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안긴 아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웃는 아이, 아이를 하늘 높이 올려주는 어머니, 아이와 함께 먼 곳을 바라보는 어머니….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이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마음을 부드럽고 평화롭게 해준다.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아이의 모습.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고향 같다. 그 모습을 조각한 게 모자상이다. 모자상은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보는 사람에게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 조각가 김외칠(55) 씨는 모자상을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 김외칠 조각가가 모자상 '순수한 행진'을 설명하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김외칠의 작업장 '반석조형'은 진영읍 신용리 496에 있다. 반석조형 앞마당에 들어서니 모자상이 먼저 반겨준다. '반석조형'은 작업공간과 손님을 맞는 응접 공간 겸 휴식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눈가는 곳마다 모자상과 그의 작품 모형들이 장식돼 있다.
 
김외칠은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태어났다. 또래 친구들이 글자를 배울 때 그는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 "학교 다닐 때 게시판에 제 그림이 늘 걸려있었죠. 특별활동은 항상 미술반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그는 서양화, 수채화, 유화 등을 혼자서 익히고 그렸다. 그랬던 만큼 한 번도 미술이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는 미술을 전공하려 했으나, 부모님이 그림 그리면 힘들게 산다며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은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부산공예고등학교였다. 아들의 마음을 헤아린 부모님은 결국 "네가 알아서 하라"며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공예고등학교 시절, 그를 가르친 교사들은 그의 그림 실력이 다른 학생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선생님들 중에는 입시미술을 가르치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들이 제게 입시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가르치라고 하셨어요. 초량동 근처에 있던 입시미술학원에 가서 저하고 같은 나이의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많이 했죠. 미술전반에 관한 이론공부는 물론이고 실기까지."
 
완벽한 조화와 조형성 갖춘 모자상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예술성 뛰어나

미켈란젤로와 로댕 작품보며 연구
영원하고 보편적 진리의 세계 추구


그가 처음 모자상을 만든 것도 공예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나라에서는 충효사상을 담은 조형물을 전국의 각급 학교에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모자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교육청이나 문교부에서 공예고등학교 선생님들께 모자상 제작을 부탁했던 것 같아요. 조소과 지도교수였던 장상만, 김병화 선생님께서 저에게 모자상을 만들 기회를 주셨죠. 제 실력을 인정하셨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생 시절에 셀 수 없이 많은 모자상을 만들었어요. 그때 학교에서 제 별명이 '모자상 기능공'으로 통했을 정도였지요."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는 공예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도 장상만 교사 밑에서 모자상을 만들었다.
 
▲ 어머니가 아이를 감싸는 숭고한 사랑을 표현한 김외칠의 모자상.
많은 학교들에 모자상을 보냈다니, 그가 만든 모자상을 볼 수 있는 학교가 궁금했다. "부산과 경남 일대의 초·중·고등학교에 보냈다는데 어디에 보냈는지까지는 일일이 알 수 없어요. 한 군데 기억나는 학교는 있어요. 부산 동주여상에 있는 모자상이 제 작품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기자는 깜짝 놀랐다. 동주여상(현 동주여자고등학교)은 부산 원도심의 중심인 광복동 한가운데에 있는 학교이다. 정문은 유나백화점에서 미화당백화점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인접해 있고, 후문은 용두산공원 쪽으로 나 있다. 부산의 상권이 서면과 해운대 센텀지역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부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였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동주여상 앞을 지날 때마다 모자상을 보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김외칠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처음 모자상을 만들 때는 미켈란젤로와 로댕의 작품을 보면서 연구를  했습니다. 돌을 깎아서 만들면 2개월 남짓 걸렸는데, 힘들다는 생각은 안했습니다.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는 모자상을 일러 '완벽한 조화와 조형성을 갖춘 작품이고, 가장 숭고한 사랑과 희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모자상은 어머니와 아이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조각으로 표현하면 큰 덩어리(어머니)와 작은 덩어리(아이)가 됩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거죠. 어떠한 조화도 이보다 자연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그는 모자상의 조형적 특성부터 먼저 설명했다. 모자상은 그 어떤 조각보다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그는 말했다.
 
"어머니와 아이, 엄마와 아기는 떨어질 수 없는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가장 숭고한 사랑과 생명, 절대적인 하나의 우주 같은 것이죠." 모자상이 보여주는 사랑에 대해 설명할 때 그의 목소리에서는 열정이 묻어났다. "두 사람의 사랑을 표현할 때, 남녀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가 아이에게 보내는 사랑이 더 숭고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김외칠은 모자상의 경우 아무리 추상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알아본다고 말했다. "모자상의 현대적 작품 중에는 단순화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큰 덩어리와 작은 덩어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 작품이 모자상이란 사실을 바로 떠올립니다.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 그리고 동양과 서양, 언제 어디서 만들더라도 모자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 선대의 삶에서 보아온 어머니의 사랑, 그 사랑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이니까요. 만약 모자상을 누드로 표현한다면, 동서고금의 모자상은 다 똑같은 모습 아니겠어요?"
 
그는 언젠가 자신이 제작한 모자상이 서 있는 부산의 한 아파트 앞을 지날 때의 일을 들려주었다. "아이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모자상 앞을 지나는데 아이가 '저기 엄마가 있네'라고 말하고, 어머니는 '저 아이는 꼭 너 닮았네' 하면서 활짝 웃고 지나가더군요. 저도 행복했어요."
 
문득 그의 어머니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사랑을 다 내어주셨죠. 자식의 편에서, 그림자가 되어주고, 그늘이 되어주고, 간섭도 안 하셨어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 하염없이 편하고,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 2013 김해공예협회전에 출품한 '인어문양 차탁'. 화강석과 오석으로 만들었다.
모자상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나? 사실 그는 석공예, 브론즈, 금속공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하고 있다. "조각은 작은 건축입니다. 원래 조각은 건축에서 나왔습니다. 이곳에서 모형작품을 만든 다음 실제 작품을 따로 만들지요." 그의 작품은 김해의 이진 캐스빌을 비롯해 부산과 김해의 대단지 아파트, 낙동강 하구둑, 멀리는 충청북도 영주에까지 세워져있다. 부산 침례병원에 세워진 '구름기둥 불기둥', 부산 기장군의 '기장 차승가노래비' 등은 그 일대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저 많은 이야기를 다 싣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김해에도 가족 조각공원 있었으면…
 
김외칠은 김해에 조각공원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해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잖아요. 대동면, 상동면, 화포천, 어느 곳이든 조각공원이 있으면 가족들이 자연 속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비로소 반석조형 입구의 모자상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군대 제대하고 나서 만든 첫 작품입니다. '순수한 행진'이에요. 부산민주공원에서 25년 전시했다가, 공원이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이곳으로 가져왔습니다."
 
이 모자상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걸음마를 시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 발 한 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가 넘어질세라 어머니가 꼭 붙잡고 있다.

≫김외칠
조각가.
반석조형연구소 운영.
부산미술대전초대작가, 한국미술협회 회원, 김해공예협회회원.
대한민국미술대전심사위원·부산미술대전심사위원·대구미술대전심사위원·부산광역시미술장식품심사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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