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 연대측정 결과와 의미

2012년 6월 봉황동 연립주택 신축 부지 발굴 조사 현장에서 출토된 이른바 '가야의 배'는 가야가 일본 등과 무역을 펼쳤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가야가 신라·백제보다 앞서 국제 해상무역을 벌인 국가였다는 것이다. 또 허황옥이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타고 왔다는 배와 크기가 비슷하다는 점도 주목을 받는다.
 
고대의 배는 통나무배, 반구조선, 구조선으로 분류할 수 있다. 통나무배는 나무를 파서 만든 가장 원시적인 배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선박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경남 창녕의 신석기시대 비봉리 유적에서 나온 배가 통나무배다. 반구조선은 배 밑바닥은 통나무를 파서 만들고, 측면은 목재를 짜 맞춘 배다. 통나무배와 반구조선으로는 많은 인원과 물자를 싣고 먼 거리 항해를 할 수 없다.
 
선박 부재 결합방식과 크기로 따졌을 때
배 길이 8~15m·20~30명 승선 규모 추정
신라·백제보다 앞서 봉황동 국제항 입증
허황옥 인도 배와 크기 비슷한 점도 주목


원래 봉황동 '가야의 배'는 반구조선이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지난해 5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이 진영2지구 택지 개발 사업지구 내 문화 유적 발굴 조사 현장에서 발굴한 가야시대 배 모양 토기 때문이었다.
 

▲ 보존처리가 완료된 봉황동 출토 선박 부재.

이 토기는 길이 22.5㎝, 너비 10.5㎝, 높이 4.5㎝ 정도의 크기였는데, 배 아랫부분의 생김새가 통나무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영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에서 '가야의 배'는 구조선으로 추정됐다. 목재를 설계해서 완벽하게 짜 맞춘 배라는 것이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의 이광희 연구원도 "우리나라 최초의 구조선 유물의 실물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가야의 배'를 구조선으로 보는 것은 크기와 선박 부재의 결합 제작 방식 때문이다.
 
▲ 가야시대 배 모양 토기와 비교해보면 배 앞머리 측판 상단부(노란 점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봉황동 '가야의 배' 선박 부재는 길이 390㎝, 폭 32~60㎝, 두께 2~3㎝의 대형 목재 유물이다. 선박 부재의 크기로 볼 때 실제 선박의 길이는 8~1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도 크기라면 20~30명 정도가 탈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인원과 물자를 싣고 먼 바다를 항해하려면 배가 커야 하고, 배가 커지려면 여러 개의 목재를 결합해 구조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가야의 배'가 구조선이라는 것은 가야가 신라, 백제보다 훨씬 먼저 국제 해상 교역을 주도했다는 역사적 증거다. '가야의 배'는 당시 가야가 국제해상교역의 중심 국가였고, 봉황동 유적이 국제항이었음을 설명해준다. 실제 김해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을 살펴보면 '가야의 배'가 무역선이었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가야의 배'의 제작 연대는 이번 조사에서 3~4세기로 밝혀졌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대성동 고분군 88호에서는 왜(倭)의 유물인 파형동기가 출토됐다. 4세기 때 만들어진 이 고분군에서는 또 왜의 토기, 청동창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거꾸로 일본의 오사카, 교토, 나라 지역에서 발굴된 고분군에서는 가야 토기와 철기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볼 때 '가야의 배'는 가야의 문물을 왜에 수출하고 왜의 물건을 운송해 온 배 중의 하나라고 추정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가야의 배'가 눈길을 끄는 것은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황옥과의 연관성 때문이기도 하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의 송원영 학예사는 "이번에 발견된 선박 부재로 배의 크기를 짐작해볼 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돼 있는, 인도의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올 때 타고 온 배의 규모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가락국기에는 '왕후가 산 밖의 별포 나루터 입구에 배를 대고…(중략)…노비까지 합치면 모두 20여 명이었다.(중략) 마침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기 양식으로 쌀 10석,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라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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