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직후 두눈·몸 풍열증 나타나
즐겨 마신 커피도 체내 수분 배출해


구한말은 격동기였다. 쇄국파와 개화파의 파워 게임 중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한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는 청군을 끌어들여 자신을 보호했고, 이에 1884년 급진개혁 성향의 개화당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국가를 세우려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허나 청군의 개입은 3일 천하로 끝났다. 청일 양국 군대가 주둔하게 되자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청일전쟁으로 무력화된 청나라 대신 러시아를 끌어 들이려는 명성황후의 노력은 결국 1895년 을미사변의 도화선이 된다. 주지하듯이 을미사변은 전국적으로 의병의 봉기(을미의병), 신변에 두려움을 느낀 고종의 아관파천의 원인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종은 을미사변 이전에 입진(入診) 기록이 드물다. 고종 27년인 1890년 5월 여름감기로 체후(體候)가 편치 않다는 정도의 기록뿐이다. 그러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고종에게 가려움증이 나타난다. 11월 29일에는 '얼굴의 증상은 나아가지만, 두 눈과 몸의 풍열증으로 괴롭고 매우 가렵다'고 하였다. 12월 1일에는 '밤새 온몸이 가려웠고, 눈의 풍열증도 아직 차도가 없다'고 했다. 당시 태의원의 진단은 '원기가 빠져서 약해지고 체증으로 허한 틈을 타서 나타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탕약은 가미소풍산으로 의논해 정하고, 연고는 파초즙에 우황을 섞어서 지어들이겠다고 한다. 12월 7일에는 고종이 '얼굴의 풍열증과 몸의 가려움이 끝내 시원하게 낫지 않으니, 탕약은 이전 처방대로 하되 승마와 갈근을 한돈씩 더 넣어 올리라'고 한다.
 
<동의보감>을 보면 소풍산은 두풍증, 발진, 오늘날 한센병으로 추정되는 대풍창에 쓰는 처방이다. <소아문>을 보면 천연두를 앓은 후 잡병에 사용한 기록도 있다. 고종의 풍열증은 두풍증과 은진(알레르기성 피부염)의 범주로 볼 수 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두풍증은 '담음'에 의해 생긴다. 담음은 기혈 순환이 원활치 못할 때 생기는 그을음 같은 것이다. 당시 고종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의학에서는 폐장이 피부와 터럭을 주관한다고 본다. 폐의 기운이 강건해야 두피와 모발을 비롯한 피부도 깨끗하고 건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종의 경우 풍열이 체표에 쌓여 있으면 풍을 날려주고 열을 내리는 치료법이 우선이겠으나, 정치적 격변기로 원기가 손상돼 피부에 풍열이 침범하여 가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원기를 함께 보하는 약재가 소풍산의 원방에 가감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소개로 처음 커피를 접하게 된다. 고종이 커피 애호가가 되자 일본은 러시아어 통역관 김홍륙을 통해 커피에 독을 넣어 독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때의 독살은 실패로 돌아가나 헤이그 밀서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고종을 협박해 퇴위시킨다. 이어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돌연 승하하자 일제의 독살설이 항간에 퍼져나가 3·1운동 촉발의 동기가 된다. 커피는 한의학의 기미론(氣味論)으로 보면 향이 있고 쓴맛이 강하다. 쓴맛은 수분을 체외로 배출시켜 소변을 자주 보게 하는데, 몸을 건조하게 한다. 커피의 건조함은 체표의 수분을 소모시켜 더욱 가렵게 하므로, 고종에게 커피는 맞지 않는 기호식품이다. 그러나 커피가 서구화의 상징이요, 사교행위의 매개수단이라 고종이 즐겨 찾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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