이 장희빈의 폐출과 당쟁으로 인해 평소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과식을 계기로 복통과 설사증세가 나타났고, 이후 심한 설사로 인한 탈수와 부정맥 탓에 심장질환이 악화되어 돌연사했다고 보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의학에서는 심근경색을 '진심통(眞心痛)', '궐심통(厥心痛)'이라 한다. 진심통은 '수족이 청랭한 것이 관절까지 이르고, 심통이 심한데 아침에 발병하면 저녁에 죽고, 저녁에 발병하면 아침에 죽는다'라고 되어 있다. 경종은 낙이 없는 삶의 끝에서 게장 한 그릇 맛있게 먹고 나서 홀연히 세상을 떠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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