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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벌판 적신 활천 서낙동강으로 흘러들고 해반천 윤슬엔 가락국 옛 영광이 아른아른(28) 활천(活川) 해반천(海畔川) 덕교(德橋) 첨성대(瞻星臺) 자암(子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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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4.01.21 14:55
  • 호수 157
  • 12면
  •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kugh@silla.ac.kr)

   
▲ 활천(신어천)은 신어산에서 시작돼 가야평야 벌판을 적시며 흘러 초선대를 지나 서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불암동의 시만교 부근에서 서낙동과 만나는 활천의 모습. 김병찬 기자 kbc@gimhaenews.co.kr
호계(虎溪)는 오랜 세월 김해의 중앙을 적시는 생명줄이었다. 이와 함께 동쪽은 활천(活川), 즉 신어천(神魚川)이, 서쪽은 해반천(海畔川)이 그 역할을 해주었다. 활천은 신어산 서쪽 산기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가야저수지를 지나고 활천동(活川洞)과 삼방동(三芳洞)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 초선대(招仙臺)를 지나 불암동(佛巖洞)의 시만교 부근에서 서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다음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의 시를 보자.


해동문 밖 북풍이 차가운데
나막신 끌고 길을 가니 오랜 절이 보인다
역정의 나무 우거지고 들의 연기 일어나고
꿈틀대는 구름 붉은 빛 강의 해가 저문다
북극까지 높은 하늘 고개 돌리니 아득하고
남쪽 바다에 닿은 땅 바라보니 광활하구나
미친 놀음 인연을 타고 빼어난 경치 찾으니
날리는 눈 의관을 때려도 아랑곳 않는다  

海東門外北風寒(해동문외북풍한)
攜屐行將古寺看(휴극행장고사간)
驛樹蒼沈野煙起(역수창침야연기)
蜒雲紅暎江日闌(연운홍영강일란)
天高北極回頭杳(천고북극회두묘)
地接南溟縱眼寬(지접남명종안관)
狂劇秖緣探勝境(광극지연탐승경)
任他飛雪撲衣冠(임타비설박의관)

 

 
<허훈, 활천도중(活川途中)>  



<동국여지승람>에 '활천은 남쪽으로 처음 5리, 끝이 15리다'라고 하였다. 신어산에서 시작한 활천의 처음 물줄기는 가야저수지를 지나면서는 평평한 들판을 완만하게 흘러가며 아득한 김해평야의 벌판을 적신다. 시인은 이러한 활천의 흐름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고 있다. 첫 번째 구절의 해동문(海東門)은 김해읍성의 동문(東門)이다. 참고로 서문은 해서문(海西門), 남문은 진남문(鎭南門), 북문은 공진문(拱辰門)이다. 읍성의 동쪽인 활천고개에서 김해의 경관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 신어산 자락의 사찰들이, 뿌옇게 보이는 해질녘 역정의 나무와 강물이, 멀리 바다로 이어지는 김해평야가 펼쳐진다. 활천은 한자로 보면 살 활(活)자를 써서 역동적이거나 생동감이 대단한 물줄기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화살을 얹어 쏘는 활 모양처럼 길게 휘면서 흐르는 물줄기라는 뜻이며, 대부분 평야를 완만하게 흐른다. 신어산에서 시작해 활 모양으로 김해평야를 빙 돌아 흐르는 활천의 흐름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면 허훈이 시에서 표현한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온다.
 
   
▲ 초선대 방향으로 본 활천.
해반천은 김해시의 삼계동(三溪洞)과 화목동(花木洞), 장유면(長有面)을 적시며 흐른다. 신어산의 서쪽이며 나전리(羅田里)로 넘어가는 삼계동 나밭고개(羅田嶺, 羅田峴, 나전티, 羅田峙, 露峴)에서 시작해 주변에 작은 습지를 이루면서 흘러내려 김해시의 서쪽 시가지 중심을 남쪽으로 흐르다 화목동과 옛 장유면 응달리(應達里)의 경계부에서 조만강(潮滿江)으로 들어간다. 옛날 대동(大東)이나 녹산(菉山)의 수문이 없어 삼분수(三分水)의 물이 아무런 걸림 없이 흘러들거나, 남쪽의 바닷물이 서낙동강을 밀고 올라왔을 때는 배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는 물이었음은 지금 현재의 넓이나, 주변 봉황대 주거유적과 연지공원(蓮池公園) 등 습지의 존재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굳이 이렇게 상상하지 않아도 해반, 즉 바닷가라는 물 이름이 왜 붙었는지를 생각해보아도 이 물줄기의 옛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조선조 말 허훈과 이종기(李種杞·1837∼1902)의 시다.


해마다 애가 끊기는구나 하방회는
흐릿한 초원 하나같이 마름질 되었네
아직 육조의 화려한 기운이 남아 있어
떨어지는 꽃 무수히 붉은 꽃잎 날리네  

年年腸斷賀方回(연년장단하방회)
煙縷平蕪一樣裁(연루평무일양재)
猶有六朝金粉氣(유유육조금분기)
落花無數襯紅來(낙화무수친홍래)

 

 
<허훈, 해반방초(海畔芳草)>  


첫 구절의 하방회(賀方回)는 중국 송나라 때의 하주(賀鑄·1052~1120)로, 사(詞)의 대가다. 그의 작품에 <청옥안곡(靑玉案曲)>이 있는데, 그는 님과 이별한 찢어지는 마음을 "색칠 붓을 가지고 애끊는 시구를 새로 짓는다(彩筆新題斷腸句)"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셋째 구절의 육조(六朝)는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南京) 부근, 건강(建康))에 도읍했던 여섯 나라인 오(吳)·동진(東晋)·송(宋)·제(齊)·양(梁)·진(陳)을 말한다. 시인은 마름질한 듯 해반천 주변에 가지런히 펼쳐진 초원과, 그 위로 흩날리는 꽃잎의 아름다움을 중국 왕조 최고의 수도 가운데 하나였던 금릉의 그것과 하주의 시 구절에 비유하여, 해반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옛 가락국의 영광과 아름다운 풍광을 다시 보듯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풀 우거진 해반 어지러운 풀꽃 
아득한 들 밖 자라난 기장과 벼 
해질녘 사람들 흩어져 돌아가고 
산 앞길 소 몰고 가는 삿갓 쓴 사람   

萋萋海畔迷芳草(처처해반미방초)
漠漠郊原長黍稻(막막교원장서도)
日暮烟橫人散歸(일모연횡인산귀)
驅牛荷笠山前道(구우하립산전도)

 

 
<이종기, 해반방초(海畔芳草)>  


위 허훈의 시와 같은 제목인 이 시 또한 해반천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 폭의 그림처럼 읊은 것은 한가지다. 그러나 허훈의 그것과는 달리 소박하고 생활에 밀착된 표현이 무척 정겹다. 허훈의 시가 가지런히 펼쳐진 초록 풀밭에 흐드러진 꽃을 중심 소재로 하였다면, 이종기는 이를 배경으로 펼쳐진 논밭과, 삿갓을 쓰고 소를 몰고 가는 농부를 중심 소재로 해반천 주변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그리고 있다.
 
   
▲ 주촌면 천곡리 떳다리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 돌다리 덕교의 흔적은 물 속에 잠겨 옛 풍광을 감추고 있다.
다음은 잠시 해반천을 건너 조만강의 상류 조만천을 끼고 형성된 주촌면(酒村面) 천곡리(泉谷里)로 가자. 이곳에는 자연마을로 떳다리(뜻다리, 득교, 덕교, 부교)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돌다리 덕교(德橋)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덕교(德橋)는 덕포(德浦)에 있다. 배들이 그 밑을 지나 주촌지(酒村池)에 정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촌지(酒村池)는 부 남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둘레가 4천 230척이라고 하였다. 1800년대 초 <김해읍지>에는 '덕교포는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니 바다 물결이 드나든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덕교는 김해 남쪽의 바다 및 서낙동강 등과 주촌 지역을 연결하던 중요 뱃길에 놓인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항구에 아른아른 가로 누운 무지개 
소금 말과 나무꾼 한 길로 지나가네 
밝은 달밤 어찌 저리 서령과 같을까 
계수나무 연꽃 속 붉은 난간이 삼백   

依依港口臥晴虹(의의항구와청홍)
鹽駱樵蘇一路通(염락초소일로통)
何似西泠明月夜(하사서령명월야)
紅欄三百桂荷中(홍란삼백계하중)

 

 
<허훈, 덕교행인(德橋行人)>  



오랜 세월 김해의 남쪽 바다인 명지동(鳴旨洞)과 녹산동(菉山洞) 일대는 경상남북도 일대까지 소금을 공급하던 유명한 염전이었다. 따라서 이곳으로부터 바다를 통해 실어온 소금을 배에서 내려 경남 내륙 쪽으로 실어 나르던 소금 실은 말이 덕교를 지나가는 것은 당시에는 아주 흔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나무꾼이 지게 하나 가득 나무를 지고 지나가는 모습을 얹은 시의 묘사는 그 옛날 덕교 주변을 가장 적절히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세 번째 구절의 서령(西 )은 중국의 대표적인 물의 도시 항주(杭州)의 서계(西溪)·서호(西湖)와 함께 삼서(三西)라고 불리는 유명한 물줄기로, 덕교 주변의 풍광을 그곳에 비유하고 있다.


다리 위 오는 사람 또 가는 사람 
작은 배가 갈대 물가에 버티고 있네 
성스러운 시대 서호는 막혀 뚫리지 않고
들녘 물결 길게 보내니 물결 속 꽃 피는 봄  

橋上來人復去人(교상래인부거인)
小舟撑在荻蘆濱(소주탱재적로빈)
聖代西湖湮不得(성대서호인부득)
野潮長送浪花春(야조장송랑화춘)

 

 
<이종기, 덕교행인(德橋行人)>  


호수처럼 넓게 펼쳐진 조만천으로 쉼 없이 밀려오는 꽃피는 시절 봄 물결과, 잔잔한 물결 위에 꿈쩍없이 버티고 있는 작은 배, 그 위에 걸쳐 있는 덕교 위로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에서 옛 덕교 주변의 생동감을 잘 느낄 수 있다.
 
이제 조금 더 서쪽으로 가서 가락국 시대 중심지의 하나였던 진례성(進禮城) 풍경을 잠시 보고 돌아오자. 시인 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진례촌(進禮邨)은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수로(首露)가 그의 아들 하나를 봉하여 진례성주(進禮城主)로 삼고 왕궁(王宮)과 태자단(太子壇), 첨성대(瞻星臺)를 건설하였으니, 터가 아직 남아 있다. 자암(子菴)과 모암(母菴)도 수로 때에 건설한 것인데, 지금은 없다'고 하였다. 다음은 그의 시다.


첨성대 옛날 터엔 돌이 층층 쌓여 있고 
자그마한 경성은 차가운 달만 떠있네 
한결같이 자암도 겁화를 겪게 되어 
왕손의 봄풀만이 해마다 새롭구려   

瞻星舊址石嶙峋(첨성구지석인순)
小小京城冷月輪(소소경성냉월륜)
一例子菴隨劫火(일례자암수겁화)
王孫春草逐秊新(왕손춘초축년신)

 

 
<이학규,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  


안미정 선생은 그의 석사 논문 <이학규의 금관죽지사·금관기속시 연구번역>에서 1900년대 초기 <김해읍지> 등의 기록과 현재의 흔적들을 참고로 하여, 첨성대의 터는 지금 진례면 송정리(松亭里)에 있다고 하고, 자암은 진영읍(進永邑) 본산리(本山里) 봉화산(烽火山)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암은 생림면(生林面) 생철리(生鐵里) 무척산(無隻山)에 있었던 모은암(母恩菴)이라고 하며, 이는 밀양시(密陽市) 삼랑진읍(三浪津邑) 안태리(安泰里) 주산(主山)의 부암(父菴)과 함께 가락국 왕실의 기원처(願堂)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이러한 이름들이 보이지 않고, 1800년대의 <김해읍지>에는 자암봉(子菴烽)이라는 봉수대의 이름으로 남아 있을 뿐이라, 이 암자들은 아주 이른 시기에 사라져 가락국과 함께 전설의 한 조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무심한 달빛만 그 옛날의 영화를 감추고 있는 그 황폐한 터를 비출 뿐이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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