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10년 동안 100근 가까이 섭취
술·기름진 음식 등 멀리하며 섭생 철저


▲ 인삼으로 허약한 체질을 다스렸던 영조.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기록을 보면 영조에게는 다른 왕들과는 몇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천수를 누리며 장수했고 서늘한 약이 아닌 더운 약성의 한약을 달고 살았다. 조선시대 왕들은 장군이었던 태조 이성계의 피를 받아 화병이나 염증성 질환이 많았다. 영조의 아버지였던 숙종은 불같은 성격이었고, 손자인 정조는 열이 오르는 종기로 고생하다 사망했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선조의 사망 후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써서 선왕이 사망했다"는 타박을 받았다는 점은 그래서 참고할 만하다.
 
영조는 주로 소화기계의 질환인 비위허한·담음·설사 등이 있어 이중탕·건공탕·오적산과 같이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약물을 빈번히 복용했다. 검소하게 살았으며 금주령을 내려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을 절제했다. 권력의 중심이었던 왕이었지만, 그가 제일 좋아했던 음식은 청포묵이었다. 훗날 청포묵은 탕평채로 불리게 되는데 김의 검은색, 청포묵의 흰색, 고기의 붉은색, 미나리의 푸른색을 조합해 만들었다. 당시 극심했던 붕당의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검소함과 금주, 음식의 절제는 눈에 띄는 건강비결의 하나이며, 영조의 장수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
 
화증(火症)의 가족력이 뚜렷한 조선 왕계에서 영조는 인삼을 즐겨 먹었다. 삼령차를 주로 즐겨 마셨고, 죽기 전 10년 동안 인삼을 100근 가까이 먹었으며, 자신이 복용한 인삼의 양을 살피기까지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이 냉함을 잘 알았던 그는 연제법(煉臍法·배꼽 뜸질)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뜸을 자주 떠 경도화상의 고통을 알게 된 그는 의금부에서 국문을 할 경우 인두로 살을 지지는 낙형(烙刑)을 금하도록 하기도 했다.
 
시쳇말로 '골골팔십'이라 했던가. 영조를 보면 유독 일본 기업 내셔널사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가 연상된다. 영조와 마쓰시다 모두 허약해 잔병치레가 잦았지만 영조는 83세, 마쓰시다는 94세의 천수를 누렸다. 고노스케는 자신에게 3가지 행운이 있음을 밝혔다. 첫째가 조실부모 하여 일찍 철이 들 수 있었고, 둘째는 초등학교 4년을 다니고 중퇴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배움을 청하는 데 걸림이 없었고, 누구든지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으며, 셋째는 몸이 약해 항상 건강을 돌보게 돼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난과 허약한 몸, 못배운 것 등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570개의 기업과 종업원 19만 명을 거느리는 회사를 이룩한 '경영의 신'다운 혜안이다.
 
영조의 장수 비결을 보면 몇가지 배울 점이 있다. 반면 단명하거나 천수를 누리지 못한 왕들한테서는 결점이 보인다. 정조는 지독한 골초였고, 성종은 호색한이었다. 연산군은 양육과 애정 획득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광해군은 '신무불신의'(信巫不信醫·무당을 신뢰하고 의학에 불신을 갖다)라 저주와 주술에 지나친 믿음을 보였다. 숙종은 성격이 너무 다혈질이라 감정 조절에 실패했고, 세종은 육식을 지나치게 편애했다.
 
이에 비해 영조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기름진 음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자신의 선천적인 허약함을 깨달아 평생 섭생 관리에 힘을 쏟았고 체질에 맞게 인삼을 복용했다. 또 붕당의 소용돌이 와중에서도 정치 스트레스에 물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건강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실천 행동이야말로 건강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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