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위로 몰리는 역삼각형 얼굴 특징
혈기 막혀 등창 번지고 이차감염 추정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특히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임금을 꼽으라면 팔의론(八醫論)을 저술한 세조와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 조명받은 바 있는 정조가 아닐까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종(宗)을 붙이지 않고, 조(祖)를 붙이는 임금은 집권 과정이 순탄치 않았거나 집권 당시 정치적 격변기가 많았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했고,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사된 후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다.
 
조선시대 임금의 정치적 업적을 놓고 보자면 세종과 정조가 으뜸이 아닐까. 세종은 한국은행권에도 들어가 있어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정조 역시 정치적 이상이 높고 치적이 많은 임금이다. 단 세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정조는 노론과 소론 등 붕당정치가 이루어져 신권이 우세한 가운데 왕권강화를 통하여 민생안정을 꾀하였다는 측면에서 역사적인 배경의 차이가 있다. 정조는 이러한 붕당의 혁파, 이른바 탕평책이라는 공평한 인재등용을 추구했고, 그 가운데에 '규장각'이 있다. 정조의 싱크탱크라고 보면 된다. 뿐만 아니라 육의전 이외의 금난전권을 폐지해 곡물가격을 안정시켰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경제사에서는 신해통공을 자본주의의 맹아로 여겨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규장각과 신해통공은 모두 '왕권강화'로 집약될 수 있다. 그만큼 노론벽파의 신권이 강했으며, 왕권과 신권의 긴장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규장각은 노론이 아닌 정조의 사람을 쓰겠다는 뜻이며, 신해통공은 진입장벽의 철폐로 카르텔을 붕괴시켜 물가상승을 안정시킴은 물론 노론의 돈줄을 틀어막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왕권강화 정책과 아버지의 죽음은 정조에게 건강이라는 숙제를 남기기도 했다.
 
정조의 어진(御眞)을 보면, 입술은 얇고 갸름하며 얼굴은 역삼각형의 형상이다. 전체적으로 하관이 약한데, 이는 기운이 위로 몰리기 쉬운 형상이며 한의학적으로 화(火)가 많은 상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어린 정조에게 큰 심리적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간기가 울체되기 쉬웠을 것이다. 기의 원활하지 못한 흐름은 모두 화(火)로 변한다. <홍제전서(弘濟全書)> 일득록(日得錄)을 보면 '나는 젊었을 적에 몸에 열이 많아서 음식을 겨우 먹었으므로 날마다 우황과 금은화를 먹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최근의 DSM Ⅳ의 진단기준으로 보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정조의 사망 원인을 종기(등창)로 인한 후유증으로 보는 데 한의학자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종기는 옹저(癰疽)라고 하는데, <동의보감>에서는 옹저의 원인을 화(火)로 본다. 혈기가 막히고 찬기운과 열이 흩어지지 못해서 생긴다고 옹저의 원인을 기술하고 있다. 옹저가 생기면 죽을 수 있는 부위로 다섯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등이다.
 
또한 옹저는 고름의 유무와 그 깊이를 구분하여 예후를 판정해 치료하는데, 이러한 옹저는 오늘날 봉와직염과 유사하다. 따라서 정조는 등창과 함께 이차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제중신편>의 저자 어의 강명길은 고암심신환과 청심연자음을 처방하였는데, 모두 열을 내려주는 처방이다. 오늘날은 항생제의 발달로 감염질환의 관리가 쉬워졌으나 당시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