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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성을 지키던 수국단 여전사 미리… 예안리 묘터에 묻히던 날 하늘도 울었다(9) 예안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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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3.12.31 10:17
  • 호수 154
  • 12면
  •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kkim40@hanafos.com)

   
▲ 대동면 예안리 고분군.
■ 이루의 딸, 미리
"이보게, 딸일세. 들어가 보게."
 
여담 노파는 움집 밖으로 나와 마당을 서성이는 이루에게 말했다.
 
"딸이라고요? 아, 기다리던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
 
마을 아래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이루의 듬성듬성한 수염이 흩날렸다. 집 안에 들어서니 생명의 냄새가 그득했다. 그 향내는 갓 태어난 생명체가 뿜어낸 신성한 기운이었다. 아내의 왼쪽에서는 작은 생명체가 갈색 포대기에 싸인 채 새근대고 있었다. 아내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아이를 이루에게 건넸다.
 
"추미, 내 아이의 이름을 지었소이다."
"무엇인가요?"
"미리라고 지었소이다."
"미리… 좋은 이름이군요."
"백일이 지나면 이 아이를 신어산에 데려갈 것이오. 그곳에서 신성한 기운을 받게 할 것이며 이마를 누르는 돌을 가져오겠소. 분명 이 아이는 우리 가락국을 지키는 위대한 전사가 될게요."

이루는 딸의 얼굴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서쪽의 봉창으로 들어온 연노란 햇살이 보드라운 손짓으로 아기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미리가 태어난 지 십 년이 되었다. 계절은 봄이었고, 푸른 물에 흠뻑 젖은 나뭇잎들이 산들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소녀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는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옷에는 온통 흙과 검불이 묻어 있었고, 소녀의 왼손에는 나무로 만든 조악한 칼이 들려 있었다. 아이의 이마는 다른 사람과 달리 유달리 납작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납작하게 만든 이마였다. 그건 신성한 기운을 받은 소녀들만이 누리는 소중한 증표였다.

조금 있으니 숲길을 올라오는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올라오는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곧이어 키가 훤칠하게 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의 아버지 이루였다. 그는 한 달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루는 상인이었다. 바다 건너 왜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철정과 귀한 물건을 교환하였다.

"우리 미리가 마중나왔구나."

이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미리를 왼팔로 안았다. 그러면서 미리의 납작한 이마를 어루만졌다.

"우리 미리가 훨씬 예뻐졌네."
"진짜?"

이루 부녀는 다정히 손을 잡고 숲길을 올라갔다. 숲속에 안개가 조금씩 스며들었다. 아래쪽 바닷가에서 밀려온 해무였다. 해무 사이로 이루 가족이 살고 있는 푸른 움집이 아스라이 보였다.
 

■ 여전사 미리
   
 
"핑! 핑! 피융~"
 
푸른 대기를 가르며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이었다. 화살 세 개는 오십 보 거리의 과녁에 정확히 꽂혔다.

"하여간, 미리의 쇠뇌 솜씨는 대단하다."

미리의 수국단(守國團) 동료인 연경이 과녁에 꽂힌 화살을 살펴보며 감탄했다.

"무슨 소리! 우리 채현님이 최고 사수지."

분산성 동쪽 망루 앞에 설치된 활쏘기 장에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졌다. 그녀들의 납작한 이마에는 붉은 띠가 매어져 있었고, 띠 중앙에는 수국단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훗, 그리도 미리의 솜씨가 대단한가?"

미리와 연경의 뒤에서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영롱한 이슬 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흡사했다. 미리와 연경은 몸을 돌려 채현에게 예를 표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했다. 채현은 왼쪽 어깨에 걸친 쇠뇌를 꺼내 과녁을 정조준했다.

화살은 빠르게 날아가더니 이미 꽂혀 있는 화살 뒤꽁무니를 파고들며 둘로 쪼개버렸다. 아, 채현의 화살이 미리의 화살을 맞춘 것이었다. 연경과 미리는 그 신비스런 광경을 지켜보았다. 가히 가락국 최고의 신궁이었다.

"역시 행수님은 신궁이세요 저 같은 것은 발끝도 못 따라가겠어요."
"호호. 그 무슨 과찬을. 미리의 솜씨나 내 솜씨나 그게 그거지."

채현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미리와 연경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 한쪽에 약간 그늘이 져 있었다.

"행수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표정이…."
"응. 포상팔국이 쳐들어올 것 같아."
"예? 감히 그자들이?"

미리와 연경은 노기 띤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대가락국의 연안을 종종 침범하던 패악무도한 무리들이었다.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수국단이 지키고 있는 분산성이 가장 위험했다.

"무얼 그리 걱정해? 어릴 때부터 우리는 편두를 하면서 이 땅의 전사로 키워졌어. 이 납작한 이마는 우리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조국을 지키는 전사의 표상이야. 서역에서 오신 허왕후의 기상이 바로 우리 이마에 연연히 서려 있는 거야."
"맞아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포상팔국 따위야…."
"자, 모두 말을 타고 나를 따라와. 오늘은 푸른 물가를 마음껏 달려보자!"
 

채현은 훌쩍 말 위에 올라 힘차게 앞으로 달려갔다. 미리와 연경도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둘렀다. 어느새 세 여인은 붉은 띠를 허공에 휘날리며 위풍도 당당하게 숲길을 내려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가락국을 지키겠다는 아름다운 향훈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 미리의 출전
"아버지, 포상팔국이 침략했어요."
 
미리는 움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다급하게 말했다. 미역과 고기를 말리고 있던 이루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정말이냐?"
"예. 저도 출전해야 해요."
"그래, 미리야. 너는 신성한 천손의 기상을 받고 태어난 아이니라. 가서 용맹하게 싸워 적들을 물리치렴."
"예, 아버지."

미리는 빠른 몸놀림으로 말 위에 올라탔다. 그녀는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런데 채찍의 솔기 하나가 빠져 땅으로 떨어졌다. 그 사실을 모르는 미리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루는 땅에 떨어진 솔기 하나를 주워들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이루와 아내는 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 분산성 전투

   
▲ 가락국 병사들이 포상팔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분산성.
채현은 비장한 표정으로 성 아래를 응시했다. 성 밖에는 포상팔국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예 병력인 미유 장군의 돌격대는 해안가에서 보라국 병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제 이곳 분산성 방어는 오로지 수국단에게 달려 있었다. 채현은 두렵지 않았다. 아직 수국단원들이 온전히 남아 있고 수국단 최고의 전사 미리가 있지 않은가? 쇠뇌 하나로 백 명의 적 심장에 화살을 날리는 미리가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다.
 
미리와 연경은 쇠뇌를 이용하여 포상팔국 병사들을 가차없이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화살을 날릴 때마다 보라국 병사 두, 세명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밀려드는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차츰 수국단원들의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채현도 단원들을 독려하며 열심히 화살을 날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서쪽 언덕에서 일단의 함성이 들리더니 대가락국 철기병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궁궐에서 보낸 지원병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철기병을 본 모든 수국단원들과 가락국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울렸다.

지원병이 도착함과 동시에 숲속에 숨어 있던 미유 장군의 돌격대도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에 호응하여 분산성도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포상팔국 병사들은 사면초가에 몰리게 되었다. .

그렇게 사흘 밤낮으로 가락국 병사들과 포상팔국 병사들은 혈전을 벌였다. 적들은 수국단의 화살에 맞서 쉴 새 없이 분산성으로 대응 화살을 날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중의 화살 하나가 그만 미리의 가슴팍으로 파고들다니! 미리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악, 미리야."

연경은 고함을 지르며 미리에게 달려갔다. 그 사실을 모르는 채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적들을 향해 계속 화살을 쏘았다. 드디어 포상팔국 병사들은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미유 장군은 추격전에 나섰고, 채현은 비로소 미리가 화살에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덧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먹장구름이 와르릉 몰려왔다. 수국단원들은 모두 미리의 시신 앞으로 모여들었다. 채현과 연경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시신을 붙들고 절규했다. 툭, 툭.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분산성으로 거대한 물기둥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비가 몰고 온 안개가 자욱이 분산성을 감싸고 있었고, 성 안 곳곳에서 눈물과 함성이 몰아치고 있었다.
 

■ 예안리 묘터에 묻히다.
   
▲ 대동면 예안리 고분군. 이곳의 가야 무덤에서는 사람 뼈가 많이 발견됐다. 또 가야 시대 투구 이외에도 도끼, 화살촉, 창, 손칼, 큰칼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아침부터 우중충한 날씨였다. 이루와 추미는 딸의 시신을 앞세우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신어산 남쪽 자락의 평평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 뒤로 수국단원들과 마을 사람들, 가락국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분산성 전투는 미리를 포함한 열 명의 수국단원들을 희생시켰다. 그들은 모두 낮은 신분이었기에 평민의 묘지인 예안리 묘터에 묻히게 되었다. 이루는 눈을 들어 신어산 자락을 잠시 쳐다보았다. 신의 물고기가 산다는 전설의 산. 대가락국이 어떤 나라인가? 수로왕과 허왕후께서 북방과 서역의 문화를 합쳐서 만든 위대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딸이 그는 너무 애틋했다.

그들은 까치산에서 동쪽의 마산으로 길게 연결된 넓은 습지로 다가갔다. 평지 이곳저곳에는 앞서 간 선조들의 묘지가 놓여 있었다. 그 묘지들 사이로 나무로 만든 관들이 놓여 있었다. 미리는 남쪽에 있는 묘터에 묻히게 되었다. 딸의 시신이 묘터 안으로 들어간 후, 이루는 딸의 시신 옆에 도자기와 칼, 창, 갑옷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미리가 남겨놓은 채찍 솔기를 놓아두었다.

나무관의 뚜껑을 덮으면 이제 딸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이루는 천천히 몸을 숙여 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납작하고 평평한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루는 딸의 모습을 떠올렸다.

'참으로 작고 소담스런 이마로구나. 먼 후일, 미리의 모습을 후손들은 어떻게 말할지. 천손이시여, 허왕후시여. 영원히 이 가락국을 보호해주소서.'

이루는 낮게 중얼거리며 직접 딸의 관에 나무뚜껑을 닫았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었지만 묘지에는 장엄한 향기가 는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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